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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천장 파괴자 박미희, 그가 해내면 역사가 된다

[스포츠 오디세이] 여자배구 통합우승 이끈 여성 감독
2018~19 프로배구 V리그 여자부 정규리그 우승과 챔피언결 정전 우승을 이끈 박미희 흥국생명 감독. [뉴스1]

2018~19 프로배구 V리그 여자부 정규리그 우승과 챔피언결 정전 우승을 이끈 박미희 흥국생명 감독. [뉴스1]

박미희(56) 감독이 이끄는 흥국생명이 지난 3월 27일 막을 내린 프로배구 V리그 여자부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했다. 정규리그 1위로 챔프전(5전3선승제)에 선착한 흥국생명은 도로공사에 3승1패를 거둬 정규리그-챔피언결정전 통합우승을 달성했다. 흥국생명 역사상 12년 만의 통합우승, 10년 만의 챔프전 우승이었다.
 
박 감독은 스포츠계 ‘유리천장’을 깬 여성 지도자로 주목받고 있다. 선수 시절 ‘코트의 여우’로 불린 박미희는 2014년 흥국생명에 부임해 여성 지도자 최초로 2016~17 시즌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지난 시즌은 꼴찌로 떨어졌지만, 팀을 재정비해 여성 감독 최초 챔프전 우승, 통합우승의 역사를 썼다.
 
지난 2일,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흥국생명 연수원에서 박 감독을 만났다.
 
 
통합우승을 축하합니다.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인가요.
“전혀 아닙니다. 우리 승점이 몇 점이고 현재 몇 등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한 경기 한 경기 몰입했어요. 중간에 ‘우리 승점 몇 점이니’ 물어볼 정도였죠. 시즌 전 ‘부상 없이 버티면 정규리그 3등은 할 것 같고, 그러면 마지막에 뒤집을 기회는 오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가장 큰 고비는 언제였나요.
“외국인 선수의 컨디션이 떨어졌을 때 어떻게 격려하고 끌어올릴지, 국내 선수가 실망하지 않고 얼마만큼 버텨줄지가 관건이거든요. 다행히 저희는 위기에서 끝까지 한 번도 안 떨어지고 간 게 우승의 동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작년 꼴찌 했을 땐 너무 힘들어서 그만둘 생각도 했다면서요.
“건강도 너무 안 좋았고, 다시 해낼 수 있을까 회의도 들었어요. 아무리 휩쓸리지 않는다 해도 쏟아지는 비난을 견디기도 힘들었고요. 그런데 2017년 정규리그 우승한 뒤 기사에 나온 ‘그녀가 가는 길이 곧 역사가 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어요. 이런 식으로 그만두는 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죠.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한번 더 해보고 ‘역시 박미희다’ 소리 들으면서 물러나고 싶었어요.”
 
‘코트의 여우’라 불리던 현역 시절 박미희 선수. [중앙포토]

‘코트의 여우’라 불리던 현역 시절 박미희 선수. [중앙포토]

여성 지도자로서 유리천장을 실감하시나요.
“여자배구 여성 감독 1호가 조혜정 선배님(2010∼11년 GS칼텍스)이죠. 한 시즌 만에 경질됐어요. 조 선배가 실패라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한 시즌 못했다고 쫓아내면 누가 새로운 걸 할 수 있을까요. 남자 감독이라도 그랬을까 싶어요. 그분이 그런 과정을 겪으며 길을 열었기 때문에 우리가 꿈을 꿀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어요.”
 
현실적인 차별이 존재한다고 보시나요.
“일단 여성에게 기회가 적은 건 분명하죠. 또 같은 결과가 나와도 여성 지도자에게는 ‘카리스마가 없어서’ ‘선수를 장악하는 능력이 떨어져서’ 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여성이 여자 선수를 지도하면 좋은 점도 있죠.
“아이들한테 어떤 터치를 해도 문제가 안 된다는 건 좋아요(웃음). 잘하면 엉덩이 두드려주고, 힘내라고 어깨를 만져줘도 괜찮거든요. 선수들의 신체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도 있고요. 아무래도 여자 선수 심리를 더 세심하게 느끼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건 감독님이 몰랐으면 좋겠다’하는 것까지도 간파할 수 있으니까요.”
 
‘감독은 영원한 짝사랑’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래요. 선수들에게 10을 주면 7∼8은 알아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감독은 주기만 하고 받을 생각을 하면 안 돼요. 난 똑같은 걸 주지만 받는 사람의 성격·성장배경 등에 따라 받아들이는 게 달라요.”
 
‘용병 대신 국내 스타’ 여자배구 인기 쑥쑥
 
V리그 챔프전에서 우승한 뒤 외국인 선수 톰시아와 포옹하는 박미희 감독. [뉴시스]

V리그 챔프전에서 우승한 뒤 외국인 선수 톰시아와 포옹하는 박미희 감독. [뉴시스]

흥국생명은 ‘배구 여제’ 김연경(31·터키 엑자시바시)이 뛰던 2006∼09년 전성기를 누렸다. 김연경이 해외로 떠난 뒤 한동안 침체됐다 이재영(23·1m78cm)과 박 감독을 영입하며 정상에 재등극했다. 이재영은 뛰어난 탄력을 이용한 강스파이크뿐만 아니라 탄탄한 수비력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지난 시즌 팀 부진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썼고, 국가대표 차출 거부 논란으로 악성댓글 폭격을 받았다. 올 시즌 정규리그·올스타전·챔프전 MVP를 휩쓴 이재영은 지난 1일 V리그 시상식에서도 “항상 말을 하면 욕을 먹지만, 어릴 때부터 해외 진출이 꿈이었어요”라며 여론의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박 감독은 이재영을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내기도 하고, 때로 엄마처럼 달래기도 하면서 심리적 안정과 자신감을 키워줬다.
 
이재영 선수가 많이 성장했습니다.
“가장 좋아진 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고, 그게 되니까 기술도 함께 좋아진 것 같아요. 농구·축구는 혼자서 다 제치고 골 넣을 수 있지만 배구는 달라요. 공을 잡을 수도 없고, 땅에 떨어져서도 안 되고, 두 번 터치할 수도 없잖아요. 반드시 동료의 도움이 필요하죠. 재영이도 작년에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독불장군으로는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아요.”
 
아직 트라우마를 못 떨친 것 같던데요.
“배구는 백전노장처럼 하지만 아직 재영이는 어리고 조그만 일에도 상처를 잘 받아요. 물론 많이 성숙했고,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표현도 잘 합니다. 키가 조금만 더 컸으면 해외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로 활약할 텐데 좀 아쉽긴 해요. 그러나 재영이 같은 스타일을 원하는 팀에 갈 수도 있겠죠. 기량을 더 발전시키고 오랫동안 뛸 수 있는 몸을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여자배구 인기가 타 종목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외국인선수 트라이아웃(한꺼번에 모아서 연습경기를 한 뒤 순번에 따라 지명)이 신의 한 수였던 것 같아요. 전에는 돈 많이 쓰는 팀이 좋은 용병 데려와서 혼자서 다 해버렸죠. 지금은 용병 수준이 비슷해지고 의존도가 낮아지면서 팀 간 전력 차가 줄고 국내 선수들 비중이 커졌어요. 물고 물리는 접전에, 국내 스타가 나오고, 경기 시간도 오후 5시에서 7시로 바뀌면서 시청과 직접 관람 환경이 좋아진 것도 인기 요인이죠.”
 
그럼에도 딸을 배구 시키려는 부모는 많지 않은 것 같은데요.
“다른 종목도 마찬가지죠. 아이들 숫자가 크게 줄었잖아요. 그래도 배구 인기가 올라가면서 이왕이면 배구를 시키겠다는 분들이 늘었어요. 키가 작으면 리베로, 크면 센터, 힘 좋으면 날개 공격수 하면 되니까 선택의 폭도 넓고요. 중요한 건 아이에게 운동 재능이 있느냐죠. 재능이 없으면 한계가 있어요. 좋은 선생님을 찾아주는 것도 부모 역할이죠.”


센터에 세터까지, 다재다능 ‘코트의 여우’

 
전남 해남 출신인 박미희는 광주여상-한양대를 거쳐 미도파에서 뛰었다. 1m74cm의 키로 센터·라이트·레프트에 심지어 세터까지 소화할 정도로 만능 선수였다. 그는 19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고관절 부상으로 큰 시련을 겪었다. 통증이 너무 심해 수면제를 사 모으며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할 정도였다. 다행히 팀 내 크리스천 후배의 헌신적인 보살핌과 기도 덕분에 기적 같은 회복을 했고, 88올림픽에 출전해 수비상을 받았다. 이 과정을 통해 박미희는 깊은 신앙의 세계를 경험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매일 16명 선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기도한다고 했다. 박 감독은 “우리 딸·아들을 위해 이 정도로 기도했으면 벌써 크게 성공했을 걸요”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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