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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단짝 우궈쩐 “저우가 공산주의자 될 줄은 몰랐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72>
중공 대표단 주최 만찬에 참석한 국민당 중앙 선전부장 우궈쩐(오른쪽 첫째)을 즐겁게 맞이하는 대표단 단장 저우언라이(오른쪽 둘째). 왼쪽 첫째와 둘째는 훗날 전인대 위원장을 역임한 예젠잉(葉劍英)과 둥비우(董必武). 1946년 1월 7일, 충칭 승리빌딩. [사진 김명호]

중공 대표단 주최 만찬에 참석한 국민당 중앙 선전부장 우궈쩐(오른쪽 첫째)을 즐겁게 맞이하는 대표단 단장 저우언라이(오른쪽 둘째). 왼쪽 첫째와 둘째는 훗날 전인대 위원장을 역임한 예젠잉(葉劍英)과 둥비우(董必武). 1946년 1월 7일, 충칭 승리빌딩. [사진 김명호]

전쟁은 묘한 속성이 있다. 사상이 서로 충돌하고, 뺏고 빼앗기기가 반복된다. 평상시라면 상상도 못 할, 온갖 일들이 벌어진다. 총성과 대포소리는 쉽게 잊힌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생이별과 엉뚱한 재회다. 우궈쩐(吳國楨·오국정)과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궈쩐의 부친은 교육열이 남달랐다. 신식 교육 체제가 일천하다 보니 좋은 학교가 드물었다. 전국을 헤맸다. 1907년 젊은 교육자 장보링(張伯齡·장백령)이 톈진(天津)에 난카이(南開)중학을 설립하자 큰아들을 입학시켰다. 장보링은 미국 유학 시절 존 듀이의 직계 제자였다. 학계에 명성이 높았다. 3년 후 대학 간판도 내걸었다.
 
난카이대학에 진학한 형은 첫 번째 방학을 고향에서 보냈다. 심심풀이로 우궈쩐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방학이 끝날 무렵 동생의 영어문장 보고 깜짝 놀랐다. 아버지에게 간청했다. “동생과 함께 톈진에 가겠다.”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이유가 분명했다. “너무 어리다.” 당시 우궈쩐은 소학교(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형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버지 둘째 아들은 천재다. 자식 어떤지 부모가 잘 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내가 빌어먹는 한이 있어도 큰 도시에서 공부시키겠다.”
 
형 손 잡고 톈진에 온 우궈쩐은 난카이중학에 응시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신입생 500명 중 나이도 가장 어렸다. 교장 장보링은 우궈쩐을 친자식처럼 총애했다. 매일 밤 기숙사 찾아가 차 낸 이불 덮어 줬다. 장보링은 엄한 스승이었다. 잘하면 칭찬하고, 실수하면 엄하게 질책했다. 격려도 잊지 않았다. 1951년 2월 장보링의 장례식에 참석한 타이완성 주석 우궈쩐이 장징궈(蔣經國·장경국)에게 이런 말을 했다. “성장기에 가장 많은 도움을 준 분이다. 지금은 선생 같은 교장이 너무 적다. 나의 유일한 유감이다.”
 
저우언라이와의 첫 만남은 입학식 일주일 후였다. 워낙 일찍 중학생이 되다 보니 저우가 다섯 살 많았다. 학년은 1년 위였다. 하루는 저우 따라 극장에 갔다. 더글라스 페어뱅크스가 달타냥으로 나오는 삼검객(삼총사) 보며 배꼽을 잡았다. 이날을 계기로 저우와 우궈쩐은 붙어 다녔다. 밥 같이 먹고 산책도 함께했다.
 
난카이중학 시절의 우궈쩐(오른쪽)과 저우언라이(왼쪽). [사진 김명호]

난카이중학 시절의 우궈쩐(오른쪽)과 저우언라이(왼쪽). [사진 김명호]

저우언라이는 과외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학생회 회장 하며 잡지도 만들었다. 극단도 조직했다. 보이스카웃 본뜬 동자부(童子部) 결성도 주도했다. 우궈쩐이 부장을 맡았다. 어리다고 반대하는 부원들이 있었다. 저우가 나섰다. “동감한다”며 잔디밭에 나가 회의를 하자고 제의했다. 몇십 분 후 다들 싱글벙글하며 돌아왔다. 저우가 선물한 모자 쓰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무슨 일이건 의견이 일치했다. 남녀 공학이 없던 시절이었다. 연극 할 때마다 여자 주연은 저우언라이 몫이었다. 저우의 연기는 일품이었다. 목소리나 몸놀림이 누가 봐도 여자였다. 우궈쩐은 무대에 어울리지 않았다. 연기력이 빵점에 가까웠다. 가장(假裝)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저우언라이는 달랐다. 우궈쩐의 구술을 소개한다. “난카이중학 시절 내 눈에 비친 저우언라이는 유교 신봉자였다. 장차 공산주의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목숨을 걸어도 좋다며 부인했을 것이다. 사실은 정반대였다. 저우는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친 공산주의자로 변했다. 귀국 후 상하이 거리에서 본 적이 있었다. 수염 기르고 변장한 모습이었지만 내 친구 저우언라이가 분명했다. 저우는 나를 모르는 체했다. 내가 우궈쩐이라고 몇 번 말해도 자기는 저우언라이라는 사람이 아니라며 잡아뗐다. 1938년 우한(武漢)에서 공적으로 만났다. 상하이에서 나를 만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런 일 없었다며 의아한 표정 지었다. 저우언라이에 관한 비밀 문서를 본 적이 있었다. 상하이에서 만났을 때 저우는 비밀조직을 관장하던 테러리스트였다. 두 살짜리 어린애를 포함, 배신자 가족 20명을 암매장한 암살자 혐의로 도망 다니던 중이었다. 나를 보고 얼마나 당황했을지 짐작이 간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중국홍군은 국민당군에 편입됐다.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현상금까지 걸었던 지명수배자 저우언라이를 군사위원회 정치부 부부장에 임명했다. 중장계급도 수여했다. 저우의 비공식 직함은 특구(特區)정부와 8로군 대표였다.
 
같은 해 11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했다. 수도 난징(南京) 공격도 시간문제였다. 충칭을 전시수도로 정한 국민정부는 한동안 우한에 집결했다. 저우언라이는 충칭과 우한을 부지런히 오갔다.
 
상하이에서 모르는 체하던 저우언라이가 우한 시장 우궈쩐을 먼저 찾아갔다. 부재중이자 명함을 놓고 갔다. 귀가한 우궈쩐에게 부인 황쭤췬(黃卓群·황탁군)이 명함을 건넸다. “네 공산당 친구가 다녀갔다.” 우궈쩐이 저우언라이의 사무실로 갔다. 저우의 화려한 연기가 시작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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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