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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사라지는 지구촌···美는 트럼프 이후 '역행'

지난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임신 초기 낙태까지 처벌하는 것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지나치게 침해한다는 등의 이유에섭니다.
 
낙태법 폐지를 주장하는 단체 회원들이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법 '헌법불합치' 판결이 나자 울먹이고 있다. 임현동 기자

낙태법 폐지를 주장하는 단체 회원들이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법 '헌법불합치' 판결이 나자 울먹이고 있다. 임현동 기자

 그렇다고 임신 중절이 전면 허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헌재 결정에 따라 국회는 법률을 개정해 임신중절이 가능한 기간을 정해야 합니다. 입법 단계에서 몇 주차부터의 태아를 독자 생존이 가능한 ‘인간’으로 볼 것인지를 두고 또 한 차례 논란이 일 것으로 보입니다.
 
낙태죄 논란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는 나라가 한국만은 아닙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지난 3월 낙태 관련 기관에 예산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기까지 했습니다. 이번 뉴스 따라잡기에선 지구촌 곳곳에서 진행 중인 낙태를 둘러싼 갈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엄마 나를 죽이지 마세요”
미국의 낙태반대론자들이 낙태 클리닉 앞에서 들고 있는 피켓의 문구입니다. 이들은 여성들이 클리닉을 방문할 때마다 “엄마 나를 죽이지 마세요”라고 소리치며 피 흘리는 태아의 사진을 들이민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출근하는 의료진들을 붙잡으며 “살인을 멈추라”고 설교하기도 한다는데요.
미국 미시시피주의 낙태 반대 운동가들이 낙태 클리닉 앞에서 태아의 모습이 담긴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는 모습. [사진 ABC뉴스]

미국 미시시피주의 낙태 반대 운동가들이 낙태 클리닉 앞에서 태아의 모습이 담긴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는 모습. [사진 ABC뉴스]

 
이 때문에 보수 기독교 성향이 두드러지는 일부 미 남부 주에서는 임신 중절 시술을 하는 의료진들이 쥐구멍 드나들듯 몰래 출근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들에 맞서는 것은 ‘클리닉 에스코트’라고 불리는 자원봉사자들입니다. 이들은 낙태를 앞둔 임신부들이 병원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데요. 주차장에서부터 병원 입구까지 보디가드처럼 옆을 지키며 낙태 반대론자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다고 합니다.  
 
미국 켄터키주의 유일한 낙태 클리닉 앞에 나란히 서서 환자를 기다리는 '클리닉 에스코트'들의 모습. [사진 AP=연합뉴스]

미국 켄터키주의 유일한 낙태 클리닉 앞에 나란히 서서 환자를 기다리는 '클리닉 에스코트'들의 모습. [사진 AP=연합뉴스]

 
낙태를 둘러싼 논쟁은 생명 혹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생각 차이로만 그치는 게 아닙니다. 각각의 입장을 지지하는 정치 세력을 후원하는 선거운동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미국의 정치 전문가들은 “낙태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오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선거 전략”이라고 말합니다. 
 
레이건, 부시, 트럼프 등 역대 공화당 대통령들은 모두 대선 운동 기간 낙태는 살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TV 토론장에서 낙태에 반대하는 법관을 연방대법원에 앉히겠다고 공언하기도 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1960년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분위기의 캘리포니아에서 주지사를 지낼 땐 낙태자유법에 서명했습니다. 하지만 80년대 공화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면서 낙태 반대론자로 돌아섰습니다. 낙태에 대한 정치인들 입장이 선거 유불리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전문가들은 낙태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 공화당의 핵심 지지세력인 데다 가장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공화당으로서는 이들을 무시하는 전략을 택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성서의 무오류를 확신하는 복음주의파는 선거 때마다 공화당 후보에 몰표를 던지며 대선을 좌지우지하는 변수로 주목받습니다.  
 
“임신 중절은 기본권”…세기의 ‘로 대 웨이드’ 판결
미국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낙태 논란은 역사적인 ‘로 대 웨이드’ 판결 지키기 vs 뒤집기 싸움이기도 합니다. 로 대 웨이드는 1973년 미 연방대법원이 최초로 여성의 임신 중절을 헌법적 권리로 인정한 판결입니다. 대법원은 낙태를 처벌하는 것이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과도한 침해라고 봤죠.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 이후 낙태권을 점진적으로 축소하는 양상입니다. 대통령으로서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뒤집을 순 없었지만 중절 클리닉에 지원하는 예산을 깎고, 보수적인 대법관을 임명하는 일은 가능했죠.  
미시시피와 켄터키 등 미국의 7개 주(州)에는 단 1곳의 낙태 클리닉만이 남아있다. [사진 다큐멘터리 '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

미시시피와 켄터키 등 미국의 7개 주(州)에는 단 1곳의 낙태 클리닉만이 남아있다. [사진 다큐멘터리 '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

 
특히 전통적 공화당 우세 지역에선 트럼프 당선 전부터 이같은 보수화가 '중절 클리닉 감소'로 나타났습니다. 2012년 41곳에 달하던 텍사스주(인구 2900만)의 중절 클리닉은 7년 사이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진보 성향의 캘리포니아(인구 4000만)에 150곳이 넘는 중절 클리닉이 있는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죠. 미주리, 켄터키, 미시시피 등 그 외 7개 공화당 우세 주에서도 지난 몇 년 동안 꾸준히 중절 클리닉이 줄어 각각 한 곳만 남아있습니다. 이들 주 대부분이 남한과 비슷하거나 더 큰 면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성들의 병원 접근권이 크게 떨어진 겁니다.
 
또 조지아와 텍사스 등 11개 주에서 초음파로 태아의 심장 박동을 확인할 수 있는 6주 이후부터 낙태를 금지하도록 한 ‘태아심장박동법’을 채택했거나 논의 중인데요. 여성 인권 단체들은 6주 이전에는 여성이 임신 사실을 인지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법이 시행되면 사실상 낙태를 금지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합니다.
 
여러 종류의 낙태 규제법 중 가장 이목을 끈 것은 아칸소 주가 2017년 2월 인정한 ‘생부에 의한 낙태 반대권’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낙태를 하기 위해서는 태아의 생부에게 사전 통보와 합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 법의 골자인데요. 이론적으로는 강간범이라도 태아에 대한 친권을 주장하며 임신 중절에 반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미국자유인권협회는 이 법이 ‘로 대 웨이드’에 배치된다고 주장하며 법원에 집행 금지를 신청한 상태입니다.
 
17만명 원정 낙태…결국 국민투표로 낙태죄 폐지
 
미국과 달리 최근 국민투표를 통해 낙태권을 대폭 확장한 나라도 있습니다. 아일랜드인데요. 지난해 5월 25일 국민투표로 헌법상 임신 12주 이내의 중절 수술은 그 이유에 제한을 두지 않기로 하고 낙태죄를 폐지했습니다.
 
지난해 5월 아일랜드는 국민투표를 통해 낙태죄를 폐지했다. 투표 결과가 나오자 환호하는 시민들의 모습.[EPA=연합뉴스]

지난해 5월 아일랜드는 국민투표를 통해 낙태죄를 폐지했다. 투표 결과가 나오자 환호하는 시민들의 모습.[EPA=연합뉴스]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는 소위 선진국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낙태를 엄격하게 처벌해왔습니다. 낙태죄 피고인에게 최대 14년의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을 정도였죠. 하지만 강한 처벌은 해결책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35년간 17만명의 아일랜드 여성이 국내법을 피해 원정 낙태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낙태죄 폐지 운동이 벌어진 것은 한 여성의 비극적 죽음 때문입니다. 2012년 한 30대 여성이 태아가 생존하기 어렵다는 진단을 받고 낙태 수술을 하려 했지만 병원에서 거부당한 뒤 뒤늦은 수술 끝에 패혈증으로 사망한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 촉발된 여성들의 분노는 결국 역사적인 국민투표로 이어졌습니다.  
 
낙태 시기 놓쳐 제왕절개 출산한 11세 소녀
 
지난 3월 아르헨티나에서는 성폭행당한 11살 소녀가 임신 23주차까지 중절 시술을 받지 못하고 제왕절개로 아이를 출산하는 일이 벌어져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지난 3월 1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국적의 11세 소녀 루시아(가명)는 할머니의 남자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해 임신했다고 합니다. 
 
지난 2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열린 낙태 합법화 시위에 참석한 여성의 모습. 여성의 몸에 있는 초록색 글씨는 '합법적 낙태'라는 뜻이다. [AP=연합뉴스]

지난 2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열린 낙태 합법화 시위에 참석한 여성의 모습. 여성의 몸에 있는 초록색 글씨는 '합법적 낙태'라는 뜻이다. [AP=연합뉴스]

아르헨티나는 성폭행 피해자의 경우 국가의 낙태 허용 결정을 받으면 낙태할 수 있는 '제한 허용' 국가인데요, 루시아는 임신 초기부터 아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지만, 당국은 낙태 허용 명령을 차일피일 미뤘습니다. 할머니의 남자친구가 루시아를 성폭행한 뒤 할머니가 친권을 박탈당하면서 루시아에게 마땅한 법적 보호자가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또 의사들은 양심에 반한다며 낙태를 거부했고 변호인단은 응급 의료 소송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NYT는 전했습니다. 결국 11살 소녀가 제왕절개로 아이를 출산하는 상황까지 이른 겁니다. 

 
여성들은 SNS에 #소녀는 어머니가 아니다 (#Girls, not mothers) 해시태그를 퍼뜨리며 궐기했습니다. 루시아 사건을 계기로 지난해 8월 아르헨티나 상원에서 7표 차이로 부결된 낙태 합법화 법안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지 주목됩니다.
 
선진국에선 이미 의료 서비스의 일부
낙태죄 폐지는 세계적 추세입니다. 1960년대 낙태죄 폐지 운동이 부상하면서 1985년 36개 이상 국가에서 관련법이 바뀌었습니다. 이 나라들은 대부분 낙태를 보건·의료 서비스의 일부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 결과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가운데 31개국은 '사회·경제적' 이유에 따른 낙태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포함한 5개국만 예외였죠.  
 
이번 헌재의 결정으로 한국도 낙태 비범죄화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이제 OECD 국가 중 사회경제적 사유로 인한 중절을 허용하지 않는 곳은 4개국, 즉 뉴질랜드·폴란드·칠레·이스라엘 뿐입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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