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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야만의 시대는 지금도 계속된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학창 시절 때 가슴 아팠던 기억이 있다. 학교에서 성적 부진 학생의 학습 능력을 올리겠다며 공부 잘 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을 짝으로 앉혔다. 공부 못하는 학생이 친구에게 배워 성적이 올라갈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로 움직였다. 어떤 선생님은 내 짝에게 질문을 던지고 제대로 답하지 못하자 자리가 아깝다며 쥐어박았다. 공부 더 잘 하라고 준 자리가 더 많은 매를 맞는 자리가 됐다. 성품 좋은 친구는 맞고서도 괜찮다는 듯 웃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미안함과 무력감으로 한참을 고통스러워했다.
 
당시엔 전교생 성적을 일등부터 꼴찌까지 복도에 붙여놓는 고등학교가 많았다. 기업의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근로자처럼 학생은 숫자였고 성적을 생산하는 노동자였다. 학교와 집 어디에서도 공부 잘 하면 존대를, 못하면 천대를 받았다. 그 땐 나중에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사회적 가치가 다양해질 줄로 생각했다. 우리 자녀 세대엔 이런 야만적 경쟁이 없어질 것이란 희망이 있었다. 그렇게 믿고 우리만 야만시대를 살아내면 되리라 여겼다.
 
영국에서 생활할 때였다. 유명한 그래머스쿨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열 살 때 시험을 봐서 입학하는 이 학교는 옥스브리지에 학생을 가장 많이 보내는 최고의 명문 공립중고등학교다. 그런데 우등상 시상식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과목별로 잘한 학생 한 명씩과 그 부모만을 초대해서 선생님들이 격려한다고 했다. 의아해서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우수한 학업 성적은 성품, 예술, 운동, 창작 등에서 뛰어난 것처럼 많은 좋은 자질 중 하나일 뿐인데 유독 그것만 부각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영국에서의 교육은 숫자를 만드는 공장이 아니라 고귀한 사람과 소중한 공동체의 가치를 담는 그릇이었다.
 
영국에서 고(故) 김근태 의원을 뵐 기회가 있었다. 대통령 경선 직후 방문했을 때였다. 영국에서 가장 감명 깊은 것이 뭐냐는 김 의원의 진지한 물음에 ‘사람’이라고 답했다. 예로 든 사연은 이랬다. “우리 아이가 다니고 있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갓 영국에 와 영어도 서툰 한국 학생을 전교 회장으로 뽑았다. 그 한국 친구가 축구하는 것을 보니 리더십이 충분히 있을뿐더러 회장이 되면 영어를 더 빨리 배울 것으로 초등생들이 생각했다는 것이다.” 김 의원은 충격을 받은 듯 “아니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요” “더욱이 어떻게 초등학생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단 말이에요”라고 되물었다. “그것이 교육을 석차로만 아는 나라와 가치로 아는 나라의 차이이고 국격입니다”라고 답했다. 그 답의 무게 때문인지 그의 약간 기운 고개가 더 기울어진 듯 했다.
 
그런 영국에서 짧지 않은 기간을 보내고 15여 년 전 귀국했다. 예전에 우리 세대가 겪었던 야만의 시대는 이미 끝났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기대는 한국 최고 고등학교 중 하나라는 곳에서 완전히 깨졌다. 미국과 한국 명문대에 학생을 가장 많이 입학시킨다는 화제의 학교였다. 그런데 학교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현관 입구에 붙어 있는 긴 벽보가 눈에 띄었다. 매달 치르는 미국 대입 모의고사에서 일등부터 꼴찌까지 순위, 이름과 성적을 나열한 바로 그 야만의 상징이었다. 온갖 좋다는 이야기는 믿기지 않았고 빨리 발길을 돌리고 싶을 뿐이었다.
 
가장 큰 역설은 학생을 야만시대의 최대 피해자로 살게 하는 사람은 그 부모라는 사실이다. 얼마 전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대사처럼 “자식을 그렇게 만든 건 제(선생)가 아니라 부모”인 것이다. 사실 한국 학교는 부모의 바람을 실현시키고자 애쓰는 대리인이 됐다. 한국 교육의 문제는 단지 입시 제도와 사교육 문제가 아니라 야만시대를 떠나려하지 않는 부모의 문제이며, 그런 부모에게 배태된 문화와 가치관의 문제다. 한국에서 제 1 종교는 대학교라는 우스개가 있듯이 한국에선 어떤 신앙도 이 교육이란 벽을 넘진 못한다.
 
대학 교수들 상당수는 이렇게 ‘공부’를 많이 한 요즘 학생들의 실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서울대에서 30년 넘게 봉직하고 은퇴한 교수는 학생 실력이 재직 기간 동안 줄곧 떨어지기만 했다고 한탄했다. 공부 투입 시간에 비례해 실력이 증가한다면 지금 학생들이 가장 우수해야 할 것이다. 실력이 이전과 비슷하다고 해도 그 엄청난 비용과 노력을 감안하면 실제로 산출은 터무니없이 낮아진 것이다.
 
교육을 보면 그 나라의 미래가 보인다. 교육이 고비용·저효율이라면 미래의 경제도 그럴 것이다. 숫자를 찍어 내는 교육으로는 혁신이 일어날 수 없다.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에겐 행복한 저녁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지금 뿐 아니라 어느 정부도 교육 문제는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선거 캠페인 동안은 모든 문제를 풀겠다고 외치다가 끝나고 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어차피 안 될 것이니 포기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정치적 산술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이대로 우리는 야만의 시대를 계속 살아야만 하나. 누구보다 먼저 부모들이 답해야 할 질문이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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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