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⑲왜 다른 일 않냐 묻자 “탈성매매 해봤지만…”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가슴이 미어집니다. 화환을 준비해 조문하고 싶습니다.’ 
병으로 세상을 떠난 옐로하우스 성매매 여성의 이야기가 보도된 뒤 시민단체인 공익제보자모임에서 e메일을 보내왔다. 정국정 공익제보자모임 대표는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사람이 마지막 가는 길에 꽃 한 송이 없다는 것이 마음 아파 회원들과 조용한 조문을 계획했다”고 말했다. 
 
‘그곳에서는 아프지 마시고 행복하고 편안하시길’(styl****), ‘다음 생엔 좋은 부모 만나서 사랑 듬뿍 받는 예쁜 딸로, 여자로서 사랑받는 한 사람으로 태어나시길 기도합니다’(eyn0****) 같은 명복을 비는 댓글도 많이 올라왔다. 
 
한 중년 여성은 “숨진 여성이 젊을 때 헤어진 딸 같다. 확인해 볼 방법이 없느냐”고 연락하기도 했다. 이 여성은 “과거 아기를 빼앗겼는데 딸이 커서 인천에 갔다는 얘길 들었다”며 “고액의 보험을 든 것도 이상하다”고 말했다. 
 
댓글을 통해 숨진 여성이 든 거액 보험에 관한 의문을 제기한 독자들이 많았다. 취재 결과 이 여성이 든 보험은 2개로 사망 시 나오는 보험금은 2억원가량이다. 옐로하우스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13·2014년 가입해 2015년 여성이 직접 수익자를 업주로 변경한 것으로 기록됐다. 여성의 동료는 “보험에 가입할 즈음에도 몸이 아파 병원에 자주 입원했다”고 말했다. 
 
여성의 시신은 여전히 인천의 한 장례식장에 있다. 법적 연고자들이 있지만 아직 시신 인수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오는 10일까지 연락이 없으면 구청이 위임받아 화장한다. 동료들은 하루빨리 장례를 치러 여성이 이곳을 벗어나길 바란다고 했다. 여성은 생전에 “나가서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이 여성은 결국 죽어서야 이곳에서 나갔다. 
세상을 떠난 여성의 명복을 비는 댓글들. [사진 포털 캡쳐]

세상을 떠난 여성의 명복을 비는 댓글들. [사진 포털 캡쳐]

 
“이 일 좋아서 하는 여성 없어”
 
다른 여성들 역시 ‘바깥세상’을 꿈꾼다. 여성인권 지원상담소 느티나무의 손정아 소장은 “이 일을 계속하고 싶어하는 여성은 없다”며 “다만 대안을 찾고 실행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그 과정이 매우 힘들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바깥세상은 어떤 곳일까. 
여성 E씨(40)는 몇 년 전 이곳을 떠나 식당에서 일을 했다. E씨의 말이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려 ‘탈업(脫業·성매매가 아닌 다른 생계수단을 찾는 것)’을 시도했어요. 업소에서는 어떤 사람이 올까 매일 불안하고 몸도 너무 힘들었으니까요.” 
 
오전 10시~오후 10시 근무에 시급은 5000원 정도였다. E씨는 남보다 더 일찍 출근하고 늦게까지 남아 일을 배웠다. 하지만 옐로하우스에서 생긴 족막근저염과 허리 디스크로 장시간 서서 일하는 것이 녹록지 않았다. 앉아 쉴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집에 오면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몸이 아파 매일 혼자 울었다. 
 
E씨는 “노력을 한다고 하는데 이미 몸이 너무 망가져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며 “한 달 정도 버티다 한계를 느끼고 그만뒀다”고 말했다. 부모님 생활비와 병원비를 대기 위해 성매매를 시작한 그는 다른 길을 가보려 했지만 결국 옐로하우스에 되돌아왔다. “또 제자리걸음이구나.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는데 다시 올 수밖에 없구나. 돌아올 때 심정은….” E씨는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옐로하우스의 상가 건물 잔재 너머로 고층 아파트가 보인다. 김경록 기자

옐로하우스의 상가 건물 잔재 너머로 고층 아파트가 보인다. 김경록 기자

 
“노력한다고 해도 마음처럼 되지 않아”
 
옐로하우스의 한 30대 여성은 전에 있던 유흥업소에서 500만원을 빚지고 이곳에 왔다. 2004년 성매매 특별법 시행으로 업소가 문을 닫자 다른 일을 찾았다. 호프집과 편의점에서 일했지만 2년 정도 지나 옐로하우스로 돌아왔다. 
 
이 여성은 “이곳의 많은 여성이 목·허리 디스크 외에 갑상선 항진증, 혈소판 감소증, 암 같은 지속해서 치료해야 하는 병을 앓고 있다”며 “몸이 안 좋다 보니 조퇴와 결근이 잦아져 수입은 주는데 병원비·생활비로 빚이 늘어 자리를 잡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돌아온 뒤 또 굳게 마음을 먹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이 반복됐다고 했다. 
 
손정아 소장은 “바깥세상에 한 걸음을 디딘다 해도 다른 사회적 경험이 없어 ‘돌아가야 하나’ 이런 마음을 늘 안고 있다”며 “대부분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없고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에 나갔다 되돌아오는 나선형의 변화를 거쳐야 탈성매매와 자활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탈성매매와 자활은 성매매에 따른 낙인과 고립에서 벗어나 사회의 일원으로 주체적 삶을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 손 소장은 “자활 문제를 논의하고 관련 정책을 만들 때 이런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탈업을 해도 자활로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옐로하우스 비가를 읽었다는 한 30대 여성이 보내온 e메일의 일부다. 그는 10년 넘게 성매매를 하다 도망쳐 나와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댓글을 보면 일할 곳 많다지요. 하지만 한곳에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에 다들 두려워해요. 욕심도 있겠지요. 돈을 조금만 더 벌고 다른 일을 해봐야지 하는 생각이요. 다른 일을 하다 다시 흘러들어오는 사람도 많아요. 저 역시 그곳을 벗어났지만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은 물론 없던 병이 생겼어요. 상처가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것 같아요. 늘 과거가 알려질까 두렵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옥 같은 것은 마찬가지죠.” 
[중앙포토]

[중앙포토]

 
회사서 성폭력, 자괴감 심해져 
 
한 여성은 바깥세상에서도 깊은 무력감과 자괴감을 느꼈다고 했다. 
옐로하우스의 또 다른 30대 여성은 과거 여러 유흥업소에서 일했다. 어느 곳에서는 하루 15시간씩 일하고 한 달 150만원 정도를 벌었다. 20대 중반 마지막 있던 곳에서 빚 700만원을 갚고 나와 다른 직업을 구했다. 텔레마케터로 하루 12시간씩 일하며 100만원 정도를 벌었다. 그는 “그래도 남들과 섞여 평범한 일상을 사는 것이 좋았다”고 말했다. 
 
일상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깥세상에는 또 다른 억압이 존재했다. 그는 홈쇼핑 전화 상담원으로 일하며 수시로 욕설과 성희롱에 시달렸다. 부인의 속옷 상의를 살 거라며 “네 사이즈는 몇이냐. 네가 입어보고 맞는지 얘기해줘라” 같은 희롱은 아주 흔하게 일어났다. 텔레마케터를 그만두고 들어간 회사에서는 성추행을 당했다. 
 
“힘들게 나온 사회에서 또 그런 일을 당하니 심한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부당한 일에 소리를 못 내는 것은 성매매 업소나 사회나 마찬가지였어요.” 그래도 참으며 몇 년 동안 회사 생활을 이어갔지만 그 역시 현재 옐로하우스에 있다. 가족이 중병에 걸려 거액의 병원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여성은 “세상 사람들은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겠지만 저에게는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다”면서 “빚 갚을 돈을 벌면 다시 바깥세상에 나가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의 집창촌 속칭 ‘옐로하우스’. 1962년 생겨난 이곳에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업소 철거가 진행되는 가운데 성매매 업소 여성 등 40여명은 갈 곳이 없다며 버티고 있다. 불상사에 대한 우려도 커진다. 벼랑 끝에 선 여성들이 마음속 깊이 담아뒀던 그들만의 얘기를 꺼냈다. ‘옐로하우스 비가(悲歌·elegy)’에서 그 목소리를 들어보고 있다. 
 
최은경 기자 choi.eunkyung@joongang.co.kr 
 
<20회에 계속>
 
관련기사
 
※‘옐로하우스 비가’ 1~18회를 보시려면 아래 배너를 클릭해 주세요. 
클릭이 안 될 시 https://news.joins.com/Issue/11161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다른 기자들의 연재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