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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원두 쓴 좋은 카페 없듯, 비문부터 피해야 멋진 문체

[김영민의 공부란 무엇인가] 논술문의 기본
드디어 결혼식 주례는 되도록 맡지 않기로 결심했다. 무엇보다, 나처럼 일상에 서툰 사람이 후생들을 공적으로 축복하는 자리에 선다는 것은 아무래도 주제넘은 일이다. 그뿐 아니다. 결혼식 주례를 하려면 평소에 잘 입지 않던 양복을 꺼내 입어야 하고, 그런 준비를 하려면 일찍 일어나야 한다. 이는 잠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내 생활철학에 어긋난다.
 

문체는 논술문 호소력 높이는 역할
주·술어 모호하면 완성도 떨어지고
오타 나오면 신뢰도도 함께 바닥

정서적 오지랖 넘치는 표현 금물
기발·화려한 글에 집착해선 안 돼

그래도 주례를 부탁한 이들의 뜻이 고마워서, 잠을 설쳐가며 준비를 마치고 식장으로 가면,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 하객들이 나를 신랑으로 혼동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나는 신랑이 아니라 주례라고 손사래 치는 일, 상당히 피곤하다. 나를 신부로 혼동하는 경우는 아직 없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어 줄 뿐이다.
 
마침내 예식이 마무리되고 나면 또 하나의 역경이 기다리고 있다. 다들 사진 찍기 바빠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주례는 애매하게 내팽개쳐지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 가서 운신하고 있어야 할지 마땅치 않은 나머지, 서둘러 예식장을 빠져나오곤 한다.
 
 
하객 눈높이 맞추기 어려운 주례사 쓰기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이러한 많은 어려움은 주례사 쓰기의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주례사 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일단 식장의 청중들이 너무 다양하여 도대체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알기 어렵다는 데 있다. 나이, 학력, 성별, 출신 지역, 인생관, 교육 배경, 혈압, 혈당, 성질머리 등 어느 한구석도 동질성을 찾기 어려운 사람들이 신랑, 신부를 축하한다는 명분하에 그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이다.
 
신랑, 신부에게 해야 할 덕담이라는 것은 어차피 정해져 있는 것. 그것을 어떤 스타일에, 어떤 문체에 담아 전달할 것인가. 전근대 시기라면 장중한 예식의 문체를 사용할 것이고, 종교 집회당이라면 종교적 언어를 구사할 텐데, 현대 한국의 예식이란 예식장 건물만큼이나 족보 없는 것이어서, 거기에 맞는 문체를 처음부터 발명해야 하는 난제에 마주하게 된다.  
 
잘 해보고자 하는 의욕이 앞설 경우, 매우 장식적이고 화려한 문체나 어투를 구사하려 들게 된다. “인간이 평생 가장 자주 느끼는 결핍감, 그것은 바로 외로움이죠.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신랑, 신부는 지금 예식장에 섰습니다.” 그런 식으로 장중하게 주례사를 읽다 보면, 청중에서 이렇게 항의할지 모른다. “인간이 평생 가장 자주 느끼는 결핍감은 외로움이 아니라 허기죠. 빨리 끝내고 밥 먹읍시다!” 그러면 이제 주례는 할 수 없이 마무리해야 한다. “너 참 이상하구나! 함께 가자, 우리의 위장이여!” “오, 찬란한 메뉴들이여, 우리 다이어트의 방해자들이여! 내 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인즉, 열한 번째 빈 접시가 테이블을 떠날 때까지도 피로연 식사의 끝은 보이지 않으리라!”
 
사실, 문체란 어떠한 말이나 글에서도 나타난다. 문체는 대단히 문학적인 작품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음(音)이 세 번 정도 연속되면 멜로디를 이야기할 수 있듯이, 문장이 일정 정도 연속되면 문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어느 글에서든 나타나기 시작한다.
 
심지어 부부싸움의 언어에도 독특한 문체라는 것이 있다. 어떤 부부는 육두문자를 써가면서 상대를 힐난할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부부는 좀 더 장중한 문체를 구사할 수도 있다. “너로 인해서 내 인생에 어떤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너와 함께한 이후에 난 더 이상 내가 아니야!” 한술 더 떠서 욥기의 한 구절을 인용할 수도 있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
 
부부싸움 언어가 그럴진대 보다 공적인 언명이야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북한의 외교적 성명이 특유한 문체를 가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미국의 늙다리 미치광이를 반드시, 반드시 불로 다스릴 것” 등등. 신화적인 서술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똑같은 단군신화라고 해도 다음과 같이 서술하면 사뭇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게 될 것이다. “웅녀에게 사랑을 느낀 환웅의 눈빛은 이미 천상의 것이 아니었다. 환웅에게 사랑을 느낀 웅녀의 눈빛은 이미 곰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논문이나 논술문에서는 문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항간의 견해는 문제가 있다. 논문 혹은 논술문에도 문체는 있다. 논술문은 비록 논리, 계발적인 성찰, 경험적 증거 등을 통해서 자기 주장을 개진하는 글이지만, 그 글이 궁극적으로 타인의 설득을 목표로 하는 한 호소력의 문제를 도외시할 수는 없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결혼식장 청중보다는 균질한 독자를 상정한다는 것이다.
 
논술문의 1차 목표는 유의하여 비문(非文)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논술문의 기본이라고 할 만한 이러한 사안에서 오류가 반복되면, 논술문 전체에 대해 신뢰가 떨어지게 된다. 부실하게 쌓아 올린 가건물에는 들어가 보고 싶지도 않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나의 문장에서조차 주어-술어 관계가 호응하지 않거나, 주어나 목적어 같은 문장 요소가 이유 없이 불명확하거나 하면, 그 논술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장 자체에 대해 독자는 기대를 접게 된다. 비문을 쓰지 않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물론, 유능한 편집자에게 보여주고 교정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편집자의 도움을 얻기 전에는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할까?
 
일단 유의할 점은, 좋은 문체를 보여준답시고 과한 표현을 남발하지 않는 일이다. 냉정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할 국면에서 정서적 오지랖이 질질 흐르는 표현을 처발라서는 안 된다. 주장의 논리와 명료함이 논술문의 주된 승부처라고 할 때, 그런 표현은 독자가 논지에 집중하는 것을 오히려 방해할 뿐이다. 이를테면, 인간의 소화기관을 설명하는 학자가 배고픔 혹은 허기에 대해 서술할 때, “배고프다” “허기진다”와 같은 간명한 표현이면 족하다. 배고픔이라는 생리 현상을 서술하면서 “인간이 평생 가장 자주 느끼는 결핍감, 그것은 바로 허기”와 같이 멋을 잔뜩 부린 표현을 구사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그저 건조하게 문법에 맞게만 쓰는 게 능사일까. 사실, 화려하지는 않아도 비문과 오타 없이 문법에 맞게만 글을 써 주어도 감지덕지할 일이다. 그것만 갖추어져도 글을 읽다가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있다. 또 하나의 목표는, 가능한 한 해상도가 높은 문장을 쓰는 것이다. 논문에서는, “양자가 조화롭게 섞인다”와 같은 표현보다는 “양립 가능하다”(compatible)와 같은 표현이 대개 해상도가 높다. 표현의 해상도를 알아보는 방법 중에는, 머릿속에서 그 표현을 여러 가지 외국어로 시험 삼아 번역해보는 것도 있다.
 
문법적으로도 문제가 없고, 해상도도 높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 논술문은 이미 충분히 좋은 문체를 가진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커피를 마신다는 것이 단지 카페인을 흡입하는 것 이상의 것이듯이,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에 담긴 주장을 흡입하는 것 이상의 심미적 체험이다. 물론 글의 심미성을 위해서는 일단 기본기가 되어 있는 문장이 필요하다. 카페의 인테리어가 멋지고, 바리스타가 잘생겼다고 해도, 불량 원두를 사용한 커피 맛이 좋을 수는 없듯이.
 
 
유능한 편집자에게 교정 맡기면 도움돼
 
논술문의 심미성을 높인답시고 미쳐나갈 것 같은 기발한 혹은 화려한 표현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욕망이 부재해서가 아니라, 존재하는 욕망을 적절히 통제하고 있는 데서 느껴지는 에너지. 화려한 수사를 구사할 능력이 없어서 간신히 써낸 건조한 문장이 아니라, 충분히 화려한 수사를 구사할 수 있는 데도 논술문이라는 성격 때문에 자제하며 써낸 문장이 발산하는 매력이라는 것이 있다. 미칠 능력이 없어서 그저 건전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이나, 미치는 게 속 편해서 늘 미친 상태에 있는 사람은 다가갈 수 없는, 얼마든지 미칠 수 있는 데도 미치지 않고 생활하는 이의 존재감이라는 것이 있다. 수사학적으로 얼마든지 미쳐나갈 수 있는 이가 애써 담담한 문장을 쓸 때의 포스는, 욕망을 충분히 아는 이의 절제가 빚어내는 고혹적인 분위기와 닮았다.
 
논문이라는 형식이 끝내 자기 생각을 담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예 논문이라는 형식을 떠나기도 한다. 사실 학술적인 논의를 엄격한 논문 속에서만 해야 한다는 영구불변의 철칙 같은 것은 없다. 멋진 문체를 구사한 것으로 유명한 사상사가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은 평생 논문보다는 에세이 쓰기를 선호했다. 그 누구보다 현실의 불가피한 모순과 역동성에 주목했던 벌린에게는 논문이라는 형식은 달갑지 않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는 정년보장을 받기에 급급해 논문을 양산해야 하는 21세기 대학교수가 아니었고, 멋진 문장을 실험할 만한 문예 전통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행운을 누린 사람이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브린모어대학 교수를 지냈다. 영문저서로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2018)가 있으며, 에세이집으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가 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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