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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종파 재가불자회 룸비니에서 미래불교 실마리 보다

백성호 기자 사진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담당차장
 
 
1962년 추석 당일이었다. 경복고 1학년생 조보연은 서울 을지로의 국도극장 앞에 서 있었다. 추석날이 자신의 생일날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만리장성’이란 영화를 볼 참이었다. 그때 한 행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볼을 손으로 꼬집었다. 경복고 교복에 붙어 있는 이름표를 보고서 말했다. “조보연! 공부 잘해라” 그 행인은 학생의 주소를 물었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 한 번쯤 만나”라고 말한 뒤 떠나갔다. 학생 조보연은 그냥 별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한 달 뒤에 조보연의 집으로 엽서가 한 장 날아왔다. ‘법회가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조보연은 ‘법회’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그저 “별난 사람이 이런 걸 보냈네”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엽서 맨 밑에 ‘룸비니 총본부 황산덕 총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법회’보다는 ‘황산덕’이란 이름 석 자가 그의 눈에 확 들어왔다. 당시 황산덕 교수는 ‘민주화의 선봉’이었다. 5ㆍ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동아일보 논설위원이던 황 교수는 ‘국민투표 만능 아니다’란 사설을 써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조보연은 “이 사람이 대표라면 가 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해 10월 중하순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조보연은 종로3가까지 걸어갔다. 단성사 뒤쪽에 대각사가 있었고, 거기서 법회가 열렸다. 경기고 교복을 입은 학생 30여 명과 대학생 서너 명이 있었다. 추석날 그의 뺨을 꼬집은 사람은 룸비니의 창설자였다. 그 사람이 법회에서 강설을 했다. ‘불교’라는 말도 없었고, ‘종교’라는 표현도 없었다. 대신 그의 가슴에 날아와 박힌 메시지가 있었다.  
 
룸비니 초창기인 1962년 대각사에서 법회를 마친 후에 찍은 기념사진. 당시에는 구성원 대부분이 고등학생이었다. [사진 룸비니]

룸비니 초창기인 1962년 대각사에서 법회를 마친 후에 찍은 기념사진. 당시에는 구성원 대부분이 고등학생이었다. [사진 룸비니]

 
“인간의 운명이 무엇에 의해서 좌우되나. 그건 신이나 창조주가 아니다. 나의 마음을 따르는 행동의 과보에 의해서 결정된다. 우리의 마음은 원래 자유롭고 평등한 거다. 거기에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다. 우리가 그걸 몰라서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다. 그걸 알면 자유롭고 행복해진다.”
 
정치적으로 암울하고 혼란한 시대였다. 당시 까까머리 고교생들은 다들 그 혼란 속에 있었다. 조보연은 강설을 들으며 ‘내 삶의 나침반’을 느꼈다. 비단 조보연뿐만 아니었다. 그날 법회에 모인 학생들 상당수가 그랬다. 다들 어딘가에서 낯 모를 행인에게 볼을 잡힌 채, 주소를 대고, 엽서를 받은 뒤 법회를 찾아왔다. 그리고 뜻밖의 강설을 통해 ‘내 삶의 등대’를 직감했다.
 
재가불자 신행 단체 룸비니의 초창기 풍경이다. 룸비니는 1959년 4월 7일에 창설됐다. 비구승과 대처승 간에 분규가 줄을 잇던 시절이었다. 룸비니는 정화불사를 거쳐 출범한 통합종단 조계종(1962년)보다 3년이나 먼저 세워졌다. 이달 7일이면 창립 60주년을 맞는다. 명실공히 국내 불교계 재가불자 단체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재가불자모임 '룸비니' 이사장 조보연 교수가 1일 오후 서울 흑석동 중앙대병원 교수연구실에서 룸비니의 역사와 창립 정신을 설명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재가불자모임 '룸비니' 이사장 조보연 교수가 1일 오후 서울 흑석동 중앙대병원 교수연구실에서 룸비니의 역사와 창립 정신을 설명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60년, 짧지 않은 세월이다. 숱한 종교단체가 한때 이름을 날리다가 내분을 겪고 홍역을 치른 뒤 명멸해 갔다. 그런 점에서 룸비니는 ‘별종’이다. 60년 동안 이렇다 할 잡음이나 내분도 없었다. 당시 경기고ㆍ서울고ㆍ경복고 교복을 입고 법회를 찾던 까까머리 학생들은 이제 각계 저명인사가 돼 있다. 조보연도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중앙대병원 갑상선센터장을 맡고 있다. 지금은 룸비니의 회두(會頭)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저 시니어이자 얼굴마담일 뿐이다. 룸비니가 지금까지 건재한 것은 전적으로 창립자인 법주님의 정신 덕분이다.”  
 
룸비니 회원들은 창립자를 “법주님”이라고 부른다. 굳이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얼굴을 알리지도 않는다. ‘법주님’은 2015년 12월 20일 92세의 나이로 열반했다. 룸비니 회원들은 스승에 대한 평전이나 자서전도 만들지 않았다. ‘법주님’은 생전에 “나는 한 세상 안 (태어)났다고 생각하겠다”며 자신을 내세우는 모든 일을 마다했다. 누군가를 내세워야만 할 때는 학생회장을 대표로 세웠다.  
 
룸비니 법당에서 법도(회원)들이 법회를 보고 있다. 법당의 디자인과 내부 인테리어도 심플하고 깔끔하다. 룸비니의 법회 형식과도 무척 닮았다. [사진 룸비니]

룸비니 법당에서 법도(회원)들이 법회를 보고 있다. 법당의 디자인과 내부 인테리어도 심플하고 깔끔하다. 룸비니의 법회 형식과도 무척 닮았다. [사진 룸비니]

 
자꾸 이름을 물었더니 룸비니 측에서는 성씨만 알려주었다. 법주의 속가 성은 이(李)씨다. 그래서 “이법주님”이라고도 부른다. 이법주는 출가도 하지 않았고, 머리도 깎지 않았다. 1923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생해 평양에서 자랐다. 그의 집은 뜻밖에도 기독교 집안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어릴 적부터 불교에 끌렸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해방이 됐다. 그는 혈혈단신으로 배를 타고 강원도 양양의 죽도암 근처로 월남했다. 그리고 곧장 한암 스님을 찾아갔다. 오대산에서 한참 수행을 하는데 한암 스님이 갑자기 “모두 산을 내려가라”고 말했다. 수행자들은 영문도 모르고 하산했다. 그런데 얼마 후 한국전쟁이 터졌다.  
 
이법주는 부산 범어사로 가 동산 스님 아래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다시 청담 스님의 제자가 됐다. 출가할 생각이었지만 청담 스님은 “너는 머리 깎지 말고 재가불자로 남아서 젊은 학생들을 위해 포교 활동을 하라”고 했다. 이법주는 “한국 불교를 위해서 내 한 목숨 바치겠다. 그런데 지금 불교로는 안 되겠다”며 ‘불교 혁신’을 시도했다.  
 
청담 스님에 이어 룸비니 2대 총정을 맡은 성철 스님은 룸비니를 무척 아꼈다. 룸비니 법도들에게는 3000배를 하지 않아도 만나주곤 했다. [사진 룸비니]

청담 스님에 이어 룸비니 2대 총정을 맡은 성철 스님은 룸비니를 무척 아꼈다. 룸비니 법도들에게는 3000배를 하지 않아도 만나주곤 했다. [사진 룸비니]

1969년 룸비니 창립 10주년 기념식. 단상에는 청담 스님과 김기석 박사가 앉아 있다. [사진 룸비니]

1969년 룸비니 창립 10주년 기념식. 단상에는 청담 스님과 김기석 박사가 앉아 있다. [사진 룸비니]

 
현대 사회에 맞는 새로운 불교를 위해 그는 젊은 청년들을 대상으로 했다. 단체명 룸비니는 인도에서 석가모니 붓다가 태어난 동산의 이름이다. ‘우주의 빛과 힘’이란 뜻이 담겨 있다. 룸비니의 창립 정신은 간결하고 명쾌했다. ‘정신 물질 둘 아니다. 마음 깨쳐 바로 살자.’ 한문 불교경전에 종종 등장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등 난해하게만 들리는 불교 사상을 쉬운 우리말로 또렷하게 표현했다. 룸비니는 ‘종교’나 ‘불교’보다는 붓다의 가르침과 우리의 일상적 삶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다시 말해 불교의 본질에 충실한 모임이었다.  
 
룸비니의 지향점은 ‘깊은 산 속’이나 ‘황홀한 깨달음’이 아니다. 오히려 재가자들이 살아가는 직장과 학교, 가정에 방점을 찍는다. 룸비니는 특정 불교 종파에 소속되지 않는다. 어떤 경전을 특별히 내세우지도 않는다. 각자 자신에게 와 닿는 경전을 펼친다. 참선과 염불, 사경과 독경, 108배 수행에도 모두 열려 있다. 법회 때 보는 의식도 아주 간소하다. 옛날식의 구태의연한 절차는 없다. 60년 전에 꾸렸다고 보기에는 지극히 진보적이고, 굉장히 현대적이다.  
 
서울 단성사 뒤편 대각사에서 법회를 보던 룸비니는 1971년 서울 종로구 운니동 88번지에 '법경'을 짓고서 터전을 옮겼다. 1992년에는 사단법인 룸비니로 등록했다. [사진 룸비니]

서울 단성사 뒤편 대각사에서 법회를 보던 룸비니는 1971년 서울 종로구 운니동 88번지에 '법경'을 짓고서 터전을 옮겼다. 1992년에는 사단법인 룸비니로 등록했다. [사진 룸비니]

 
가령 룸비니는 실천 덕목으로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다 잘 알자’, 둘째는 ‘다 잘 돕자’, 셋째는 ‘다 잘 살자’이다. 차례대로 지혜와 자비, 그리고 해탈을 뜻한다. 쉽고 간결한 우리말이면서도, 붓다가 설한 본질적인 의미를 놓치지 않고 있다. 룸비니 창립자의 안목이 놀라울 따름이다.  
 
한국 불교는 갈수록 신자 수가 줄어들고 있다. 출가자의 수도 급감한다. 불교뿐만 아니다. 타 종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머지 않은 미래에 각 종교는 ‘신자 절벽의 순간’과 마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창립 60주년을 맞는 룸비니의 정신이 각별하게 다가온다. 그 속에 앞으로 60년, 100년을 향한 미래불교의 실마리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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