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이철호 칼럼] 불문가지…소주성 족보까지 따지는가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 출근하면 곧바로 ‘3실장 회의’가 열린다고 한다. 참석자는 노영민 비서실장·정의용 안보실장·김수현 정책실장이다. 요즘 이 회의에 윤종원 경제수석이 고정 멤버처럼 자주 호출되는 모양이다. 남북관계가 시들해지면서 문 대통령의 경제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는 신호다. 올 들어 대통령의 벤처·창업 쪽 발걸음이 잦아진 것도 눈에 띈다. 소득주도 성장(이하 소주성) 대신 혁신성장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긴 것이다. 지난달 22일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을 외면하고 대구에 내려갈 때도 7번째 전국 경제투어이자 로봇산업 육성 보고대회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좋은 변화다.
 

대통령만 모르는 정책 실패
낮은 연비에 부작용만 낳아
왜 얼치기 학설에 집착하나
저주받은 주홍글씨 안 되려면
미련 접고 속히 내려놓아야

그런 문 대통령이 그제 “소주성은 세계적으로 족보 있는 얘기”라며 다시 논란의 불을 지폈다. “최저임금은 죄가 없다”고 주장해온 진보단체 대표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에 아껴뒀던 이야기를 꺼낸 것’이라는 언론보도가 더 눈길을 끌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근본이 없는 사람’은 매우 심한 욕이다. 집에 불이 나도 족보부터 들고나온다. 문 대통령 역시 국내 경제학자들과 해외 석학들이 소주성을 “듣보잡(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것)” “멍청한 이론”으로 깎아내리자 족보까지 입에 올리며 반격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의 자신감 회복은 베네수엘라는 망했지만 최근 스페인·그리스가 선거를 앞두고 최저임금을 각각 22%, 11% 올린 것에 자극받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과는 딴판이다. 두 나라는 지난 10년간 최저임금을 거의 동결했다. 이번에 올린 최저임금 역시 중위소득 대비 60%(국제기구들이 최저임금의 악영향을 가늠하는 임계치)를 밑돈다. 동국대 김낙년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은 이 수치가 이미 74.5%나 된다. 우리보다 낮은데도 스페인·그리스의 실험은 사방에서 얻어터지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높은 실업률 하에서 매우 위험한 정책”이라 비판했고, 월 스트리트 저널은 “정통경제학을 정반대로 거스르는 경제적 도박”이라고 경고했다.
 
소주성의 파탄은 요즘 속된 말로 ‘불문가지(不文可知)’다. ‘누구나 다 아는데 문 대통령만 모른다’는 뜻이다. 소주성은 연비가 나빠도 너무 나쁜 엔진이다. 52조원을 퍼붓고도 만들어낸 일자리가 5000개다. 성장은 커녕 양극화 심화·투자 위축·실업 증가 등 부작용과 미세먼지만 내뿜고 있다. 적어도 하나의 경제 학설이 족보에 오르려면 일류 학술지에 논문들이 게재되고 정설로 인정받은 뒤 교과서 한 귀퉁이에라도 실려야 한다. 무엇보다 그 학설이 제시한 대로 실험 결과가 들어맞아야 하는 게 중요하다. 소주성이 족보를 따지려면 지금쯤 소비와 투자가 늘고 온 사방에 일자리가 널려있어야 하지 않을까.
 
소주성 설계자인 홍장표 수석과 집행자인 장하성 정책실장은 “최저임금 탓에 일자리가 악화됐다는 건 소설” “곧 정책 효과가 나타난다”는 변명만 일삼다 물러났다. 문 대통령도 뜬금없이 “경제가 좋아진다”며 헛다리를 짚기 일쑤였다. 지난 2년간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요즘 여론조사에서 소주성 반대 비율은 70%를 웃돌고 있다. 돌팔이 약장수의 만병통치약처럼 속여온 불만, 실험실 쥐처럼 앉아서 생체실험에 희생되고 있다는 분노가 겹친 것이다. 이제는 실패와 책임을 인정 안 하는 진보정권을 향해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까지 고개를 들고 있다.
 
소주성 앞에는 더 험난한 가시밭길이 놓여 있다. 반도체 침체와 수출 급감 등 온갖 경제지표가 차갑게 얼어붙고 있다. 미국·중국·유럽 등 대외 환경도 어려워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만능의 보검처럼 휘두르는 ‘재정(세금) 투입’도 언제 부메랑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대표적인 게 지난달 28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SOS를 치는 장면이다. 박 시장은 “부동산 거래 감소로 취득세 등 지방세 세입 여건이 굉장히 좋지 않다”며 “대대적인 국비 지원을 특별히 부탁한다”고 호소했다. 서울시의 지방세수가 한계에 도달했다면 다른 지자체는 말할 것도 없다. 올해는 법인세·부가세 등 국세도 1월 수입 진도율이 12.6%로 전년동기 대비 1.1%포인트 낮아 빨간불이 켜졌다. 세수 결손이라도 생기면 ‘세금 퍼주기’에 제동이 걸리고 툭하면 추경 편성과 적자 국채 발행의 악순환이 시작된다.
 
문 대통령은 작년부터 “이제 성과로 말하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빠지는 경제지표들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소주성 실패부터 솔직하게 고백해야 할 것이다. 옛말에 송장 치고 살인 난다고 한다. 죽은 송장을 때리다가 억울하게 살인죄의 누명을 뒤집어쓴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는 주력산업 경쟁력 후퇴와 글로벌 경기 둔화, 생산인구 감소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가라앉고 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소주성에 집착할수록 모든 실패의 책임을 떠안게 되고 그 피해는 궁극적인 희생자인 국민에게 돌아간다. 더는 미련을 접어야 한다. 어쩌면 소주성은 두고두고 한국 진보정권의 지적 바닥과 무능을 상징하는 주홍글씨로 남게 될지 모른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