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약속 하나만 …" 학교 떠나는 어린 제자 손 잡아준 선생님

기자
김명희 사진 김명희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8)
산수유 꽃말은 '영원불멸'이다. 그러나 나에게 산수유 꽃은 약속을 상징한다. [사진 김명희]

산수유 꽃말은 '영원불멸'이다. 그러나 나에게 산수유 꽃은 약속을 상징한다. [사진 김명희]

 
2019년 새해가 시작되는가 싶더니 벌써 3월 막바지다. 미세먼지 속에 올 듯 말 듯 망설이던 봄이 불쑥 당도했다. 곰곰 생각해보니 이번이 내게는 쉰 두 번째 봄이다. 
 
오늘 모임이 있어 시내에 다녀오다 산수유 꽃을 보았다. 남쪽에서는 이미 한 달 전부터 개화소식으로 분주했지만 나는 오늘에서야 봄꽃 사진을 처음 찍었다. 휴대폰 카메라로 꽃 사진을 찍는 순간, 그 꽃 속에서 단발머리 한 여고생이 떠올랐다. 자세히 보니 그 모습은 바로 나였다. 35년 전 그 때도 오늘처럼 여고 교정에서는 산수유가 막 노란 꿈들을 터뜨리고 있었다.
 
산수유 꽃말은 ‘영원불멸’이다. 그러나 나에게 산수유 꽃은 약속을 상징한다. 나는 겉보기와 달리 조금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이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 어디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나면, 행여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한다.
 
‘약속은 깨지기 위한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산다. 어떤 때는 성급히 약속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혼자 애를 먹기도 한다. 그래서 평소에 약속을 가급적 잘 하지 않는다. 이런 내가, 누군가와의 약속을 지켜내기 위해 장장 22년이 걸린 적이 있다.
 
학교 떠나던 날 담임선생님과 약속
1985년 3월 서울 명일동에 있는 성덕여상(현재 성덕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여고생이라는 시절은 단 두 달로 끝났다. 5월에 학교 자퇴서를 내고 교실에서 책가방을 챙겨 교문을 떠나던 마지막 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교실 창문에 제비들처럼 매달린 친구들이 내게 잘 가라고 꼭 다시 만나자며 눈물로 손을 흔들었다. 나도 눈물을 닦으며 정들었던 반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그 당시 담임선생님은 두 달 만에 학교를 떠나는 나를 보며 몹시 마음 아파했다. 선생님이 눈물을 참으며 교문 앞까지 배웅해줬다.
 
나와 담임선생님은 그렇게 교문 앞에 서서 작별인사를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선도부 선배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지각할까봐 책가방 들고 달음박질쳤던 그 교문. 거기서 하루아침에 나는 이별 중이었다. 그때 서른 초반이셨던 젊은 여선생님. 학업을 포기하고 떠나는 17세 어린 제자가 얼마나 걱정되셨을까. 선생님이 봄바람 부는 교문 앞에서 내 손을 잡고 울먹이며 말했다.
 
“…명희야. 선생님이 더 이상 너를 돕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선생님과 약속 하나만 하자.”
“약속이요? 선생님 어떤 약속이요?”
“명희야 너 앞으로 조금 많이 힘들지도 몰라.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열심히 살겠다고 선생님과 약속해 줄래?”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내가 학교를 떠나고 있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이 아닌 냉혹한 나의 현실이었다. 여고입학 두 달 만에 중퇴하며 이 악물고 담임선생님께 대답했다.
 
학교 중퇴 후 가죽점퍼 공장 다니던 시절(좌) 찍은 사진과 과거 여고시절 담임선생님 사진(우). [사진 김명희]

학교 중퇴 후 가죽점퍼 공장 다니던 시절(좌) 찍은 사진과 과거 여고시절 담임선생님 사진(우). [사진 김명희]

 
“선생님, 약속드릴게요. 반드시 이 교문 앞에서 다시 선생님을 찾아뵙겠습니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몰라요. 그러나 꼭 바르게 잘 자란 저를 보여드릴게요.”
 
나는 하루도 지체할 수 없었다. 슬픔과 원망에 코 빠트리고 있을 시간도 감정의 사치였다. 바로 다음날 공장을 찾아다녔고 일자리를 구했다. 최소한의 졸업장도, 한줄 스펙도 없이 열일곱 살 아이가 뛰어든 세상은 가는 곳마다 밑바닥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들은 수많은 역경이 되어 나를 엄습했다. 그 기분은 시베리아 벌판에서 알몸으로 눈폭풍을 맞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덕분에 힘겹게 살아가는 많은 이들을 만났다. 병든 아버지와 함께 셋방을 전전하며 이사도 무수히 다녔다. 모두가 모여 웃고 행복한 추석과 설, 성탄절 대부분을 중환자실이나 응급실이나 병원복도에서 맞이했고 떠나보냈다.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도 참 많았다. ‘그 약속이 대체 뭐기에….’ 그럴 때마다, 17세 때 내가 마지막 교문을 나서며 담임선생님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매번 다시 이를 악물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새나가는 아버지 병원비와 생활비를 해결하기 위해 십여 가지가 넘는 직업을 거쳤다.
 
그렇게 세월은 화살처럼 흘러갔고 나는 그때마다 파김치가 된 몸으로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 약속을 언제쯤 지킬 수 있을까 혼자 되묻곤 했다. 결혼해서 생긴 두 애들 뒷바라지하며, 낮엔 일하고 밤마다 공부해 오래 한 맺힌 고졸 검정고시도 통과했다. 그 속에서 내가 본 힘겹고 슬픈 세상을 틈틈이 시로 썼고, 그것이 2006년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거기에 자신감을 얻은 나는 2007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그때서야 오래전 교문 앞에서 헤어진 담임선생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이제 그분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22년이 흘러있었다.
 
백방으로 선생님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떠났던 그 학교에 선생님은 오래전 전근을 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워낙 오래돼 아는 분이 없었다. 그 당시 인기를 끌었던 ‘TV는 사랑을 싣고’처럼 나도 텔레비전 밖에서 애타게 누군가를 찾아 헤매었다. 물어물어 찾아보니 그 여선생님은 오래전 교직을 떠나 일본에 살고 계셨다. 그래서 더 찾기 힘들었다.
 
선생님은 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다행히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께 그 교문 앞에서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단숨에 일본에서 건너왔다. 십대였던 제자는 마흔이 넘고, 삼십대 초반의 아리땁던 여선생님은 환갑을 넘은 후였다. 선생님은 얼마나 변하셨을까. 나는 저 멀리서 걸어오시는 선생님께 달려갔다.
 
몇 달 전 인사동에서 만난 나와 담임선생님. [사진 김명희]

몇 달 전 인사동에서 만난 나와 담임선생님. [사진 김명희]

 
“선생님, 이제야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 이렇게 잘 컸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시인도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눈시울을 적시며 내게 고맙다고 했다. 그러면서 “명희야, 근데 왜 이렇게 새카맣게 탔니”라고 물었다. 나는 그 당시 노점장사로 여름에는 햇볕에 타고 겨울에는 찬바람에 얼굴이 트고 까칠하고 검게 탄 얼굴이었다. 그런 내가 가여웠는지 내게 아이들 옷이라도 사 주라고 봉투를 쥐어주고 돌아갔다.
 
그 후 다시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몇 달 전 스승과 제자는 인사동에서 또 재회를 했다. 이제 나는 오십을 넘었고 선생님은 곧 칠십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내게 얼굴이 아주 좋아졌다며 기뻐했다. 이번에는 내가 선생님께 적지만 용돈을 드렸다.
 
두번 째 재회 땐 용돈도 드려
“선생님 제자가 글 써서 번 돈이니 맛난 것 한번 사 드세요.” 한사코 거절하는 선생님께 나는 다시 말했다. “선생님, 이 돈은 제가 장사해서 번 돈이 아니고 글을 써서 번 돈입니다. 선생님께 꼭 드리고 싶어요”라고 했더니 선생님께서 젖은 눈으로 웃으시며 받으셨다. 오래 전 단 두 달 만난 사제지간의 인연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 그 분과의 약속 덕분에 발전할 수 있었다. 만약 그날의 약속이 없었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변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어떤 형태로든 지금보다 분명 나빠졌을 것만은 확실하다.
 
약속이란, 때로는 무거운 것이지만 그 무게 때문에 더 아름답고 소중한 것 같다. 우리는 일상에서 가족이나 지인들과 밥 먹듯 많은 약속을 하며 살아간다. 그것들이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의미 있는 노력을 해보았으면 한다. 약속을 지키려 노력하는 동안 내가 성장한다는 사실을 나는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김명희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