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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폭탄의 그늘’ 아래서 미안하고 불안하게 살아야지만…

빠른 삶, 느린 생각 
1968년 유엔 주도하의 ‘핵확산방지조약(NPT)’은 남북이 모두가 서명한 것이었으나, 2003년 북은 이 협약으로부터 정식 탈퇴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핵무기 개발에 대한 북의 태도는 일관되지 않았다. 김정은 위원장의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은 2013년 초 북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의 실험이 재개되었다. 그 당시 필자는, 한 신문 칼럼에서, 은사 송욱 교수의 시를 인용하여, 이때의 위기감을 표현한 일이 있었다. ‘원자탄 그늘처럼/ 미안하고 불안하게 살아왔다’는 것이 그 시구였는데, 그것은 한국전쟁 전후의 각박한 삶의 형편을 말한 것이었지만, 필자는 그것을 인용하여 원자탄 그늘 아래의 삶이 현실이 되었다고 말한 것이었다. 얼마 전부터의 남북의 움직임은 이 그늘이 이제 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였는데,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하노이 회담의 불협화로 하여, 다시 ‘원자탄의 그늘’ 또는 ‘더 짙은 핵폭탄의 그늘’ 아래에서 미안하고 불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하겠다. 2013년 칼럼에서, 필자는 사건 전개의 여러 고비에 상관하지 말고, 사태를 멀리 보면서 대책을 세우는 것이 적절하다는 말을 하였다.
 

각박한 삶은 인간의 실존적 조건
단기적 사고의 좁은 틀 깨트려야
북핵·정치·경제 등 난제 풀려면
승패의 전술 넘어서는 여유 필요

‘선한 독재체제’의 유혹 떨쳐야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핵폭탄 그늘 아래에서 미안하게 불안하게 산다’는 것은, 방금 말한 바와 같이, 전후의 각박한 삶을 말한 것이지만, 사람의 삶의 일반적 조건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의 그늘의 농박(濃薄)이나 사건의 굴곡에 너무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 현명한 삶의 방법이다. 인간 실존의 가장 큰 특징이 ‘불안’이라는 말도 있다. 미안(未安)과 불안(不安), 즉 안정(安定)에 미치지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물론 핵폭탄이라는 특정한 문제가 삶의 일반적 조건과 같은 차원의 문제일 수는 없다. 그러나 특정한 과제라고 하여도 너무 모든 것을 일대일로 대처한다고 문제가 쉽게 풀리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문제 해결의 전략보다는 목적, 그리고 그것이 특히 삶의 근본에 관계되는 문제일 때, 목적과 가치를 잊지 않는 것이다. 날로 발달하는 기술 또는 잔 조종과 전술이, 삶에 존재하는 불편한 요소를 완전히 제거 또는 제어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정치가 조장하는 것이 그러한 조종 그리고 전술이다. 그러나 그것도 조금 더 여유 있는 테두리 속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한다.
 
영국의 BBC 뉴스 인터넷 판은 시청자의 시야를 넓히겠다는 의도로 최근에 ‘미래(Future)’라는 시리즈를 시작하였다. 프로그램에 첫째로 나온 것은 호주의 철학자 로먼 크르즈나릭의 ‘장기적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민주주의를 개수(改修)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에세이였다. 크르즈나릭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가르치기도 하였지만, 그 저서들의 제목, 가령 『공감하는 능력』『인생학교』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중적 호소를 겨냥하는 철학 저술가이다. 그의 정치 철학에서 핵심 개념은 ‘공감(empathy)’이다. 개인적인, 사회적인 차원에서의 공감의 계발이 보다 만족할 만한 민주주의의 실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위에 말한 그의 에세이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민주주의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오늘의 민주주의가 인간 문제를 바르게 해결하는 데에 근본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민주주의 제도는 대체로 근시안적이고 단기적인 관점만을 남게 한다. 민주 제도의 핵심은 선거인데, 사람들의 당장의 관심사에 호소하는 것이 선거에 유리하다. 민주주의 제도의 문제점은 그 ‘단기주의’이다.
 
크르즈나릭의 설명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한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대의민주주의 제도는 적절한 인격을 가진 인물을 선출하는 제도이기에, 그것은 보통 사람의 충동이나 욕망을 극복하고 보다 이성적인 판단이 정치 공간에서 작용할 수 있게 할 수 있는 제도라고 주장했다. 조금 더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대의제가, ‘영혼의 협소성’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선거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정치인들로 하여금 매우 단기적인 호소력을 갖는 정책만을 내걸게 한다. 오늘날에는 수시로 행해지는 여론 조사나 소셜미디어(SNS)의 의견 표현이 그러한 단기성을 더욱 강화한다.
 
크르즈나릭의 관점에서 단기주의의 희생이 되는 장기적인 과제에는 연금제도, 아동 교육, 환경 등의 여러 문제가 있다. 그중에도, 특히 장기적인 고려가 필요한 것은 환경 문제이다. 이것을 뒤로 미루는 것은 다음의 세대, 차세대일 수도 있고 지금으로부터 7세대 이후의 후손까지도 포함할 수도 있는 후세대를 고려하지 않는 일이다. 그리하여 민주주의 제도는 후속 세대에 빚을 안기는 체제가 된다.
 
이 제도를 어떻게 개수할 것인가? 흥미로운 답변의 하나는 크르즈나릭이 인용하고 있는 천체물리학자 마틴 리스의 견해인데, 그에 따르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큰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는 ‘선한 독재체제(benign dictatorship)’가 보다 적절한 정치 체제이다. 그리고 그는 태양광 발전의 개발이나 여러 장기 계획에 있어서 성공적인 사례로서 중국의 경우을 들었다. (나중에 그는 그것이 농담 또는 반농담이었다고 말했다고는 하지만.) 여기에 대하여 크르즈나릭은 태양열 발전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스웨덴과 같은 나라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중국에 비하여 월등하게 앞서 있다고 하면서, 민주주의가 반드시 장기적인 인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여러 대학과 정부 체제의 안과 밖에 보이기 시작한 미래 연구소 등과 같은 제도가 이것을 떠맡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정부 안에 자리하게 될 미래부(未來部)로 귀착할 것이라고 한다.
 
인간 문제의 장기적 해결을 위한 이러한 제안이 참으로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대책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조금 더 부정적인 관점을 취한다면, 제안되는 많은 대책들은, 미래의 비전을 포함한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재의 현실을 충분히 포괄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공기 오염을 줄일 것으로 예상되는 재생에너지의 경우, 가령, 태양광 발전에 필요한 재료도 환경오염을 가져올 폐기물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말해진다. 또는 우리나라의 경우, 포항에 지진이 잦게 된 것은 지열을 이용하고자 하는 시설들로 인한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기술과 법률로만 갈등 풀 수 없어
 
필요한 것은, 정책 하나에 따르는 여러 부수적 효과에 대한 총체적인 고려이다. 하나의 추상적 명제에서 도출되는 정책은 대체로 편향적이고 편협한 것이 되기 쉽다. 위에서 단기주의에 대조하여, 시간의 수직선을 생각하는 장기 관점을 언급했지만, 사고의 수평적인 확장도 필수 의무이다. 모든 명제는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전체적인 테두리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서 이 전체는 구체적인 현실에 의하여 끊임없이 검증되고 재고(再考)되어야 한다. 그런데 전체는 흔히 추상적으로 구성되는 계획, 간단하게는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구성되는 전체이기 쉽다. 요즘 정부 당국자들의 발언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에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역사적 원한을 되살려 오늘의 현실을 재구성하려는 노력도 이와 비슷하다.
 
오늘날 우리의 사고는 사고의 전후 문맥은 물론, 더 나아가 사고의 큰 지평을 의식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말할 것도 없이 정치나 경제 차원에서는, 당면 문제의 해결이라는 관점에서 일에 접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전략과 조종의 관점에서 모든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넓은 사고 지평의 유지를 어렵게 한다. 단기주의는 위에서 말한바 삶의 모든 문제들을 기술과 전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정치 사고에도 해당한다. 위에 말한바 크르즈나릭이 미래의 세계에 대한 전망, 특히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장기주의를 말한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그의 전망까지도 인간 존재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다. 사람이 자연을 완전히 자신의 편의에 맞추어 조종할 수 있는 것인가? 더 나아가 인간이 그 일부가 되는 존재의 신비를 사람이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인가? 고통과 이해와 인간 상호 간의 갈등과 부정의, 병과 죽음,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기술과 법률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의와 정의의 갈등을 보여주는 비극도 인간 세계에서 영영 사라지지는 아니한다.
 
그러나 삶의 어둠과 비극에도 불구하고 인생과 세계가 아름다웠다고 하는 찬미도 듣고, 밝음의 세계를 위한 영웅적 행동도 본다. 사람은 어느 때나 ‘원자탄 그늘처럼/ 미안하고 불안하게’ 산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현대 시인 가운데 가장 괴로운 삶을 살다간 시인의 유명한 시구,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에도 동의할 수밖에 없다.
 
북의 핵문제 그리고 평화로운 관계를 해결과 같은 것이 우리의 초미한 과제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보다 포괄적인 삶의 지평에 대한 의식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접근을 보다 넓은 마음의 지평으로 옮겨 갈 수 있게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남북문제에 있어서, 존중되어야 할 것은 평화라는 목적과 가치이다. 양편에서 이것을 잊지 않도록 노력한다면, 상호 접근도, 승패의 전술을 넘어, 조금 더 여유있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희망해보는 것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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