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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우궈쩐 부른 리쭝런 “나 그만 들볶고 네가 직접 해라”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70> 
부인과 함께 자녀들과 소일하는 우궈쩐. 1948년 봄, 상하이 시장 관저. [사진 김명호]

부인과 함께 자녀들과 소일하는 우궈쩐. 1948년 봄, 상하이 시장 관저. [사진 김명호]

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가 중요하다. 금과옥조 같은 내용도 가볍게 보던 사람이 하면 효과가 없다. 마오쩌둥은 상하이 시장 우궈쩐(吳國楨·오국정)을 유임시키라는 옌후이칭(顔惠慶·안혜경)의 의견에 토를 달지 않았다. 옌후이칭의 경륜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젊은 관원 우궈쩐, 세제개혁 건의서
답 없자 “당신 때문에 나라 꼴 엉망”
리쭝런, 날벼락 대신 재정청장 임명

우한 공산당 토벌 본부 차린 장제스
현지에 밝은 비서 찾다 우궈쩐 발탁

옌후이칭은 1895년 자비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버지니아대학에서 학위를 마친, 중국 최초의 외국 유학생이었다. 귀국 후 영국 성공회가 상하이에 설립한 세인트요한(聖約翰)대학의 가장 젊은 중국인 교수로 부임했다. 청나라 정부는 외국 유학생 상대로 시험을 보게 했다. 1등 한 옌후이칭은 서태후 앞에서 시경과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암송했다.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 서태후는 천하의 기재(奇才)라며 영한사전(英漢辭典) 주간(主幹)직을 맡겼다. “아무 간섭 받지 말고, 네 뜻대로 해라.” 옌후이칭은 6년 만에 영한쌍해표준대사전(英漢雙解標準大辭典)을 완성했다. 중국인 손으로 만든 최초의 대형 영·중사전이었다.
 
청나라 멸망 후에는 외교계에 투신했다. 독일·스웨덴·미국·소련 등 주요 국가의 대사를 역임하며 중요한 국제회의에 빠진 적이 없었다. 합법정부였던 베이징정부 외교부장과 국무총리를 거쳐 총통직도 잠시 수행한 원로 중의 원로였다.
 
옌후이칭은 중공이 발표한 특급전범 명단을 마오쩌둥에게 내밀었다. “명단에 우궈쩐이 들어 있다. 이 사람은 전쟁과 아무 상관이 없다. 대도시 시장 역임하며 실책을 범하지 않았다. 미국 언론도 민주시장이라며 높은 점수를 줬다. 중공은 국익만 강조하다 보니 민심을 얻었다. 우궈쩐 같은 인재를 중용은 못 할 망정, 전범으로 몰아치는 이유가 궁금하다. 중국을 떠나라는 것과 같다.”
 
듣기만 하던 마오쩌둥이 입을 열었다. “형식도 중요하다. 전쟁 막바지가 되다 보니 그냥 만들어 본 거다. 구애받을 필요 없다. 명단에 들어 있는 사람 중 우리 쪽으로 넘어온 사람도 있다. 미국 코쟁이들이 우궈쩐 이름 앞에 민주시장 소리 붙인 거 안다. 민주처럼 애매한 것도 없지만, 민주라는 말은 나도 좋아한다. 우궈쩐은 저우언라이와 어릴 때부터 친구 사이다. 우리가 재주껏 할 테니 안심해라.”
 
소련 대사 시절 경극배우 매이란팡(梅蘭芳·왼쪽 첫째) 환영 만찬에 참석한 옌후이칭(오른쪽 둘째). 1935년 2월 23일 모스크바. [사진 김명호]

소련 대사 시절 경극배우 매이란팡(梅蘭芳·왼쪽 첫째) 환영 만찬에 참석한 옌후이칭(오른쪽 둘째). 1935년 2월 23일 모스크바. [사진 김명호]

저우언라이가 상하이 지하당 책임자에게 전문을 보냈다. 우궈쩐을 만난 저우언라이의 밀사는 반공교육만 받고 돌아왔다. 2개월 후인 1949년 4월, 우궈쩐은 장제스와 함께 타이완으로 떠났다. 저우언라이는 예상대로라며 입맛을 다셨다.
 
얘기는 21년 전으로 돌아간다. 1928년 2월, 후베이(湖北)성에 근무하는 청년이 성 군정장관 리쭝런(李宗仁·이종인)에게 건의 서신을 보냈다. 재정수입 증가를 위한 세제개혁을 건의했다. 반응이 없었다. 다시 편지를 보냈다. “한 지역의 군사와 행정을 책임진 사람이 젊은 관원의 건의에 답변이 없다, 오만함이 극에 달했다”며 질책하는 내용이었다. 바다에 돌 던지기였다.
 
우궈쩐은 세 번째 편지를 보냈다. “당신 같은 사람이 고위직에 있다 보니 나라 꼴이 엉망이다.” 리쭝런은 별놈 다 보겠다며 건의서를 꼼꼼히 읽었다. 청년에 관한 자료를 상세히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코넬대학과 프린스턴대학에서 경제와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우궈쩐이라는 젊은이였다. 직접 만나겠다며 청년을 불렀다. 리쭝런은 국민당 광시(廣西)파의 거두다웠다. 집무실에 불려온 우궈쩐을 보자 싱글벙글했다. 날벼락 떨어질 줄 알았던 우궈쩐이 당황할 정도였다. 리쭝런이 큼지막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성 정부 재정청장 임명장이었다. “이게 내 답장이다. 나 그만 들볶고 네가 직접 해라.”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놈의 성질 좀 죽여라.”
 
우궈쩐은 자리에 붙어 있는 법이 없었다. 후베이성을 샅샅이 훑었다. 1년 만에 세수가 네 배로 불어났다. 사치품과 고급담배, 술, 화장품 등에 중과세했다. 틈만 나면 거리에 나갔다. 상인들 격려하고, 끼니도 시장 바닥에서 해결했다.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이 동북 3성을 점령했다. 국제연맹이 조사단을 파견했다. 단장 리튼은 인도총독을 역임한, 까다로운 영국신사였다. 동북을 한 바퀴 돌고 우한(武漢)을 경유했다. 장제스는 리튼조사단에 신경을 썼다. 성 주석에게 신신당부했다. “의전에 만전을 기해라. 실수해도 내색 안 하고 뒤로 흉보는 사람들이다.”
 
후베이성 주석은 영어에 정통하고, 불어와 독일어도 능통한 우궈쩐에게 중책을 맡겼다. 리튼은 중국을 떠나면서 한마디 했다. “우한 체류기간이 가장 행복했다.” 리튼이 떠나자 장제스가 우한에 공산당 토벌 지휘부를 차렸다. 현지사정에 익숙한 비서를 물색했다. 우궈쩐 외에는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우궈쩐과 장제스의 인연이 시작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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