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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 이긴 마오 “상하이 시장 유임” 요청에 고개 끄덕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69>
옌후이칭(오른쪽 둘째)이 인솔한 상하이 인민대표단을 맞이한 중공 군사위원회 부주석 저우언라이(가운데)와 비서장 양상쿤(맨 왼쪽). 1949년 2월 22일, 중공 중앙 소재지 시바이풔. [사진 김명호]

옌후이칭(오른쪽 둘째)이 인솔한 상하이 인민대표단을 맞이한 중공 군사위원회 부주석 저우언라이(가운데)와 비서장 양상쿤(맨 왼쪽). 1949년 2월 22일, 중공 중앙 소재지 시바이풔. [사진 김명호]

1945년 8월, 8년에 걸친 중국의 항일전쟁이 끝났다. 외부의 적이 물러나자 지들끼리 치고받았다. 국·공내전이 벌어졌다. 평화가 온 줄 착각했던 중국인들은 전쟁이라면 넌덜머리가 났다. 원로 작가의 일기에서 이런 구절 본적이 있다. “두 눈과 코, 양쪽 귀가 얄팍한 이성과 따로 논 지 오래다. 거리에 시신이 널려 있어도 예사롭게 지나치곤 한다. 꽃향기보다 화약냄새가 더 익숙해졌다. 나는 바스락 소리에 움찔하는 들고양이만도 못하다. 총성이 울려도 놀라지 않는다. 이래도 사람 축에 드는지 모르겠다. 모였다 하면 평화를 논한다. 당장 평화가 온다 치자. 다들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는 자신 없다. 인간은 전쟁동물인가 보다.”
 
1948년 겨울, 중공은 승리를 확신했다. 12월 24일 성탄절 전야, 국민정부 화중(華中)지구 사령관이 총통 장제스(蔣介石·장개석)에게 전문을 보냈다. 민심을 강조하며 하야를 촉구했다. “민심은 군심이다. 민심이 우리를 떠났다. 군사행동 중지와 평화협상을 갈망한다. 중공은 총통과의 협상을 바라지 않는다. 국가에 불충하고, 민족에 불효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것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영단을 간청한다.” 그날 밤 장제스는 “이해가 가기 전까지 심사숙고하겠다”는 일기를 남겼다. 국민정부 안에 중공 비밀당원들이 널려 있을 때였다. 중공 중앙 소재지 시바이풔(西柏坡)의 무전실은 암호해독으로 분주했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도 장제스에게 보낼 성탄절 선물을 준비했다. 국민당 주요인물 명단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추리고 추린 44명의 이름을 살피던 중, 한곳에 눈길이 멈췄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황급히 붓을 들었다. 위유런(于右任·우우임) 석 자를 삭제했다. 옆에 있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에게 한마디 했다. “감히 위유런 선생을 거론하다니. 특급전범 43명의 명단이다. 발표해라.”
 
장제스는 하야 준비를 서둘렀다. 측근들을 최전선에 배치했다. 타이완(臺灣)성 주석도 측근 중의 측근으로 교체하고, 장남 장징궈(蔣經國·장경국)를 국민당 타이완성 주임위원으로 임명했다.
 
31일 오전, 부총통 리쭝런(李宗仁·이종인)과 마주했다. “의논할 일이 있다. 하야를 결심했다. 시간을 끌기 위해 스스로 내린 결정이다. 총통업무를 이양하고 국민당 총재직에 충실하겠다. 총통대리 자격으로 중공과 평화협상을 진행하되 실무는 행정원이 주재하도록 해라. 발표는 당분간 보류해라.” 리쭝런은 입도 뻥긋 못했다. 의견을 냈다가는 말대답질 한다고 찻잔이라도 집어 던질 기세였다.
 
그날 밤 장제스는 당과 정부요원 40여명을 관저로 불렀다. 참석자 대부분이 용퇴를 건의했다. 장제스가 수용하자 구정강(谷正綱·곡정강)이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방성대곡했다. 장제스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반공주의자의 통곡을 뒤로했다. 이 와중에도 새해는 어김없이 인간세상을 찾아왔다.
 
항일전쟁 승리 기념식에서 건배하는 장제스(맨 오른쪽) 총통과 마오쩌둥. 1945년 9월, 충칭. 뒷날 마오쩌둥은 우궈쩐(오른쪽 둘째)을 상하이 시장에 유임시키려고 했다. [사진 김명호]

항일전쟁 승리 기념식에서 건배하는 장제스(맨 오른쪽) 총통과 마오쩌둥. 1945년 9월, 충칭. 뒷날 마오쩌둥은 우궈쩐(오른쪽 둘째)을 상하이 시장에 유임시키려고 했다. [사진 김명호]

양자강 도하 준비를 마친 마오쩌둥은 평화 공세를 폈다. 1949년 1월 14일, 시국성명을 발표했다. “전쟁의 신속한 종결, 진정한 평화의 실현, 인민의 고통 감소를 위해 남방의 국민정부와 협상할 용의가 있다”며 8개 안건을 제시했다. 전범 처리를 필두로 헌법폐지, 반동군대 개편, 관료자본 몰수, 토지개혁, 매국조약 폐지 등 단호한 내용이었다.
 
수도 난징이 들썩거렸다. 민주세력들이 총통 장제스를 압박했다. “중공이 제의한 평화협상안을 수용해라. 거부할 이유가 없다.” 장제스는 인퇴(引退)를 선언하고 난징을 떠났다.
 
총통대리 리쭝런은 담판을 통해 중공의 도강(渡江)작전을 저지할 심산이었다. 중공 고위층과 친분이 있거나, 장제스의 정책에 반대로 일관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상하이로 갔다. 장제스가 제안한 입법원장직을 거절했던 옌후이칭(顔惠慶·안혜경)에게 중공과 다리를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옌후이칭은 상하이인민대표단을 이끌고 중공 중앙 소재지를 방문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환대를 받았다. 리쭝런의 평화담판 요구도 거부하지 않았다. 저우언라이가 마오에게 다가갔다. “옌후이칭이 단독으로 만나고 싶어한다.”
 
마오쩌둥을 만난 옌후이칭은 엉뚱한 말을 했다. “이미 끝난 전쟁, 빨리 끝내라. 평화회담은 부질없는 짓이다. 승리자 자격 누리려면 아군 적군 가리지 말고 기용해라. 상하이 시장 우궈쩐(吳國楨·오국정)은 큰 재목이다. 중국을 떠나지 못하게 해라.” 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4년 전 충칭에서 만난 적이 있다. 상하이 시장을 계속하라고 권하겠다.” 배석해 있던 저우언라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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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