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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과 사랑에 빠진 힐러 "난 항상…너를 생각한다"

기자
송동섭 사진 송동섭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16)
쇼팽(1810~1849)이 도착했을 때 파리는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문예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웠고 개방적이어서 다양한 예술가들과 그들의 새로운 시도를 받아들이는 곳이었다.
 
쇼팽은 파리에 오자마자 많은 음악가를 만났다. 그중 한 그룹의 젊은 음악가들과의 만남은 흥미롭다. 우연히도 그들 젊고 유능한 음악가들은 비슷한 시기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문학에서 시작된 낭만주의 물결이 음악으로 전파되었다. 그것에 영향받은 그들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자기 방식대로 표현하려 하였다.
 
리스트(Franz Liszt)의 29세때 모습. 앙리 리만(Henri Lehmann) 그림(1839)이다. 파리 카르나발레 미술관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리스트(Franz Liszt)의 29세때 모습. 앙리 리만(Henri Lehmann) 그림(1839)이다. 파리 카르나발레 미술관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리스트는 특히 쇼팽, 힐러, 멘델스존, 베를리오즈 그리고 자신을 묶어 ‘낭만파 형제들(Romantic Brotherhood)’이라고 불렀다. 그들 외에도 자주 어울린 다른 음악가들도 많았을 텐데 리스트의 머릿속에는 작곡가가 우선이었던 것 같다. 젊은 그들은 쉽게 의기투합했다. 그들은 자주 만나서 식사하고, 곡을 연주하며 시간을 보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음악의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자부심도 나눠 가졌다.
 
그들은 낭만주의라는 간판 아래 공통의 쉼터를 발견했고 동지애를 느꼈다. 이들의 활동은 음악계에 관심을 끌었고 추종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리스트는 쇼팽이 독창적인 작품으로 새로운 음악의 조류를 이끌었다고 했다. 이 그룹의 사람들은 모두 쇼팽의 음악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들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겠다.
 
페르디난트 힐러. 낭만파 형제 중에서 쇼팽이 가장 친하게 생각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페르디난트 힐러. 낭만파 형제 중에서 쇼팽이 가장 친하게 생각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페르디난트 힐러(Ferdinand Hiller, 1811~1885)는 부유한 독일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쇼팽이 파리에 도착하기 몇 년 전부터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하면서 한 음악학교의 교사로 있었다. 그는 사람을 두루 사귀는 재주가 있어서 음악계에 발이 넓었다.
 
베토벤의 친구였던 당시 이름있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훔멜 (Johann Nepomuk Hummel)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스승의 영향인지 베토벤을 무척 존경하였다. 그는 훔멜과 함께 베토벤의 임종을 지켜보았고 그때 베토벤의 머리카락 한 줌을 잘라 보관할 수 있었다.
 
그 머리카락은 1994년 소더비 경매를 거쳐 지금은 미국 산 호세 대학교의 베토벤 센터에 소장되어 있다. 힐러는 쇼팽의 곡과 연주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베토벤 다음가는 훌륭한 사람으로 여겼다. 쇼팽은 그를 ‘낭만파 형제들’ 중에서 가장 마음이 잘 맞는 친구로 생각했다. 힐러의 말에 의하면 둘은 ‘사랑에 빠져’있었다. 훗날 쇼팽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쇼팽에게 보낸 그의 편지는 ‘난 항상 너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로 생각한다’하고 끝맺었다.
 
독일로 돌아간 그는 여러 분야의 곡을 작곡하였고 그곳에서 지휘자와 음악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그의 교향곡은 베토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쇼팽은 작품번호 15의 녹턴 3곡을 그에게 헌정하였다. 3곡 모두 좋지만 그중 2번째 곡은 특히 부드러우면서 우아하고 짙은 우수가 배어있다.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1847)은 1831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 중순까지 파리에 체류했는데 그동안 특히 쇼팽, 힐러와 자주 어울렸다.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멘델스존은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소문났었고 이미 좋은 작품을 여럿 작곡하여 음악계에 이름이 높았다.
 
쇼팽은 바르샤바 음악원 시절 독일을 방문했을 때 그의 연주회에 참석했었다. 그러나 그는 숫기가 없어 비슷한 또래의 멘델스존과 인사 나눌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멘델스존은 달랐다. 쇼팽이 빈에서 파리로 오는 길에 뮌헨에서 연주한 적이 있었는데 연주를 끝낸 쇼팽을 멘델스존이 찾아와서 둘은 만난 적이 있다.
 
1834년, 쇼팽과 힐러는 독일을 방문하여 멘델스존과 함께 라인 강을 따라 그곳 지방 음악 축제를 즐겼다. 멘델스존은 그때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쇼팽을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하며 그와 함께 한 감격을 얘기했다. 그에게는 누나 파니(Fanny)가 있었는데 그녀는 동생 펠릭스보다 더 재능이 있었다고 얘기되기도 했다. 피아노 소품과 가곡 위주로 많은 작품을 남겼고 그녀의 작품은 동생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멘델스존은 뇌졸중으로 38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할아버지, 양부모 그리고 누나 파니까지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쇼팽보다 삶이 짧았던 그의 음악은 밝고 맑다. 이 점은 쇼팽의 음악이 폴란드인 특유의 슬픔을 담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그의 곡 중 교향곡 4번 이탈리아와 바이올린 협주곡 e 단조가 그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펠릭스 멘델스존. 에두아르트 마그너스(Eduard Magnus) 그림(1833). Berlin State Library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펠릭스 멘델스존. 에두아르트 마그너스(Eduard Magnus) 그림(1833). Berlin State Library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나이는 이들보다 조금 많았지만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도 같이 어울렸다. 그는 집안의 반대로 늦게 음악에 뛰어들어 힘들게 음악 공부를 하고 있었다. 4번의 도전 끝에 프랑스 정부의 장학생에 뽑혔고 장학금으로 로마 유학을 다녀왔다.
 
그는 쇼팽이 파리에 도착하고 얼마 후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었다. 리스트는 열정적인 베를리오즈를 그가 로마로 유학 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고 쇼팽은 리스트를 통해 그를 소개받았다.
 
셰익스피어 전문 여배우 해리에트 스미드슨(Harriet Smithson)을 짝사랑하여 그녀를 쫓아다녔지만 무명에다 가난한 그에게 유명한 여배우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실망한 베를리오즈는 어느 날 실신하듯 쓰러져 혼수상태와 같은 잠에 빠졌다. 한참 만에 깨어나서 그가 꿈속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작곡한 것이 낭만주의 교향곡의 최고 화제작이라 할 수 있는 ‘환상교향곡’이다.
 
그는 이 교향곡으로 이름을 알렸는데 그의 혁신적인 관현악법에 대한 찬사도 있었고 다듬어지지 않은 형식과 지나침에 대한 비난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새로운 시도는 리스트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둘은 특히 친하게 지냈다.
 
엑터 베를리오즈. 샤를 보니에(Charles Baugniet) 석판화(1851). [사진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엑터 베를리오즈. 샤를 보니에(Charles Baugniet) 석판화(1851). [사진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베를리오즈는 시적이고, 정교함과 우아함이 공존하는 쇼팽의 곡을 매우 높이 평가했고 주위에도 쇼팽과 친구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그는 쇼팽이 피아노 건반을 친다기보다 그저 스치듯 지나갔다고 했다. 과시적인 그의 음악에 대해 쇼팽은 너무 나갔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음악적 성향은 달랐다. 어릴 때 음악을 배우지 못한 그는 음악가의 필수인 피아노를 잘 치지 못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대체로 쇼팽이 그를 좋아한 것보다 그가 쇼팽을 더 좋아했다.
 
낭만파 형제 중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는 긴 머리에 각지고 늘씬한 몸매 그리고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매너로 대중적 인기를 가진 피아니스트였는데 10대 초반부터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시원시원한 성격에 리더십도 있어서 그 모임에 중심적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넘치는 열정, 꺼지지 않는 에너지,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자세 등의 면에서 쇼팽과 아주 달랐다.
 
리스트는 쇼팽의 파리 시절 초기 그가 정착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1840년을 넘어갈 무렵부터 위의 누구보다 더한 절대적인 대중적 인기를 누렸고 음악계에 영향력도 큰 사람이었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쇼팽과 그는 수없이 동시에 언급되며 비교되었고, 서로에게 있어서 음악적으로나 삶의 측면에서 중요한 관계였다. 리스트에 대해서는 뒤에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쇼팽의 파리 시절 친구들에 대한 소개와 관련된 일화가 계속 이어진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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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