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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연애소설> "나와 결혼하면 넌 지쳐버리고 말거야"

기자
심상복 사진 심상복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26회

누나는 내일이면 양평으로 이사 간다고 연락이 왔다. 두 시간 뒤면 이삿짐을 다 쌀 거 같다며 저녁 같이 먹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천이와 글공부를 한 작년 넉 달은 참으로 이기적인 시간이었어."
술 석 잔을 거푸 마신 뒤 누나는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기적이었다고?"
"내가 나를 위해 교묘히 만든 시간이었으니까. 그 희생양이 천이였고."
"희생양? 그건 또 무슨 말인지……."
 
나를 희생양 삼았다는 누나
"난 아버지로부터 생긴 트라우마 속에서 늘 괴로워했어.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글공부 말이야. 그렇게 인자하던 아버지가 이상하게, 난폭하게 변해가는 걸 보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어."
"........."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서도 그 두려움과 증오에서 헤어나지 못했어. 어떤 때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수시로 그 상처가 도지곤 했어. 그러면 가슴이 울렁거리고 답답하고 화가 막 치밀기도 했어. 그런 기억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악몽의 늪에서 허우적거렸어. 그러다 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짱해 지고……."
그동안 나와 같이 있을 때도 그런 증세가 나타나곤 했다. 그럴 때면 난 아무것도 모른 척했다.
 
"모든 병이 그렇잖아. 증세가 좀 좋아지다가도 악화하기도하고…. 늘 그런 식이었어. 나도 자신을 종잡을 수 없었을 때가 많았어. 그러던 중 천이를 만났지. 네가 나를 여신이라고 칭송하면서 다가왔을 때 나는 나쁜 생각을 했어. 희생양으로 삼기에 좋은 상대라고. 그래서 글공부를 제안했고, 너는 그걸 왜 마다하겠느냐며 넙죽 받았지."
나는 누나가 불쌍해 눈물이 절로 나왔다.
 
"나는 너에게 글공부를 시키면서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를 풀기로 작정을 했어. 글 못 쓴다고 막말을 하고 원고를 박박 찢어버리기도 했지. 물론 내가 아버지에게 받은 건 그 이상이었지만 그 정도만 풀어내도 어느 정도 정화되는 느낌이었어. 너무도 착한 천이는 또라이 누나에게 꽂혀 심한 욕설과 모욕도 다 받아냈지."
 
사실 창피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누나에게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은 적도 있다. 그때 누나는 이런 말을 했다.
"너는 우리 아버지에게 걸리지 않아 다행인 줄 알아. 난 종아리에서 피가 철철 나도록 맞았거든."
 
누나는 나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이 회복되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불쌍하게 보이기 시작했어. 요양원을 다시 찾은 것도 그즈음이고. 그래서 아버지가 천이를 그렇게 이쁘게 봤던 걸까. 천이랑 결혼했으면 좋겠다고까지 했으니까."
 
누나는 그 모든 게 너무 고마워 나와 몇 번 밤을 보냈다고 했다.
"날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가 상처받이를 해줘서?"
 
이제 내 역할은 끝났다는 거예요?
"진정해. 난 사실 그게 그것과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해. 나의 상처를 치유해 준 사람이니 얼마나 고맙겠니? 기특하기도 하고. 그런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랑 얼마나 다를까. 여자가 같이 자고 싶다고 할 땐 넓게 보면 다 같은 이유라고 생각해. 남자는 싫어하는 여자와도 섹스한다고 하지만 여자는 달라. 상대를 99% 이해했을 때, 다시 말해 자신을 아껴주는 마음이 손으로도 만져질 때 같이 자고 싶은 거라구."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아니라는 거잖아요? 이젠 내 역할이 끝났으니 그만 가 보라는 거잖아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너는? 우리가 결혼하면 네가 힘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야. 물론 처음 얼마 동안은 아니겠지. 하지만 몇 달 살고 헤어지는 게 아니라면 그 무게가 점점 무거워져 결국엔 지쳐버리고 말 거야. 너무도 고맙고 착한 천이에게 그런 벌을 줄 수는 없어."
 
"그건 누나가 앞으로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달린 거 아니에요? 천이가 졸라서 결혼하면 그를 힘들게 하고 말 거야, 라고 작정이라도 한 건가요?"
 
"내 성격, 내 성정이 그렇다는 거야.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건 의지나 작심의 문제가 아닐 거야."
"참 어려운 여자네요, 누나. 진작 알았지만 나아지거나 달라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건가요?"
"그리고 어머니께 내 얘기 다 했다고 했는데, 그리 반기지는 않았을 거야. 돌싱에, 나이에, 성격에……."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순 없었다.
 
"그런데 결혼은 나와 하는 거지, 엄마랑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 말은 이론적으론 맞지만 현실은 달라. 잘 알면서 왜 그래? 우리 사회의 결혼은 당사자와 가족이 대략 반반 정도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가족 의향을 무시한 결혼이 여러 가지 문제를 낳는 거 많이 봤을 거 아닌가. 무엇보다 천이 가족은 엄마와 단둘이고."
 
나는 그즈음에서 모든 걸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끔 양평으로 놀러 오는 건 말릴 순 없지만, 나 때문에 계속 결혼도 안 하고 있다면 난 너무 부담스러울 거야. 그러니 천이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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