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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에 울려퍼진 노래 한 곡에 총을 내려 놓고 항복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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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 시기 북아프리카 전선 영국군 행렬 [중앙포토]

2차세계대전 시기 북아프리카 전선 영국군 행렬 [중앙포토]

 
제2차 대전 당시인 1942년 말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있었던 일이다. 땅거미가 지고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가 되자 독일군 진지에서 한 곡의 애틋한 노래가 확성기를 통해 영국군 진지를 향해 흘러나왔다.
 
가로등이 환하게 밝혀진 병영의 정문 앞에, 여전히 그녀는 서 있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네. 예전에 릴리 마를린이 그랬듯이. 예전에 릴리 마를린이 그랬듯이.
 
1915년 제1차 대전 당시에 독일의 시인 한스 라입이 전선으로 떠날 때 애인을 그리며 썼던 시에 1937년 노베르트 슐츠가 곡을 붙여 만든 ‘릴리 마를린(Lili Marleen)’이다. 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 중 애인을 그리는 노래다. 처음 레코드를 녹음한 랄레 안데르센이 반나치였던 데다 반전사상을 담고 있어 독일은 이 노래의 확산을 꺼렸지만, 워낙 일선 병사들에게 인기가 많아 통제할 수 없었다.
 

2차세계대전 시기 북아프리카 전선 독일군 포로 [중앙포토]

2차세계대전 시기 북아프리카 전선 독일군 포로 [중앙포토]

 
라디오에서 매일 고정된 시간에 노래가 반복 방송될 정도까지 되면서 연합군 병사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영국군은 행진 중에 군가처럼 불렀고 자유프랑스군은 국민 가수인 에디트 피아프가 부른 프랑스어 버전을 즐겨 들었다. 그 때문에 처음 소개한 사례처럼 독일군은 인기가 많은 노래를 연합군 병사들이 향수병에 걸려 전의를 상실하도록 만드는 선무공작의 도구로 애용했다.
 
하지만 독일 병사들도 노래를 들으면 우수에 젖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노래를 틀면 틀수록 독일군의 사기도 함께 저하되었다. 1944년 프랑스 전선에서 미군 병사가 마침 가지고 있던 트럼펫으로 이 노래를 연주하자 독일 병사가 눈물을 흘리며 항복했다는 유명한 일화까지 존재할 정도다. 전선에서 이 노래가 들리면 전투가 잠시 중지되거나 릴리 마를린 부르기 경쟁이 흔하게 벌어졌다는 이야기까지 전한다.
 

독일인이었지만 나치를 반대하여 미국에 정착한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전쟁 중 전선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봉사 활동을 벌였다. 그녀가 부른 릴리 마를린은 미군에게 최고의 인기곡이었다. [사진 wikipedia]

독일인이었지만 나치를 반대하여 미국에 정착한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전쟁 중 전선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봉사 활동을 벌였다. 그녀가 부른 릴리 마를린은 미군에게 최고의 인기곡이었다. [사진 wikipedia]

 
미군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특히 제압을 벌이기 전에 이 노래를 크게 틀어 독일군의 항복을 유도하고는 했다. 미군이 선무용으로 사용한 음원은 인기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Marlene Dietrich)’가 부른 것이었다. 그런데 디트리히는 베를린에서 태어난 독일 사람이었다. 결론적으로 독일 여인이 앞장서서 독일군의 사기를 떨어뜨린 것이었다. 디트리히가 이런 모습을 보인 이유는 확고한 반나치 신념 때문이었다.
 
그녀는 1930년 출연한 ‘푸른 천사’를 통해 유럽 진출을 노리던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았고 이후 미국에서 몇 편의 영화를 찍어 세계적인 배우가 되었다. 유명세가 커지자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가 그녀에게 체제 선전 영화에 출연할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해외에서 활동하는 동안 나치의 폭압적인 통치 행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았기에 그녀는 제안을 거부하고 미국에 망명했다.
 

노래를 기려서 가로등 아래에 동상을 만들었을 정도로 릴리 마를린은 독일에서 상당히 인기가 많은 곡이다. [사진 wikipedia]

노래를 기려서 가로등 아래에 동상을 만들었을 정도로 릴리 마를린은 독일에서 상당히 인기가 많은 곡이다. [사진 wikipedia]

 
이후 그녀는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연예 활동을 벌였다. 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이 참전하자 앞에 예를 든 선무 방송뿐만 아니라 전쟁 중 각종 자선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석했고 최전선을 방문해 병사들을 위문하는 등 반나치 활동에 열성적이었다. 당연히 독일에서 그녀는 조국을 배신한 반역자로 취급받았다. 이때의 인식 때문인지 그녀에 대한 독일에서의 반응은 상당히 다양한 편이다.
 
1960년 디트리히는 망명 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해 공연을 가졌다. 빌리 브란트 당시 베를린 시장을 비롯한 반나치 인사들은 그녀를 열렬히 환영했던 반면 매국노는 미국으로 꺼지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인 이들도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그녀를 증오하였던 시위대의 많은 이들이 나치 잔당이라기보다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보다도 전쟁이라면 치를 떨 것 같은 전쟁미망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녀의 노래에 방심하다가 남편이나 애인이 죽어갔다고 여겼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녀의 노래가 전선에서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알려준 증거였다. 상대를 맥 빠지기 위해 틀어 놓았던 아름다운 연가 릴리 마를린 그리고 이 노래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전선에서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만인의 연인이 되었던 마를레네 디트리히, 어쩌면 이 모두가 전쟁이 만든 아이러니라 할 것 같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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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