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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난장판 뒤엔···'귀족학교' 英이튼 출신의 오만

브렉시트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 보리스 존슨 전 외무장관(오른쪽부터) 등의 얼굴 모형을 만들어 비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브렉시트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 보리스 존슨 전 외무장관(오른쪽부터) 등의 얼굴 모형을 만들어 비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완전 엉망이군요. 도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지난 18일(현지시간) 영국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에 나가 있는 취재기자를 생방송으로 연결한 BBC 앵커는 이 말부터 꺼냈다. 존 버커우 하원의장은 이날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실행하려는 테리사 메이 총리의 마지막 희망을 날려버렸다. 브렉시트 시한인 29일을 앞두고 합의안을 재투표에 부치려 했는데, 버커우 의장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것이다. “헌법적 위기”(로버트 버클란드 의원)라는 반응이 나왔다.
 
 아무런 합의 없이 EU를 떠나는 ‘노 딜(no deal) 브렉시트'도 부결된 터라 연기하는 수 밖에 없게 됐다. EU 탈퇴 조항인 리스본조약 50조가 2017년 3월 29일 발효돼 2년이 흘렀는데도, 막판까지 난장판이다.
보수당 출신인 존 버커우 영국 하원의장은 메이 총리가 실질적인 내용 변화 없이는 브렉시트 합의안을 다시 표결에 부칠 수 없다고 선언했다. [EPA=연합뉴스]

보수당 출신인 존 버커우 영국 하원의장은 메이 총리가 실질적인 내용 변화 없이는 브렉시트 합의안을 다시 표결에 부칠 수 없다고 선언했다. [EPA=연합뉴스]

 
 의회의 의사 결정 기능이 마비된 데에는 집권 보수당의 책임이 크다. 집권 연정이 하원의 과반이어서 뜻만 모으면 합의안을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 합의안에 대해 1차 투표에서 118표, 2차 투표에서 75표의 당내 반란표가 나왔다. 내각 회의 내용이 유출되고, 총리의 권위도 무너졌다. 더 심각한 것은 브렉시트의 운명이 총리와 내각이 아니라 당내 강경 브렉시트파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점이다.
 
 보수당에서 정부 합의안을 비토하는 핵심은 유럽연구단체(ERG) 소속 의원들로, 80~90명가량이다. 이들이 부결을 주도했다. ERG 회원 20여 명은 메이가 브렉시트를 1년 이상 늦추면 ‘투표 파업’도 불사하겠다고 압박했다. EU와 완전한 결별을 추구하는 이들 일부는 EU 인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노 딜 브렉시트가 되도록 연기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설득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보수당 브렉시트 강경파 모임을 주도하는 제이콥 리스-모그 의원 [EPA=연합뉴스]

보수당 브렉시트 강경파 모임을 주도하는 제이콥 리스-모그 의원 [EPA=연합뉴스]

 학벌로 연결돼 보수 정계의 요직을 꿰찬 엘리트 정치인들의 타협할 줄 모르는 배타적 문화가 브렉시트 혼란의 한 원인이라고 가디언은 지적했다. 브렉시트 강경파 중에는 이튼 칼리지 등 상위권 사립학교를 나온 이들이 많다. ERG 대표인 제이콥 리스-모그 의원은 금융계 경력에 힘입어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파운드화 가치 하락 기간에 700만 파운드(약 105억원)를 벌었다고 채널4가 보도했다. 이튼을 거쳐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그는 정부 합의안에 조건을 달며 사사건건 제동을 걸어왔다. 
 
 유럽회의론자들에 떠밀려 총선 전략으로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제안하는 정치적 도박을 벌인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도 이튼 출신이다. 캐머런 정부는 긴축 정책을 폈는데, 낙후 공업지역이나 저소득층이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브렉시트가 통과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한계를 노출했다. 브렉시트 캠페인을 주도한 다니엘 한난 유럽의회 의원과 극우 성향 더글라스 카스웰 당시 영국독립당(UKIP) 의원, 나이절 패라지 전 UKIP 대표를 비롯해 탈퇴파의 선거캠프 디렉터 도미닉 커밍스 등도 덜위치, 말보로 칼리지 등 상위권 사립학교를 나왔다. 패라지 전 대표는 국민투표가 가결되자 할 일을 다했다며 사임한 뒤 유럽의회 의원직만 유지 중이다.
외무장관 직을 던지고 메이 총리에 반기를 든 보리스 존슨. [AP=연합뉴스]

외무장관 직을 던지고 메이 총리에 반기를 든 보리스 존슨. [AP=연합뉴스]

 외무장관직을 던지고 메이에게 반기를 든 보리스 존슨은 UKIP이 변방에서 주장하던 브렉시트 캠페인을 중앙 무대로 옮겨왔다. 노 딜 브렉시트가 옳다는 주장을 줄기차게 펴왔다. 현재 여론조사에서 보수당 차기 총리 주자 1위인데, 그가 성공하면 이튼을 나온 20번째 총리가 된다.
 
 수업료가 무료인 공립과 달리 비싼 돈을 내고도 들어가기 힘든 소수 사립학교는 영국 학벌 구조의 중심이다. 이런 학교 출신은 옥스퍼드ㆍ케임브리지대에 입학하는 확률이 높다. 1980년대 이튼을 다닌 한 인사는 “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나라를 운영할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가디언 칼럼니스트 존 해리스는 "자만과 오만,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무능력, 다른 사람에 대해 갖는 선천적 우월감을 지닌 유명 사립학교 출신 정치인들이 이라크전쟁 참전과 금융 위기 같은 모험을 초래하다 가장 최근에 벌인 일이 자신들이 선호하는 브렉시트만 고집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메이 총리는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노동당이 제안한 초당적 모임을 거부했다. 자신만의 합의안을 만들었지만 의회에서 두차례나 대패했다. [AP=연합뉴스]

메이 총리는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노동당이 제안한 초당적 모임을 거부했다. 자신만의 합의안을 만들었지만 의회에서 두차례나 대패했다. [AP=연합뉴스]

 메이 총리도 타협 가능한 방안을 만들 기회를 오래전 걷어찼다. 국민투표 실시 며칠 후 노동당 의원들이 집권당 장관을 찾아가 정부가 모두 동의할 안을 만들려면 초당적 모임을 꾸리라고 제안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전했다. 하지만 메이는 무시했다. 캐머런에 이어 총리에 오른 메이는 2016년에는 ERG 소속 강경파를 설득할 힘을 갖고 있었다. 노동당 등 유럽 잔류파도 국민투표에 기가 눌려 타협이 가능했는데, 자신의 길만 고집한 것이다.
 
 메이는 이후 2017년 조기 총선을 제안했다가 과반을 상실해 북아일랜드 민주연합당(DUP)의 도움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브뤼셀 EU 본부를 오가며 만든 협상안은 의회에서 곧바로 외면당했다.
 
브렉시트가 영국 경제를 죽이고 있다는 조형물 [AP=연합뉴스]

브렉시트가 영국 경제를 죽이고 있다는 조형물 [AP=연합뉴스]

 영국은 국민이 국왕을 반역죄로 처형하며 대의민주주의를 가장 먼저 발전시킨 나라다. 그런데 브렉시트는 직접민주주의 형태인 국민투표에서 드러난 민심을 대의민주주의의 표상인 의회가 실행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영국 정치가 붕괴 단계에 접어들었다”(블룸버그 통신)는 혹평이 나오는 이유다. 
 
 과거 영국 전역에서 실시된 국민투표는 1975년 유럽공동체 가입 문제였고, 2011년 의원 투표 시스템을 바꾸는 내용이었다. 당시 의회는 유권자의 의견과 일치하게 행동했다.  
 노동당을 비롯한 야당 역시 정부 합의안에 반대하지만, 생각이 제각각이다.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와 의원들의 제2 국민투표에 대한 생각이 같지 않다. 영국 정치권이 브렉시트 연기 후 해결책을 찾을지는 미지수다. 의회가 이것도 저것도 싫다고 하자 데일리 메일은 ‘바보들의 집'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타협을 거부하는 정치가 국가 장래를 어떻게 어둡게 만드는지를 영국 정치권은 보여주고 있다.
브렉시트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영국 보수당 의원들 [EPA=연합뉴스]

브렉시트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영국 보수당 의원들 [EPA=연합뉴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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