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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영·수 대신 춤·게임…억지 공부 안하자 꿈이 생겼다

하루 8시간 멍 때리던 서진이, 지금은 예비 프로게이머
“수업 시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멍청히 있거나 잠을 자면서 하루에 8시간씩 학교에 갇혀 있었어요. 일과 시간엔 과민대장증후군, 저녁엔 불면증에 시달리다 보니 몸과 마음이 모두 아프더라고요.”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사는 김서진(18)군은 초등학생 때부터 프로게이머를 꿈꿨다. 좋아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게임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저 아들이 다른 아이들처럼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가길 바랐다. 공부 좀 하라는 부모님과 공부만은 도저히 못 하겠다는 김군은 10년 동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갈등의 터널에 갇혔다.
  
게임에 대한 재능을 전공으로 살려 e스포츠학과에 입학한 김서진(왼쪽)군. 김군은 "내가 선택한 길이니 그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매일 다짐한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게임에 대한 재능을 전공으로 살려 e스포츠학과에 입학한 김서진(왼쪽)군. 김군은 "내가 선택한 길이니 그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매일 다짐한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터널 끝에 빛이 보이기 시작한 건 김군이 고3 때 서울 마포구에 있는 아현산업정보학교에 입학하면서다. 아현학교는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을 대상으로 고3 1년 동안만 위탁 직업 교육을 진행하는 학교다. 서울의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2학년 과정까지 마치고, 고3 기간에는 실무 수업을 진행한다. 김군은 지금 아현학교 e스포츠학과에서 국·영·수 대신 전문적인 게임 훈련을 받으며 다른 29명의 학과 친구들과 함께 ‘리그오브레전드(LOL)’ 프로게이머를 꿈꾸고 있다.
 
‘청담동 학구열’ 뿌리치고 “네가 하고 싶은 것 해봐”
김군의 어머니 임은영(48)씨는 “어릴 때부터 여러 사교육을 시켰는데 서진이가 공부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며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고2가 됐을 때 ‘1년 동안 정말 네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보라’고 했더니 어느 날 아현학교 입학 안내문을 가져왔다. ‘여기 합격하면 한번 절 믿고 지켜봐 주실 수 있어요?’라고 진심으로 말하기에 허락했다”고 말했다.
  
방승호 아현산업정보학교 교장(사진)은 "학교는 다른 그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재미있는 공간이 돼야 한다"는 교육 철학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모든 학생이 입시 경쟁을 통해 명문대 진학을 꿈꾸는 것에 대해 "국가적으로도 너무나 소모적인 경쟁"이라며 "부모님들이 아이의 재능과 열정을 믿어준다면 그 어떤 아이라도 자기 분야를 개척해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방승호 아현산업정보학교 교장(사진)은 "학교는 다른 그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재미있는 공간이 돼야 한다"는 교육 철학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모든 학생이 입시 경쟁을 통해 명문대 진학을 꿈꾸는 것에 대해 "국가적으로도 너무나 소모적인 경쟁"이라며 "부모님들이 아이의 재능과 열정을 믿어준다면 그 어떤 아이라도 자기 분야를 개척해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그래도 입시 준비를 안 시켜도 될지 불안했다. 프로게이머는 대학 나와 갖는 안정적 직장과는 다르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신입생 학부모 총회에서 다른 입학생들 이야기를 들은 뒤 생각이 바뀌었다.

 
“다른 부모들은 직접 아이들 게임 훈련 코치까지 맡을 정도로 열정적이더라고요. 나만 너무 게임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싫어하는 공부를 억지로 하는 것보단 차라리 본인이 좋아하는 것에 치열하게 한번 도전해 보는 게 아이를 위해서도 나은 선택이 될 것 같습니다.”

 
김군 역시 아현학교에 입학한 소감을 묻자 “내가 선택한 길이기 때문에 스스로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다짐을 매일 한다”고 말했다.
  
아현고 댄스 3인방의 이야기 
아현산업정보학교 실용음악학과 학생들의 군무 연습 현장.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계속된 훈련에도 학생들은 서로에게 '화이팅'을 외치며 연습을 이어갔다. 최승식 기자

아현산업정보학교 실용음악학과 학생들의 군무 연습 현장.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계속된 훈련에도 학생들은 서로에게 '화이팅'을 외치며 연습을 이어갔다. 최승식 기자

교실에서 1등은 단 한 명으로 정해진다. 그러나 이는 성적 기준일 뿐 재능 순으로는 그렇지 않다. 공부 외의 길을 찾은 ‘교실 밖 우등생’들은 얼마든지 있다.

 
김군처럼 직업 실무를 익히기 위해 올해에만 730여 명이 아현학교에 입학했다. 산업·디자인·서비스·생활예술 등 4개 계열의 14학과다. 실용음악학과(댄스 전공) 학생 3명은 일반계 고등학교에 다니던 2년 동안 받은 상처를 털어놓았다.
 
아현산업정보학교 실용음악과에 입학한 학생들. 왼쪽부터 유희준양, 김지민양, 함정서군. 최승식 기자

아현산업정보학교 실용음악과에 입학한 학생들. 왼쪽부터 유희준양, 김지민양, 함정서군. 최승식 기자

“제가 댄스 진로를 원하는 것을 알면서도 선생님께서 일부러 수업시간에 앞으로 불러내 문제를 풀라고 시키고 못 풀면 ‘너는 왜 이것도 못 푸냐’는 일이 잦았어요. 댄스는 진로 전공으로 인정도 해주지 않았죠.”(김지민양)
 
“혁신학교에 다녔는데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선생님들이 암묵적으로 입시 위주로 교실을 운영했어요. 주기적으로 진행된 적성검사에서 예체능 분야가 나왔는데, 정작 ‘우리 학교에선 그 분야는 못 도와준다’는 식이었어요.”(유희준양)
  
“‘꿈 찾기’를 주제로 한 강연이 있었어요. 말로는 학생들이 각자의 꿈을 찾는 게 중요하다면서 정작 이미 꿈을 찾은 저에게는 ‘꼭 춤을 춰야겠냐’며 꿈이 없는 사람 취급을 했어요.”(함정서군)
 
아현고 거쳐 버클리음대 입학한 이동영 군
일렉트릭 베이스를 전공으로 하는 이동영 군은 올해 버클리음악대학 프로페셔널뮤직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공부가 아닌 '제3의 길'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 열정이 있다면 과감하게 뛰어들어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사진 이동영군]

일렉트릭 베이스를 전공으로 하는 이동영 군은 올해 버클리음악대학 프로페셔널뮤직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공부가 아닌 '제3의 길'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 열정이 있다면 과감하게 뛰어들어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사진 이동영군]

직업 실무를 주로 배우지만 더 실력을 쌓는 방법으로서 대학 진학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 일렉트릭 베이시스트를 꿈꾸는 이동영(19)군은 아현학교 실용음악학과를 거쳐 올해 미 보스턴에 있는 버클리음악대학 프로페셔널뮤직학과에 입학했다. 이군은 중간에 음악전문학교로 전학도 생각해 봤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현학교의 수업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고 한다.
 
이군은 공부 외의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남들과 다른 길을 가기 위해선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는 열정과 주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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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현학교처럼 교과가 아니라 직업 실무에 집중하는 산업정보학교는 전국에 총 10곳이 있다. 하지만 이 중 6곳이 서울에 있고 정원도 3800여 명에 그친다. 매년 1만 명 가까운 학생이 공부가 아닌 제3의 길을 희망하지만 이 중 3분의 2는 입학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탐사보도팀=유지혜·정진우·하준호 기자 wisepen@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에서 [교실이데아 2019] 학부모 선호도 높은 초등학교, 서울대 진학률이 높은 고등학교를 인포그래픽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news.joins.com/article/23410238)
도움 말씀 주신 분(가나다순)
김경근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 김동일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김수동 심리치료사, 김용학 연세대 총장, 김현수 성장학교 ‘별’ 교장(정신과 전문의), 박민규 고려대 통계학과 교수, 방승호 아현정보산업고등학교 교장, 변수용 미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부교수, 송인한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송형호 전 면목고 교사,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심정섭 더나음연구소장,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 오세정 서울대 총장, 장희선 굿네이버스 아동권리연구소 연구원(사회복지학 박사), 전상용 전 동덕여고 교장, 최성수 성균관대 사회학과 조교수, 홍현주 한림대의대 ‘자살과 학생 정신건강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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