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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수상한 공익과 더 수상한 공무원의 특별한 접선

대구지방고용노동청 안동지청에서 공익 근무중인 반병현씨. [사진 본인 제공]

대구지방고용노동청 안동지청에서 공익 근무중인 반병현씨. [사진 본인 제공]

#화장실 휴지 가는 AI 석사
 

여기 한 공익(사회복무요원)이 있다. 안동의 일반고(경안고)를 2년 만에 조기 졸업해 카이스트에 진학한 후 바이오및뇌공학 석사과정을 또 조기 졸업한 영재지만 고용노동부 산하 대구지방고용노동청 안동지청에서 화장실 휴지 갈기나 우편물 정리하기, 민원인 길 안내 같은 잡무를 하며 병역의무를 하고 있는 반병현(26)씨다. 스스로 얘기하듯 "취업이 그렇게 잘 된다는 인공지능 분야로 학위를 따고서 (산업체의 전문연구요원이 아니라 시급 1600원쯤 받는) 공익이 된" 드문 케이스다. 어쩌다 보니 공익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카이스트 재학 시절 총학의 퀘스트를 수행하느라 총장실을 찾아 말춤을 춘은 반병현씨. [사진 유튜브 캡처]

카이스트 재학 시절 총학의 퀘스트를 수행하느라 총장실을 찾아 말춤을 춘은 반병현씨. [사진 유튜브 캡처]

중2 때부터 인터넷에 무협소설을 연재하고 발명 동아리를 이끌며 이미 스타트업 몇 개를 만들었던 이 비범한 인물은 2018년 7월 공익이 된 지 일주일 만에 '사고'를 쳤다. 엑셀 파일 두 개를 합치라는 업무 지시를 받고 이를 자동으로 합쳐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업무용 포털로 전달했다가 바이러스 유포자로 오인받아 인터넷 접속이 차단당한 것이다. 그는 이 해프닝을 '업무자동화 스크립트 짜주다가 국정원(국가정보자원관리원)에 적발당한 썰'이라는 제목으로 글쓰기 플랫폼(브런치)에 올렸고, 당일에만 3만여 명이 읽고 공유하며 하룻밤 새 유명인사가 됐다. 6개월 걸리는 우편물 관련 단순 반복 업무를 30분 만에 끝내는 자동화 프로그램 개발 스토리까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며 업무 혁신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파장이 컸다. 지난 연말 청와대에 불려갔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 회장님으로부터는 만나러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냉큼 달려가 덥석 시키는 일을 할 법도 한데 웬만한 제안은 다 거절 중이다. 전공을 살려 다른 정부 부처 업무를 돕고 싶어도 출장비 같은 금전적 보상은 고사하고 매번 겸직 허가를 받지 않으면 본업인 잡무(휴지 갈기 등) 외의 '딴짓'(개발)을 할 수 없는 현실적 장벽 탓이 크다. 여기에 "군인을 보고 싶으면 면회를 와야 하는 게 아니냐"는 식의 특유의 귀여운 허세도 한몫했다.  

그런데 이 괴짜 공익을 감동시켜 지속적으로 업무협조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단한 권력자도, 부자도, 천재도 아니라 뜻밖에도 그냥 공무원이었다. 그것도 요즘 일자리 문제로 사방에서 욕을 먹는 고용노동부 소속이다. 그가 올린 글을 보고 미디어보다 먼저 연락을 해온 곳이다. 반씨는 처음엔 이메일만 주고받다 지난해 12월 3일 세종시에서 AI 기술을 활용해 데이터 혁신을 통한 고용 관련 서비스 업그레이드 업무를 하는 '고용서비스기반과' 사람들과 만났다. 그 후기를 페이스북에 이렇게 올렸다. '고용노동부엔 스타트업만큼 열정이 뛰어난 부서가 있다.'

 

#과고 출신 개발자 고용부 공무원
 

반씨는 "서로 자기 하는 일이 재밌다면서 침 튀기며 업무 자랑하는 대단한 팀이더라"며 "열정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고 했다.  
다른 부처 사무실과 달리 칸막이 없이 가운데를 비워둬 수시로 소통하는 고용노동부 고용서비스기반과 사무실. 화이트보드를 통해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을 적극적으로 한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과학고 출신의 김동현 서기관. 안혜리 기자

다른 부처 사무실과 달리 칸막이 없이 가운데를 비워둬 수시로 소통하는 고용노동부 고용서비스기반과 사무실. 화이트보드를 통해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을 적극적으로 한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과학고 출신의 김동현 서기관. 안혜리 기자

"자존감에 도움되는 업무라곤 하나 없고 보람 느낄 일도 없다"는 별난 공익에게 이런 후한 평가를 받는 조직은 어떤 모습일까. 영혼 없는 공무원이 즐비한 요즘 영혼 있는 공무원들을 만나러 오송행 KTX를 탔다. 세종시 정부청사 남문 바로 앞 11-2동 5층의 고용서비스기반과에 들어서니 다른 과에선 보기 어려운 대형 화이트보드와 프레젠테이션용 이동식 대형 모니터가 우선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다른 공무원 사무실과는 달리 책상 사이 칸막이 없이 가운데가 탁 트인 구조라 의자만 돌려 앉으면 팀원 전원이 얼굴 맞대고 대화할 수 있는 공간, "(네이버의 AI 계열사인) 네이버랩스에 있을 법한 IT 전문 도서가 즐비한" 공용 책장까지…. 과연 반씨 표현대로 공무원 조직이라기보다 대학원 연구실이나 스타트업 같은 분위기였다. 한마디로 다른 공무원 조직과는 굉장히 이질적인 분위기였다.  

고용서비스기반과 공용책장. '파이썬'등 전문 책자가 주로 눈에 띈다. 안혜리 기자

고용서비스기반과 공용책장. '파이썬'등 전문 책자가 주로 눈에 띈다. 안혜리 기자

구성원 면면은 더욱 남달랐다. 오은경 과장을 포함해 팀원이 모두 9명인데 행시 출신의 전형적인 '문과' 공무원도 물론 있지만 금융사에서 빅데이터를 다뤘거나 지방에서 상담업무를 하는 등 민간에서 경력 공채로 들어온 다양한 배경의 인물들이 섞여 있었다. 모두 전공과 무관하게 코딩을 할 줄 알거나 최소한 개념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을 스스로 만들어 하는 사람들이라는 게 다른 조직과 가장 달랐다.  

마치 IT 스타트업처럼 대형 모니터 두 개는 기본이고 책상마다 코딩 같은 전문서적이 즐비하다. 안혜리 기자

마치 IT 스타트업처럼 대형 모니터 두 개는 기본이고 책상마다 코딩 같은 전문서적이 즐비하다. 안혜리 기자

그중에서도 특히 중심 역할을 하는 독특한 인물이 있었다. 대전과고와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를 거쳐 병역특례(전문연구요원)로 대전의 한 벤처기업에서 3년간 개발자 업무를 하다 느닷없이 행시를 봐서 기술직도 아니고 행정직 공무원이 된 김동현(40) 서기관이다. 모성보호 업무 등을 담당하다 고용정책 전반을 조율하는 고용정책총괄과 근무 당시 박병기 주무계장(현 경사노위 파견)과 의기투합해 지금의 '고용서비스기반과'를 만든 장본인이다. 데이터 통합 등 꼭 필요한 업무를 지속적으로 하려면 새 조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1년 가까이 과장, 국장, 실장으로 이어지는 고용부 내부 설득 작업은 물론 행안부와 기재부를 거쳐 국회까지 뛰어다니며 고용부 역사상 처음으로 자발적 필요에 의한 '상향식' 조직 하나를 만들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한데 모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지금은 '코딩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이름의 유튜브 채널로 코딩 교육까지 하고 있다.  

 

#화이트보드로 위계 깬 과장님
 

박병기 과장은 "고용부는 수십조 원에 달하는 각종 사업을 운영하는데 데이터는 부실하고 고객 마인드도 워낙 떨어지다 보니 국민 동의를 얻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스스로 창피했다"고 말한다. "고용 지표가 나쁘게 나올 때마다 임시방편으로 새로운 제도를 뚝딱 만들어내다 보니 업무는 계속 늘고 효과는 오히려 떨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걸 참기 어려웠다"고도 했다. 심지어 어떤 프로그램은 전국적으로 수혜자가 200명이 채 안 되는 것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 데이터는 사방으로 흩어져 있어 예산 투입 대비 고용 효과와 같은 제대로 된 분석 하나 하기도 어려웠다. 속된 말로 "쪽팔리게 살지 말자"는 문제의식이 고용서비스기반과를 만들겠다고 뛰어다닌 동인이었다.  

화이트보드는 위계를 깨는 좋은 수단이다. 왼쪽이 오은경 과장, 오른쪽이 김동현 서기관. 안혜리 기자

화이트보드는 위계를 깨는 좋은 수단이다. 왼쪽이 오은경 과장, 오른쪽이 김동현 서기관. 안혜리 기자

운도 좋았다. 2016년 말 당시 이기권 고용부 장관은 이런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받고는 담당 실장에게 "이 업무 성과로 평가하겠다"며 힘을 실어줬다. 또 이듬해 TF를 구성하자마자 때마침 삼성경제연구소 파견을 갔던 고참 과장인 박광일 현 전남지방노동위원장(국장)이 합류했다. 기술에 대한 이해와 혁신 마인드가 충만한 그는 삼성반도체가 활용한다는 화이트보드 방식을 도입했다. 다른 조직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위계질서가 강한 공무원 조직에선 직급 높은 사람 의견에 따라가기 마련이라 토론이 무의미하다. 이걸 깨는 방법을 고민하다 떠올린 게 화이트보드다. 박 위원장은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이 앞에 둘러앉아 써가면서 얘기하면 직급 상관없이 아이디어 대 아이디어의 토론만 남는다"며 "업무에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복장 규정도 바꿨다. 자유로운 생각을 스스럼없이 공유하기 위해 팀원들 모두 운동화에 청바지 등 원하는 대로 입고 출퇴근했다. 박병기 과장은 "위계가 확실한 공무원 조직 특성상 찍힐까 무서워 상사에게 자기 의견을 잘 얘기하지 못하는데 국장 직전 고참 과장이 먼저 나서서 위계를 무너뜨리니 생각이 다르면 다르다고 얘기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만들어졌다"고 했다. 업무에 대한 공감대가 이뤄지니 구성원 모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제대로 해야겠다는 책임감으로 협업할 수 있었고, 자연어 처리 기반의 워크넷 재편 등 굵직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정부는 알바 일자리에 수십 조원을 펑펑 쓴다. 복지라는 이름으로 세금을 물 쓰듯 쓰는 어느 시장님은 최근 돈을 더 쓰고 싶다며 최근 "시립조폐청이라도 만들고 싶다"는 발언을 했다. 터무니없는 돈 쓰는 대신 공무원이 영혼을 갖고 일하게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이 아닐까. 까칠한 공익마저 감동시킨 공무원들을 만나보고 떠올린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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