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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가 덫’에 빠진 미·EU·일, 향후 5년은 통화긴축 못한다

안토니오 파타스

안토니오 파타스

“경제 위기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곤 한다.”
 
프랑스 명문 비즈니스스쿨 인시아드(INSEAD)의 안토니오 파타스 교수의 말이다. 2008년 경제 위기가 낳은 통화정책 패러다임 변화를 설명하면서다. 파타스 교수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침체 가능성을 지난달 경고했다. 지난주엔 유럽중앙은행(ECB)은 ‘선별적 장기대출(TLTRO) 프로그램Ⅲ’을 발표했다. 통화긴축하려다 다시 돈줄을 푸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대서양 건너편 미국의 연방준비제도(Fed)는 이미 올 1월 긴축을 중단했다. 일본은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하기로 15일 결정했다. 통화정책 정상화(back to normal)를 중단하는 것일까.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싱가포르에 머물고 있는 파타스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톰슨로이터에 따르면 그는 ‘금융 시장에 영향력이 강한 경제학 교수’ 가운데 한 명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뉴 노멀(New Normal)의 지속인가.
“개인적으로 뉴 노멀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의미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으니 일단 쓰기로 하자(웃음). Fed와 ECB뿐 아니라 영란은행(BOE)의 마크 카니 총재도 기준금리를 0.5%에서 유지하고 있다. 브렉시트 충격이 발생하면 양적완화(QE)에 다시 나설 태세다. 일본은행(BOJ)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는 물가상승 목표인 2%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주요 경제권의 중앙은행들이 언제 통화정책 정상화를 할 수 있을지 아직 가늠하기 어렵다.”
 
저금리 상태인 지금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미국의 기준금리 최고치가 2.5%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2.5%는 아주 낮은 수준이다. 유로존과 일본, 영국의 기준금리는 사실상 제로 수준이거나 마이너스 상태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낮은 물가상승률이다. 물가가 급등한 1980년대 초 기준으로 보면 ‘꿈의 물가상승률’이랄 수 있는 연 2% 상승도 달성하기 어려운 상태다. 나는 이런 현재 상태를 ‘저물가의 덫(low inflation trap)’이라고 부르고 싶다. ”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과 다른 말인가.
“통화정책 기준으로 보면 사실상 같다. 하지만 유동성 함정은 돈을 푸는 데도 경기가 침체인 경우를 말한다. 지금은 경기도 불확실하지만 물가가 필요한 만큼 오르지 않고 있다. 그 바람에 주요 중앙은행들이 ‘저금리 덫(lower interest rate trap)’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
 
이런 상태가 얼마나 더 갈 것 같은가.
“(껄껄 웃으며) 경제학자에게 미래를 예측하라고 하는 일은 너무 잔인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저물가 덫은 적어도 5년 정도 이어질 듯싶다.”
 
 
지금은 비정상이 아니라 새 체제
 
근거로 파타스 교수는 미 경제가 2020년 침체에 빠질 가능성을 제시했다. 요즘 미국 실업률은 3.8% 수준이다.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다. 그는 “현대 경제구조에서 완전고용 상태가 오래 가기는 어렵다”며 “그만큼 실업률이 올라가는 사태(침체)가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지금을 ‘통화정책의 비정상 시기’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
“사실 그렇다. 일본은행이 QE를 시작한 지 18년이 지났다. 앞으로 5년 정도 더 지금 정책을 유지한다면, QE 시대가 23년에 이른다. 이 정도면 비정상 시대가 아니다. 미국도 5년 뒤엔 저금리 시대가 시작된지 16년이 된다. 이 정도면 새로운 통화정책 패러다임 또는 레짐(체제)이 지배한 시대라고 해야 한다.”
 
사실, 미국 Fed 의장인 제롬 파월은 통화정책을 정상화하려고 했다.
“그의 전임자인 재닛 옐런부터 정상화(back to normal)를 추진했다. 하지만 이전 패러다임 시대로 돌아가기엔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 보인다. 파월은 ‘인내심을 갖고 경제 상황을 지켜본다’고 말했다. 그의 말 자체는 중립적이다. 경제가 좋으면 긴축할 수도 있으니. 하지만 내가 보기에 올 1월 금리인상 멈춤은 ‘역사적인 유턴’이라고 본다.”
 
2008년 경제위기가 그 정도로 큰 사건이었나.
“대공황을 떠올리게 하는 대침체(Great Recession)란 말이 괜히 만들어졌겠는가. 통화정책 패러다임이 바뀔 만한 사건이었다. 대규모 경제위기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곤 한다. 이런 위기 이후엔 새로운 통화정책 시대가 열렸다. 금융 역사가들이 말하는 통화정책의 역사적 분수령이 19세기 이후 5~6 차례 있었다.”
 
파타스 교수가 말하는 첫 번째 분수령은 나폴레옹 전쟁 때문에 영국 금태환을 중단한 사건(1797년)이었다. 두 번째는 잇따른 경제 위기 이후 벌어진 1840년대 통화정책 논쟁(통화학파 대 은행학파 논쟁), 1929년 대공황, 1970년대 후반 스태그플레이션 사태 등이다. 이런 위기와 논쟁 뒤에 새로운 통화정책 패러다임이 등장해 한동안 이어졌다.
 
 
중앙은행이 신규 국채 사들여야
 
어떻게 하면 저물가 덫에서 벗어날까.
“현재 이코노미스트들이 제시한 방안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인플레이션 타깃(물가안정 목표치)을 더 높이는 방법이다. 현재 연 2%인 타깃을 더 높이면 통화공급을 한결 공격적으로 할 수 있다.”
 
두 번째 방법은 무엇인가.
“좀 파격적인 정책이다. 중앙은행이 정부가 발행한 채권을 직접 사주는 방식이다. 이른바 화폐화(Monetization)다.”
 
진보적인 포스트 케인지언 쪽 학자들이 주장하는 정책 아닌가.
“경제정책은 실용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필요하면, 그 정책을 애초 제시한 사람들이 진보적인지 아닌지 따질 필요가 없이 채택해 써야 한다. 나는 포스트 케인지언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경제 흐름이 중앙은행이 국채를 직접 사는 방안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파타스 교수가 말한 화폐화는 QE와는 다르다. 화폐화는 중앙은행이 정부가 시행하는 국채 입찰에 직접 참여한다. 국채 등이 채권시장에 풀리기도 전에 사들여준다. 1980년대 이후 인플레이션 악화를 이유로 금기시된 정책이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안토니오 파타스 스페인 출신 경제학자다. 1987년 스페인 동부에 있는 발렌시아대를 졸업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 워싱턴의 조지타운대와 프랑스 인시아드에서 경제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또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의 자문 교수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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