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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창조성은 개인 영역인가, 표준화 가능한가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6>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그동안 모아놓은 책이 꽤 많다. 관심사가 중구난방인 데다 꽂히는 주제가 생길 때마다 관련 책부터 챙겨 놓는 습관 때문이다. 집안 책장에는 공간이 없어진 지 오래다. 몇 달 전부터 개인 라이브러리 겸 화실을 짓고 있다. 배가 하루 3번 들어오는 남쪽 끝 섬 바닷가다. 다 무너져 내린 미역창고를 구입해 창조적 공간으로 만들겠다고 이름도 거창하게 ‘미력창고(美力創考)’라 붙이고 신축에 가까운 개조 공사를 시작했다.
 
아주 환장한다. 공사 인부들이 제멋대로이기 때문이다. 섬이라 들어오겠다는 인부도 없고, 삼고초려해서 ‘모셔온’ 인부들은 조금만 맘에 안 들면 배 타고 바로 떠난다. 돈은 돈대로 들고, 일은 도무지 진척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라도 스스로 시도해 보겠지만 전혀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독일이었다면 사정이 많이 다르다.
 
 
독일 제조업의 경쟁력은 ‘표준화’
 
건설·토목 관련 재료와 장비를 파는 독일의 대형 체인점 ‘바우하우스’ 내부. [사진 윤광준]

건설·토목 관련 재료와 장비를 파는 독일의 대형 체인점 ‘바우하우스’ 내부. [사진 윤광준]

독일에는 ‘바우하우스’라는 건설·토목 관련 재료와 장비를 파는 건축 체인점이 있다. 이 연재의 주제인 ‘바우하우스’가 아니다. 이름만 동일한 건축체인점이다(‘OBI’라는 비슷한 유형의 체인점도 있다). 정말 없는 것이 없다. 여기만 열심히 들락거리면 특별한 손재주가 없어도 집 하나는 스스로 지을 수 있다. 모든 것이 ‘표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동 드라이버로 나사 돌릴 줄만 알면 표준화된 재료들을 사다가 붙이기만 하면 된다. 예를 들어 100년이 넘은 건물만 아니라면 각 건물 창문의 사이즈가 크기별로 표준화돼  있다. 건물 창문틀의 사이즈를 알면 거기에 맞는 창문을 사와 전동 드라이버로 돌리면 된다. 창의 커튼도 사이즈가 맞는 것을 구입해 걸기만 하면 된다. 커튼 업자가 집을 방문해 치수를 재가서 ‘맞춘다’는 것은 오버다. 이케아 가구 맞추듯 집도 지을 수 있다(그런 의미에서 건축체인점 ‘바우하우스’는 독일 ‘바우하우스’ 정신을 아주 잘 구현하고 있다).
 
독일인들에게 ‘DIY(Do It Yourself)’ 문화가 발달한 이유도 바로 이런 ‘짓는다(Bau)’는 행위와 관련된 철저한 ‘표준화’의 전통 덕분이다. 독일 제조업의 경쟁력 또한 이 ‘표준화’의 전통에서 나온다. ‘표준화’가 되어 있지 않으면 생산 현장에서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정확하게 지시해야 정확한 퍼포먼스가 나온다. “무슨 말인지 알지?”를 반복하는 상사처럼 짜증나는 경우는 없다. 잘못되어도 모든 책임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부하에게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의미의 표준화’가 소통의 전제다. 그래서 리더의 언어는 명확해야 한다. 애매모호한 선문답은 리더의 언어가 아니다.
 
규격에 따라 자세하게 분류되어 있는 바우하우스의 나사못 판매대. [사진 윤광준]

규격에 따라 자세하게 분류되어 있는 바우하우스의 나사못 판매대. [사진 윤광준]

오늘날 ‘매우 독일적’이라 여겨지는 ‘표준화’의 전통은 1914년 쾰른에서 열린 독일공작연맹 전시회에서 시작됐다. 이른바 ‘표준화(Typisierung)’ 논쟁이다. 발단은 무테지우스의 일방적 선언이었다. 그는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뒤처진 독일이 공업생산에서 짧은 기간 내 비약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 독일공작연맹이 추구해야 할 ‘10개의 원칙’을 발표했다. 핵심은 ‘규격화’였다. “건축은 물론 이와 연관된 공작연맹의 모든 활동은 ‘규격화’를 추구해야 한다. 규격화를 통해서만 일반적이고 확실한 취향에 들어가는 입구를 찾을 수 있다.”
 
낙후된 산업화는 시민계층의 ‘교양교육’을 통해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 무테지우스의 생각이었다. 특히 주거와 생활용품의 규격화를 통해 취향 교육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영국 파견 외교관 시절 무테지우스는 영국의 예술과 공예 교육에 큰 관심을 가졌다. 특히 헨리 콜(Henry Cole·1808~1882)이 주도했던 예술교육 시스템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프로이센 정부에 보고했다. 콜은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이 총재로 있던 ‘왕립예술협회(The Royal Society of Arts)’의 실무를 책임졌던 사람이다. 1851년 영국 런던만국박람회 준비 조직을 이끌기도 했다.
 
런던만국박람회는 산업화의 선두국가인 영국의 위상을 한껏 자랑한 행사였다. 특히 정원 설계사이며 유리온실 건설전문가였던 조셉 팩스턴(Joseph Paxton·1801~1865)이 설계한 ‘수정궁(Crystal Palace)’은 불과 17주 만에 완성돼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영국 연간 생산량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유리와 이 유리를 지탱하는 수천 개의 철기둥으로만 지어진 수정궁은 ‘획일성’이라는 산업사회 건축을 상징적으로 예고하는 건물이었다. ‘획일성’이 어떻게 미학의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수십 년이 지난 1914년 독일공작연맹의 쾰른 전시회에서 무테지우스의 도발적 선언으로 본격 시작된 것이다.
 
1914년 독일공작연맹 쾰른 전시회 포스터. 이때 독일공작연맹은 ‘규격화’를 둘러싼 헤르만 무테지우스와 헨리 반 데 벨데의 대립으로 분열의 위기를 맞는다. 몇 달 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전쟁이 끝난 후 ‘규격화’는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시작된다. [사진 윤광준]

1914년 독일공작연맹 쾰른 전시회 포스터. 이때 독일공작연맹은 ‘규격화’를 둘러싼 헤르만 무테지우스와 헨리 반 데 벨데의 대립으로 분열의 위기를 맞는다. 몇 달 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전쟁이 끝난 후 ‘규격화’는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시작된다. [사진 윤광준]

런던박람회가 끝난 후, 영국 공업생산품의 예술적 수준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됐다. 1852년 콜은 만국박람회에서 얻은 이익금으로 영국 최초의 공예박물관인 ‘사우스켄싱턴 박물관’(오늘날의 ‘빅토리아 알버트 뮤지엄’)과 ‘디자인 학교(School of Design)’를 설립했다. 그 결과 19세기 말에 이르면 연간 240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예술·건축·공예 관련 학교에서 체계적인 기술을 교육받고 배출됐다.
 
1900년에 들어서면서 독일 프로이센 정부는 사우스켄싱턴 박물관의 운영방식과 교육 프로그램에 관한 무테지우스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독일 예술 및 공예 교육 프로그램의 개혁을 시작했다. 1903년 페터 베렌스는 ‘뒤셀도르프 예술공예학교’의 교장으로, 표현주의 건축가 한스 푈치히(Hans Poelzig·1869~1936)는 ‘왕립 브레슬라우 예술공예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1907년에는 독일 건축의 또 다른 스타 브루노 파울(Bruno Paul·1874~1968)이 ‘베를린 예술공예뮤지엄 부설 예술학교’의 교장이 됐다. 독일 건축·공예 분야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던 이들은 무테지우스의 주도하에 1907년 창립된 독일공작연맹의 핵심 멤버가 된다.
 
무테지우스의 사상은 ‘즉물성(Sachlichkeit)’이란 단어로 요약된다. 물질 스스로 규정하는 존재 방식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감정이나 편견으로 결정하지 말고, 물질이 속해 있는 객관적 맥락에 따라 그 물질의 기능과 형태를 평가하자는 주장이다. 무테지우스의 이 같은 주장은 1920년대에 ‘신즉물주의(Neue Sachlicheit)’라는 이름의 좀 더 세련된 형태로 부활한다. 20세기 초, 뿌리 없는 잡종적 고전주의에 경도된 프로이센 건축과 예술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많은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앞다퉈 독일공작연맹 설립에 동참했다. 그렇다고 무테지우스의 ‘즉물성’ 주장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무테지우스는 너무 성급했고, 너무 관료적이었다. 관료 특유의 권위적 소통방식 탓에 그는 불필요하게 많은 적을 만들었다. 1914년 일방적으로 배포한 그의 ‘표준화 선언’은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누구보다 가장 강력하게 반기를 든 이는 헨리 반 데 벨데였다. 그로피우스의 가까운 동료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1880~1938)와 유겐트슈틸 건축가 아우구스트 엔델(August Endell·1871~1925)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헨리 반 데 벨데 편에 섰다. 젊은 그로피우스도 반 무테지우스 전선에 섰다(그러나 후에 ‘규격화’를 실천적으로 추구했다).
 
 
예술 및 공예 교육프로그램 개혁
 
무테지우스에 반대하는 반 데 벨데의 주장은 ‘개성화’로 요약할 수 있다. 반 데 벨데는 무테지우스의 10개 항에 상응하는 10개 항의 반대주장을 배포한다. 그중 첫 번째 항이다.
 
“공작연맹 속에 여전히 예술가가 존재하고 있는 한, 그리고 그들이 공작연맹의 운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한, 그들은 기준의 설정이나 규격화에 대하여 항의할 것이다. 예술가는 본질적으로 감정이 격한 개인주의자이며 동시에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창조자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일정한 형태나 규격을 강요하는 원리에는 결코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약화시키는 것을 모두 믿지 않는다. 또한 원래의 목표를 향해 생각해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규격, 혹은 전화위복이라는 말로서 외관 밖에 볼 수 없는 일반적 형식으로 유도해 가는 규칙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본능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10개 항에 달하는 무테지우스의 규격화 주장을 구구절절 반대하는 반 데 벨데의 주장에는 ‘개인주의적 예술관’이 숨겨져 있다. 산업화 시대에서는 표준화·규격화에 기초해야만 집단적 창조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 무테지우스의 주장이라면, 반 데 벨데에게 있어서 창조성이란 전적으로 개인의 영역이며 인위적으로 양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조성이 개인의 영역인가, 아니면 집단의 영역에서도 존재 가능한가에 관한 두 사람의 논쟁은 ‘예술이 과연 교육 가능한가?’라는 바우하우스의 근본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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