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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에게 필요한 철학의 위안

을(乙)의 철학

을(乙)의 철학

을(乙)의 철학
송수진 지음
한빛비즈
 
“왜 여기는 박카스 가격이 약국보다 비싸냐?”(최저시급까지는 올려 달라고 하자) “빚내서 장사하는데 넌 양심도 없냐?”
 
『을(乙)의 철학』  저자 송수진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할 때 손님과 가게 주인에게 들었던 말들이다. 판매사원으로 영업할 때는 “우리 제품 한번 드셔 보세요”라고 권했다가 낭패를 당했다. 들고 있던 포스트와 함께 제품이 가게 앞 도로에 내팽겨졌다. 이른바 갑질의 현장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군가’라고 자신에게 물어보게 된다.
 
저자는 “노동이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 까닭에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 속에서 자신을 부정하고 불행을 느끼며, 육체를 소모시키고 정신을 황폐화시킨다”는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수고』를 대입시켜 위안으로 삼는다. 비록 이미 지나간 일이기는 했지만.
 
형이상학적 접근이나 학문적 독해의 영역인 철학은 통상적으로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누릴 수 없는 사치로 여겨진다. 이 책의 저자는 중소기업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 등 을의 입장을 누구보다 많이 경험했다. 세무사 준비를 하다가 도서관에서 해야 할 공부는 안 하고 철학책을 붙잡기 시작하면서 그의 인생이 달라졌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프리드리히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발터 벤야민의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루이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하여』 등을 섭렵하며 철학을 ‘을의 언어’로도 해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여기선 철학이 을에게 허영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조명하는 역할을 해 줌으로써 뜻밖의 위안으로 다가갈 수 있다.
 
사실 갑이든 을이든 대부분의 사람은 좌절과 절망, 고통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것이 실망이나 패배감, 지루함과 같은 다소 정도가 낮은 단계일 수는 있지만. 이 책은 을에게 ‘희망 고문’을 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희망이 생겨나게 한다. 나를 둘러싼 세상에 내가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나를 이해하게 해 준다. 일종의 ‘생활 철학’이라고나 할까. 『을의 철학』을 읽다 보면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네 삶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지 않을까.
 
한경환 기자 han.ky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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