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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베스트] 여전히 싱싱한 기형도라는 텍스트

중앙일보와 교보문고가 최근 출간된 신간 중 여섯 권의 책을 ‘마이 베스트’로 선정했습니다. 콘텐트 완성도와 사회적 영향력, 판매 부수 등을 두루 고려해 뽑은 ‘이달의 추천 도서’입니다. 중앙일보 출판팀과 교보문고 북마스터·MD 23명이 선정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지음
문학과지성사
 
시인 기형도는 누군가에게는 희미한 추억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생생한 살아 있는 텍스트다. ‘질투는 나의 힘’ ‘숲으로 된 성벽’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영화로, 책으로, 그도 아니면 잊히지 않은 마음속 한 구절로 남은 그의 시 제목과 구절들은 시간의 완력조차 어쩌지 못한 아름다움의 증거물들이다.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시인들이 우리에게 없는 건 아니다. 가령 미당 서정주의 초기 시나 백석의 아련한 토속어는 여전히 읽는 이의 마음을 건드린다. 하지만 기형도의 시어(詩語)만큼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형도의 욱신거리는 시집을 읽으며 저 자신의 위태로움과 상처를 안타까워하는 듯하다. 세대를 가로지르며 그의 시집이 읽히는 현상을 그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그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되는 시점에서 말이다.
 
새로운 기형도 시전집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는 이를테면 결정판이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두 달 만인 1989년 5월 출간된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과 기왕에 출간된 『기형도 전집』에 실려 있는 미발표 원고를 합쳐 97편의 작품을 담았다. 30주기 기일인 3월 7일을 ‘펴낸날’로 삼아 태어난 기념 시집이다. 2000년 이후 등단한 젊은 시인 88명이 한 편씩을 바친 헌정시집 『어느 푸른 저녁』도 나란히 출간됐다.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지만 기형도의 시는 쉽지 않다. 역시 ‘빈집’ 같은 작품이 가장 문턱이 낮지 않을까. 감상해보시라. 전문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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