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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만리장성 서쪽 끝까지, 조선 상인 문초운의 도전

윤태옥의 중국 기행 - 변방의 인문학
간쑤성 서북 끝자락에 남아 있는 세 개의 주요 관문. 사진은 양관. 조선상인 문초운은 명대에 다시 쌓은 만리장성의 서쪽 마지막 관문인 가욕관까지 걸어갔다. [사진 윤태옥]

간쑤성 서북 끝자락에 남아 있는 세 개의 주요 관문. 사진은 양관. 조선상인 문초운은 명대에 다시 쌓은 만리장성의 서쪽 마지막 관문인 가욕관까지 걸어갔다. [사진 윤태옥]

변방은 국경이라고도 읽을 수 있다. 오늘날의 역사부도에서는, 발을 한 번만 디디면 전부 내 땅이었다는 발상이 깔려서 그런지 최대 판도만 보여주기 일쑤다. 시대마다 밀고 밀린 국경선을 전부 이어 붙여 동영상을 만들면 춤추는 상모와 같이 요동을 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누적된 역사를 종합하여 설정한, 국경선이 아닌 구분선은 역사의 큰 흐름을 이해시켜 주는 좋은 교재가 되기도 한다. 후환융(胡煥庸) 라인도 그런 것의 하나이다.
 
1930년대에 활동한 중국의 역사지리학자 후환융은 현재의 중국을 강우량·지형·민족·인구밀도 모두가 뚜렷하게 대조되는 두 지역으로 구분했다. 헤이룽장성 헤이허(黑河)와 윈난성 텅충(騰衝)을 잇는 직선으로 서북과 동남으로 구분한 것이다. 서북은 대부분 사막과 초원으로 인구 밀도가 낮은 유목민 지역이고, 동남은 인구 밀도가 높은 농경지대로서 전통적인 한족 지역이란 것이다. 동북까지 한족지역이라 한 것은 적당치 않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음미할 가치는 있다.
 
 
양관·옥문관, 간쑤성 끝자락 국경 관문
 
간쑤성 서북 끝자락에 남아 있는 세 개의 주요 관문. 사진은 가욕관. 조선상인 문초운은 명대에 다시 쌓은 만리장성의 서쪽 마지막 관문인 가욕관까지 걸어갔다. [사진 윤태옥]

간쑤성 서북 끝자락에 남아 있는 세 개의 주요 관문. 사진은 가욕관. 조선상인 문초운은 명대에 다시 쌓은 만리장성의 서쪽 마지막 관문인 가욕관까지 걸어갔다. [사진 윤태옥]

후환융 라인으로 서북과 동남을 구분해 보면, 농경과 유목 두 이질적인 세력이 상대지역으로 진출하는 길목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간쑤성(甘肅省)과 산시성(山西省)이 바로 그것이다. 유목 세력이 화북으로 진출할 때 산시성을 통과해 타이항산 계곡을 건너곤 했었다. 간쑤성은 후환융 라인을 뚫고 서북 방면으로 가늘고 깊게 들어가 있다. 중원의 군대가 서북으로 진출하던 길목이 바로 간쑤성의 하서주랑이었다.
 
간쑤성의 서북 끝자락에는 양관(陽關)·옥문관(玉門關)·가욕관(嘉峪關)이라는 세 개의 유명한 국경 관문이 남아 있다. 둔황 북쪽의 옥문관과 둔황 서쪽의 양관은 한대에 세워진 것이다. 옥문관은 성벽과 관문의 흔적이 회고의 감상을 자극한다. 양관에는 봉화대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을 뿐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사막이 펼쳐져 있다.
 
이에 비해 명대의 가욕관은 많은 건축물들이 남아 있거나 복원되어 있어 국경도시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는다. 가욕관은 명대에 다시 쌓은 만리장성의 서쪽 마지막 관문이다. 세 개의 관문은 한나라와 명나라가 서북으로 어디까지 힘을 행사했는지 보여 주는 표지가 되기도 한다.
 
간쑤성 서북 끝자락에 남아 있는 세 개의 주요 관문. 사진은 옥문관. 조선상인 문초운은 명대에 다시 쌓은 만리장성의 서쪽 마지막 관문인 가욕관까지 걸어갔다. [사진 윤태옥]

간쑤성 서북 끝자락에 남아 있는 세 개의 주요 관문. 사진은 옥문관. 조선상인 문초운은 명대에 다시 쌓은 만리장성의 서쪽 마지막 관문인 가욕관까지 걸어갔다. [사진 윤태옥]

세 개의 관문 모두 한국인들에게는 거리감이 상당하다. 한대는 이천 년 전이고, 명대라고 해도 600여 년 전이니 시간적 거리감은 당연하다. 지리적 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쪽으로 조금 가까운 가욕관까지는 어느 정도일까. 인천에서 산둥성 옌타이까지 직선으로 350여㎞의 바다를 건넌 다음, 옌타이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2500㎞나 가야 한다. 민항기를 탄다면 베이징이나 상하이에서 환승해야 하는데 당일 도착조차 만만치 않다. 그러니 가욕관까지 걸어서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런데 이 가욕관까지 걸어서 간 조선인이 있었다면?
 
있었다. 그것도 1883년의 일이다. 문초운(聞肖雲)이라고 하는 조선 상인이었다. 문초운에 관한 기록을 최근 역사학자들이 중국과 조선 양쪽에서 찾아냈다. 요약하자면 간쑤성 가욕관까지 가서 허가 없이 홍삼을 매매하다가 중국 관헌들에게 불법 무역으로 적발되었고, 베이징을 거쳐 조선으로 압송된 인물이었다.
 
조선의 사헌부 심문 기록에 의하면 그는 동지사 사행단에 합법적으로 동행한 상인이었다. 청심환(약품)을 가지고 베이징으로 갔다가 병 때문에 현지에 남았고, 거지의 처지가 되어 청나라 관헌에 잡혀 왔다는 것이다. ‘거지의 처지’ 운운하면서 앓는 소리를 했지만 청나라의 기록은 약간 다르다. 문초운은 가욕관에서 삼약(蔘葯)을 사고팔다가 체포됐다. 청의 관원들은 문초운이 무허가 무역을 해서 1882년 조·청 양국이 체결한 조·청상민수륙무역 장정을 위반했고, 그래서 윤선에 태워 조선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청나라에 입국한 경위도 흥미롭지만 그가 체포된 지역이 가욕관이라는 게 더더욱 흥미롭다.
 
옥문관 인근 하창고성. [사진 윤태옥]

옥문관 인근 하창고성. [사진 윤태옥]

문초운은 어떻게 사행단에 동반했을까. 조선의 사행단은 무역도 병행했다. 역관들이 무역을 담당했는데 자신들이 직접 하거나 상인들을 대동했다. 주요 수출품은 홍삼이었다. 채취에 의존하던 산삼은 조선에서 18세기 중후반 가삼(家蔘)으로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가공하여 홍삼으로 만드는 제조기술도 함께 발전했다. 홍삼은 가볍고 보관이 용이한데다 가격이 비싸 무역에서는 조선 최고의 상품이었다.
 
문초운이 베이징에서 병을 이유로 잔류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경위로 가욕관까지 갔는지는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다. 상인이니 당연히 더 큰 이익을 기대했을 것이다. 이동 거리로 봐서는 괴나리봇짐에 홍삼 몇 뿌리 넣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눈에 뜨이는 우마차 행렬도 아니었을 것 같다. 관헌에 적발될 정도였다면 아마도 등짐 머슴 두셋 정도는 대동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상상해 보면 대단한 상인이라 할 수 있다.
 
 
문초운, 외국인 신분으로 엄청난 도전
 
조선 상인 문초운은 전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그가 무허가 장사로 걸린 가욕관 너머의 신장은 조선과는 심각하고 밀접하게, 그것도 치명적인 위험으로 결부되고 있었다. 1864년 신장에서 반청 농민반란이 일어나자 러시아와 밀접한 카자흐족 키르기스족 등에 적지 않은 동요가 발생했다. 이를 핑계로 러시아는 1871년 신장의 이리(伊犁) 지역을 점령해 버렸다.
 
농민반란과 러시아 침입에 대해 청나라 조정은 국가의 전략적 선택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제한된 국력을 서북변경 방어(邊防)에 우선 투입할 것인가, 동남해안을 우선 방어(海防)할 것인가. 청나라는 변방에 방점을 찍고 좌종당(左宗棠)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해 1875년 신장 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좌종당은 진압에 성공했고 신장에 대한 청조의 통치력을 회복했다. 이리를 강점했던 러시아는 반환협상을 해야 했지만 협상이 순조로울 리가 없었다.
 
중국기행

중국기행

이때 청나라 주재 영국 공사 케네디는 러시아가 해군이 기동하여 청나라를 선제공격할 것으로 예상했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다. 러시아 해군의 첫 번째 공격대상은 청나라 영토가 아닌 조선의 원산 주변(Port Lazareff, 함경남도 영흥만)이란 것이다. 영국 공사가 본국에 보고한 정세 판단 기밀자료가 공개되면서 확인된 사실이다. 남의 나라의 멀고 먼 변방에서 발생한 청-러 갈등이 조선 영토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돌출하다니. 당시 조선의 국제정치적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조선상인 문초운은 자기 사업을 위해 가욕관까지 진출했다. 상인으로서의 직업적 의욕은 대단했고 외국인 신분으로 엄청난 도전이었다. 이에 반해 조선의 집권층은 어땠는가. 당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원산 일대를  공격당할 수도 있다는 긴박한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이나 하고 있었을까. 이미 열강의 제국주의 전쟁에서 누구나 침탈할 수 있는 먹잇감이었을 뿐이니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안으로는 권력과 재부를 독점하여 나라를 중병에 들게 했고, 정권 유지를 위해서 이 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가 저 나라에 기댔다가를 반복했으니 상인 문초운과도 비교할 것 없는 처지가 아니었을까.
 
역사는 반복된다. 19세기 후반이나 21세기 오늘날이나 국제정치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이 130여 년 전이라고 한담에 얹어둘 수 있을는지 돌이켜 보자. 2019년 오늘날 우리의 운명이 관련된 중대한 담판에 당사자로서 정당한 발언권을 제대로 행사하고 있는가. 아니면 19세기 조선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담판 대상일 뿐인가.
 
윤태옥 중국 여행객
중국에 머물거나 여행한 지 13년째다. 그동안 일년의 반은 중국 어딘가를 여행했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경계를 걷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엠넷 편성국장, 크림엔터테인먼트 사업총괄 등을 지냈다. 『중국 민가기행』『중국식객』『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중국에서 만나는 한국 독립운동사』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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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