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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대기자의 퍼스펙티브] 주류 정당이 극단적 선동가와 손잡을 때 민주주의 무너져

세계 민주주의 위기론
미국에서 러시아, 터키에서 헝가리, 베네수엘라에서 필리핀, 영국에서 폴란드까지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이상 징후를 보이고 있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선동가형 정치인들이 득세하고, ‘스트롱맨’으로 일컬어지는 신(新)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이 늘고 있다. 흑백논리로 편을 갈라 상대편에 분노의 화살을 쏘아대고, 그걸로 표를 얻는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도처에서 힘을 얻고 있다. 상대를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지 않는 정치적 양극화 현상이 심화하면서 대화와 타협에 기초한 민주주의가 기능 부전(不全) 증세를 보이는 곳도 많다. 정보통신기술(ICT)의 발전이 정부와 국민의 원활한 소통에 기여하기보다 오히려 방해하는 역설도 나타나고 있다. 공화주의와 자유주의에 기반한 자유 민주주의는 정녕 위기를 맞은 것인가.
 
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부설 기관인 EIU(Economist Intelligence Unit)는 매년 세계 ‘민주주의의 지수(Democracy Index)’를 발표한다. 선거의 공정성, 정부 기능, 정치 문화, 정치 참여, 시민적 권리 등 5개 항목에 걸쳐 각국의 민주주의 실태를 평가해 10점 만점 기준으로 지수를 산정한다. 세계 민주주의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는 연례 검진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초소형 미니 국가를 제외하고, 세계 167개국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이 검진에서 8점이 넘는 점수를 받은 나라는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된다. 나무랄 데 없는 수준의 건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6점을 초과해 8점까지는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된다.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그만하면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는 나라들이다. EIU 지수에서 최소 6점이 넘는 점수를 받아야 민주주의 국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에 못 미치는 나라들은 ‘혼합체제’(4~6점) 혹은 ‘권위주의’(4점 이하) 국가라는 불명예 딱지가 붙는다.
 
2018년 EIU 보고서에 따르면 완전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는 나라는 20개국이다. EIU가 민주주의 지수를 처음 발표한 2006년 당시의 27개국보다는 7개국이 줄었다.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는 55개국으로, 2006년(54개국)과 거의 같다. 그 둘을 합한 민주주의 국가가 12년 전 81개국에서 지난해 75개국으로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 갖고 세계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고 말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여전히 전 세계 국가의 절반에 가까운 46%가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고, 인구로 따져서도 세계 인구의 거의 절반 수준인 48%가 민주주의의 혜택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의 독재 국가라고 할 수 있는 권위주의 국가의 수는 2006년(54개국)이나 지난해(53개국)나 거의 차이가 없다. 지난 10여 년 사이에 갑자기 권위주의 국가가 크게 늘어난 것도 아니고, 민주주의 국가가 크게 줄어든 것도 아니다. 적어도 수치만 놓고 보면 세계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말할 근거가 빈약하다.
 
그럼에도 세계 민주주의의 건강 상태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민주주의 연구의 권위자로,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도널드 트럼프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두 사람은 지난해 출간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란 책에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공직 경험이 전혀 없고,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존중할 의사가 보이지 않는, 독단적 성향이 뚜렷한 인물이 대통령으로 선출됐다”며 “지금 미국 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가장 성공적인 민주주의의 쇠퇴와 붕괴를 경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 민주주의의 모범이자 보루, 전도사였던 미국의 민주주의에 구멍이 뚫리면서 세계 민주주의 위기론에 불이 붙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트럼프의 등장은 EIU 지수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2016년 EIU 민주주의 지수 순위에서 미국은 21위(7.98)를 기록하면서 처음으로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로 강등됐다. 지난해에는 더 내려가 25위(7.96)까지 밀려났다. 한국이나 일본보다 낮은 순위다. 2006년 첫 조사 때 17위(8.22)를 차지했던 것에 비하면 무려 8단계나 순위가 떨어진 셈이다.
 
트럼프의 집권 배경으로 흔히 지적되는 것이 기득권층에 대한 소외 계층의 분노와 반감이다. 세계화와 신(新)자유주의의 혜택에서 비켜난 저학력, 미숙련, 저소득 계층이 갈수록 심화하는 경제·사회적 양극화에 울분을 터뜨리며 아웃사이더 선동가에 표를 던진 결과라는 것이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인 ‘브렉시트(Brexit)’도 같은 배경에서 일어났고, 유럽 각국에서 극우 또는 극좌파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세력을 넓히고 있는 것도 그래서라는 것이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 구조에서 살아남은 소수와 탈락한 다수 사이의 불평등과 격차가 커지면서 자유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토대인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 빈곤층으로 전락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은 한계에 부닥친 재정 능력 때문에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 극단주의적 선동가들이 득세하기에 딱 좋은 조건이고 환경이다. 미국이나 유럽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 현상이다.
 
선동가형 정치인들은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한다. 계층, 이념, 인종, 종교를 중심으로 편을 갈라 모든 잘못의 근원은 상대편에 있다고 주장한다. 기성 정치인들을 비(非)민주적이고 비애국적인 자들로 매도하고, 자신만이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부패한 엘리트 집단을 몰아낼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 달콤하고 통쾌한 감언이설(甘言利說)로 표를 모아 일단 집권에 성공하고 나면 선동가는 본색을 드러낸다. 사법부를 자신의 입맛대로 바꿔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고, 언론과 시민단체를 매수하고, 정치 게임의 규칙을 바꿔 자신에게 유리하게 운동장을 기울인다.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잠재적 독재자가 민주주의 제도를 합법적으로 활용해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은 민주주의의 최대 역설이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폴란드의 야로슬라프 카친스키,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보여줬거나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다. 이민자와 언론을 적(敵)으로 돌리며 민주주의를 짓밟고 있는 트럼프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선동에 넘어가 민주주의 파괴자를 지도자로 선출한 책임을 국민에게 물을 수 있을까. 그보다는 잠재적 민주주의 파괴자를 걸러내지 못한 정당과 그 지도자들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다고 래비츠키와 지블랫 교수는 말한다. 그들이 민주주의의 문지기 역할을 제대로 못 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잠재적 민주주의 파괴자를 가려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두 사람은 네 가지 감별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말과 행동으로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는지, 경쟁자의 존재를 부정하는지, 폭력을 용인 또는 조장하는지, 표현의 자유 등 시민적 기본권을 억압하는지 유심히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도표 참조> 이 중 한 가지라도 양성반응을 보인다면 잠재적 민주주의 파괴자로 판단하고 미리 솎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잠재적 민주주의 파괴자를 후보로 공천하는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극단주의적 선동가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서는 정당 지도자들의 결단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이 당내 주류가 되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당내 경선에서 배제하고, 그에 대한 지지와 연합을 거부해야 한다. 필요하면 다른 당의 민주주의 후보와 연대해서라도 그런 사람이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주류 정당이 두려움과 기회주의, 혹은 판단 착오로 인해 극단주의적 선동가와 손을 잡을 때 민주주의는 탈선하고, 붕괴된다. 지난 대선에서 미국의 공화당이 저지른 잘못이고, 트럼프가 집권한 요인이다.
 
스마트폰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민주주의에 축복이면서 저주다. 잘 쓰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는 효과적인 소통의 도구일 수 있지만, 잘못 쓰면 민의를 조작하거나 왜곡하는 선전선동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인공지능(AI)이 생산하는 가짜 뉴스와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까지 똑같이 조작하는 ‘딥 페이크(deep fake)’ 기술은 한 국가는 물론이고 전 세계를 순식간에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 양날의 칼이 된 디지털 기술은 21세기 민주주의가 직면한 또 하나의 도전이다.
 
2018년 EIU 민주주의 지수에서 한국은 21위(8.0)를 기록했다. 한때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완전한 민주주의와 결함 있는 민주주의의 경계에 서 있다. 그래도 아시아 국가로는 최고 순위다. 그렇다고 안심할 건 아니다. 갈수록 심화하는 경제·사회적 양극화가 한국 민주주의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극단주의적 선동가형 정치인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정치인과 기업, 관료, 판·검사, 경찰, 학계, 언론, 폭력조직이 공생하는 권력 중심의 카르텔 구조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역기능도 심각하다.
 
헌법 원리에 따른 견제와 균형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그러나 제도만으로 민주주의는 보장되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건강을 유지하려면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 헌법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레비츠키와 지블랫 교수는 거듭 강조한다. 정당이 상대 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 관용의 정신이 첫 번째 규범이고, 제도적 권한을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자제의 정신이 두 번째 규범이다. 이 두 가지 규범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정치는 당파 싸움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민주주의는 무너진다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 됐을 때 공화당 인사들은 민주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하기 위해 이 두 가지 규범을 저버렸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트럼프 정부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하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다.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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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