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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인 것 같은데 강간 아닌···'그런 성폭력' 쏟아진다

“전 ‘처음 보는 남자와는 안 잔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는데 그 남자가 싫다는 저를 강제로 눕혀서…”
“그녀는 말로는 안 한다고 했지만 제가 스킨십을 시도하는데도 가만있더군요. 좋으면서 싫은 척 하는 거라 생각했죠. 이제 와서 강간이라뇨.”
 
지난 2016년, 40대 남성 A씨는 채팅 어플로 만난 30대 여성을 모텔에서 성폭행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았지만 무혐의 처분됐다. 해당 여성이 자발적으로 모텔로 들어간 점 등이 드러나면서다. 그러자 A씨는 역으로 여성을 무고죄로 고소했고, 3번의 재판 끝에 여성은 무죄를 인정받았다.

 
동의 없었지만 강간은 아닌 성폭력 쏟아진다
당시 재판에서는 성관계의 강제성을 두고 양측의 공방이 벌어졌다. 법원에서 인정된 사실만 나열하면 이렇다. 여성은 모텔에 들어가기 전에도, 들어오고 나서도 소극적으로 임했다. A씨가 스킨십을 시도하자 여성은 거부 의사를 밝혔다. 다만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는 않았고 남성은 이를 ‘그린 라이트’라 여겨 멈추지 않았다. 이 경우 남성은 여성의 동의를 얻은 걸까, 아니면 여성이 강간을 당한 걸까?
 
법원은 둘 다 아니라고 봤다. 1심은 “합의된 성관계”라며 남성의 손을 들어줬지만 2심은 이를 뒤집었다.
 
2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다소의 강압이 수반된 상태에서 내심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가졌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면서도 “여성이 A씨로부터 극도의 폭행이나 협박이 수반된 강간을 당한 건 아니다”고 했다. 명백한 강간도, 명백한 동의도 없었다고 본 것이다. 지난해 7월 대법원도 2심 판단이 맞다고 확정지었다. 양측 모두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

 
현행 강간죄는 ‘명백한 강간’만을 처벌
현행 강간죄는 폭행이나 협박을 통해 성폭행만을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연합뉴스]

현행 강간죄는 폭행이나 협박을 통해 성폭행만을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 형법은 명백한 강간만을 처벌하도록 강간죄의 범위를 좁게 해석하는 ‘최협의설’을 따른다. 형법 제297조는 ‘상대방을 현저히 곤란하게 만드는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을 통해 성폭행을 했어야 강간죄로 규정한다. 피해자가 극렬히 저항하지 않고, 싫은 의사를 내비치는 정도로는 현저히 곤란한 상황이었다고 인정되기 어렵다.

 
문제는 현실에서는 ‘동의하진 않았지만 강간은 아닌’ 중간지대의 성폭력 사건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17 상담 통계 및 상담동향 분석에 따르면 그 해 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124건 중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밝혔으나 강간죄로 처벌하지 않은 사례가 54건(43.5%)이었다. 피해자가 울기만 할 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은 경우 등이 해당한다.
 
지난해 부하 여군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해군 장교 2명은 실형을 선고한 1심을 뒤집고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폭행과 협박을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 이유였다.

 
비동의 간음죄 도입이 해결책일까
  이 40%에 달하는 강간죄의 사각지대를 처벌하자며 나온 게 ‘비(非)동의 간음죄’ 도입 움직임이다. 폭행이나 협박 등이 없었더라도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모든 성관계를 처벌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한인섭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서울대 법대 교수)은 2007년 성폭력상담소가 발간한 ‘대법원 판례 바꾸기’ 자료집에 실린 기고문에서 “재산 범죄의 경우 폭행 또는 협박으로 재물을 취득하면 강도죄로, 폭행 없이 의사에 반하여 재물을 취득하면 공갈죄로 단계화해 처벌한다”며 “그런데 성폭력은 공갈죄에 상응하는 범죄를 별도로 처벌하는 규정이 없어 대법원이 성폭력을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며 최협의설 폐지를 주장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방식은 다양하다. 현행 강간죄 규정에서 폭행ㆍ협박 요건을 삭제하고 ‘상대방 의사에 반하는 성관계’로 바꾸는 방안이 거론된다. 지금의 강간죄는 그대로 두고 더 낮은 형량의 비동의 간음죄를 신설하는 방안도 있다. 현재 총 9건의 형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되어있다.
 
‘비동의’ 기준을 무엇으로 잡느냐로 들어가면 더욱 복잡해진다. 독일 등에서 적용하는 노 민즈 노(No means No) 룰은 상대방이 한 번이라도 거절 의사를 밝혔다면 강간으로 처벌한다. 예스 민즈 예스(Yes means Yes) 룰은 나아가 상대방이 명시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모든 성관계를 강간으로 처벌한다. 미국 일부 주에서 적용 중이고 지난해 스웨덴에서도 이를 담은 법안이 통과됐다.
 
동의의 책임은 남성에게만? 과잉 처벌 우려도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다. 성관계의 특성상 어디까지가 동의이고 거부인지 명확히 재단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1992년 미국 뉴저지주 대법원의 ‘M.T.S 판결’이 대표적이다. 십대 소년이 여자친구와 합의하에 침대에서 입맞춤 등을 교환하다가 동의없이 성관계로까지 나아가 유죄를 받은 사건으로, 당시 미국 내에서도 처벌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서울대 법대 교수 시절인 2003년 출간한 ‘형사법의 성편향’ 개정판을 통해 “묵시적 동의나 조건부 동의 등 동의와 거절 사이의 회색지대가 존재한다”며 비동의 간음죄 도입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그는 “남성에게 성교 추구 전 상대방의 명시적, 확정적 동의를 증거로 확보하라고 요구하는 셈”이라며 “성교가 범죄로 처벌되는 과잉범죄화 폐해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항소심에서 법정 구속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경우 판결문에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라는 표현이 16차례에 걸쳐 적시됐다. [연합뉴스]

항소심에서 법정 구속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경우 판결문에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라는 표현이 16차례에 걸쳐 적시됐다. [연합뉴스]

 
남성들이 느끼는 ‘무고의 공포’는 외면할 수 없는 수준이다. 지난해 무고죄 특별법을 제정해달라는 청와대 청원에 24만 명이 동의했고, ‘곰탕집 성추행’으로 구속된 남성의 아내가 억울하다며 올린 청원엔 33만 명이 동의했다.
 
실제로 성범죄 관련 고소·고발이 늘어날 거라는 분석도 나온다. 신진희 변호사(대한법률구조공단 피해자 국선 전담)는 “직설적인 화법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 문화에서 만일 남녀가 성관계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였다가 상대방이 이를 성희롱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며 “외국의 비동의간음죄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논란 속에서 사법부는 강간죄의 인정 범위를 점차 넓혀나가는 추세다. 대법원은 지난달 손님을 기습적으로 성폭행한 남성 마사지사에게 유죄를 선고하며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저항하지 않아도 강간죄가 성립한다”고 밝혔다. 여성과 옥상에 올라가 스킨십을 나눈 뒤 동의 받지 않고 성관계를 한 20대 남성도 지난해 항소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미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2심 판결에서 ‘비동의 간음’ 개념이 일부 적용됐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항소심 재판부는 판결문에 ‘의사에 반하여’라는 표현을 16차례에 걸쳐 사용하면서 안 전 지사와 김지은씨의 성관계에 명시적 합의가 없어 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박사라 기자 park.sa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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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