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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인간의 욕구를 통제한다고? 금주령 실패한 영조의 탄식

 “술을 빚은 자는 섬으로 유배를 보내고, 술을 사서 마신 자는 영원히 노비로 소속시킬 것이며, 선비 중 이름을 알린 자는 멀리 귀양 보내고, 일반인들은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수군(水軍)에 복무하게 하라” (『영조실록』, 영조 32년 10월 20일)
 
조선 영조는 그 누구보다 엄격한 금주령을 시행한 왕으로 유명합니다. 앞서 몇 차례 좌절을 맛본 영조는 수개월 간 논의를 거쳐 32년(1756년)부터 강력한 금주령을 내놓고 음주의 뿌리를 뽑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금주령이 실시된 조선은 어떻게 됐을까요?
 
신윤복의 '주사거배(酒肆擧盃)' [중앙포토]

신윤복의 '주사거배(酒肆擧盃)' [중앙포토]

1년이 지난 뒤 영조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금주(禁酒)를 한 지 일주년이 되는 날이다. 금주를 어겨 섬으로 유배된 자가 700여 명이나 되는데, 모두 풀어주도록 하라.” (『영조실록』 33년 10월 24일)
금주령을 실시한 지 1년간 술을 빚다가 잡혀 섬으로 귀양을 간 사람이 700명에 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술을 마시다가 잡힌 자가 몇 명인지는 얼마인지 나오지 않지만, 술을 빚은 700명보다는 훨씬 많았겠지요. 당시 인구수를 참작하면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조선에서 음주를 바라보는 이중적 시선
추석인 24일 경북 칠곡군 귀암 문익공 이원정(李元禎) 종택 13대 종손 이필주((75·가운데)씨가 추석 차례를 지내고 제관들과 음복하고 있다. [뉴스1]

추석인 24일 경북 칠곡군 귀암 문익공 이원정(李元禎) 종택 13대 종손 이필주((75·가운데)씨가 추석 차례를 지내고 제관들과 음복하고 있다. [뉴스1]

술에 대한 조선의 태도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이었습니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술에 대해 억압적인 문화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술의 영향력이 사회 전반으로 확대된 것은 조선의 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리학을 신봉했던 조선은 국가 의례나 조상 제사 등을 중시했는데, 이 과정에는 반드시 술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고려 시대엔 차를 선호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한데 모여 음주가 아닌 음다(飮茶), 즉 차 마시기를 즐겼다는 기록이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이런 음다가 조선에 와서 성리학의 주례(酒醴)에 따라 음주로 대체된 셈이지요.
 
LG 트윈스 'LG시즌 승리 기원제'가 2015년 3월 26일 잠실야구장에서 진행됐다. 박용택이 기원제 고사를 지내고 난 후 이진영 주장과 함께 홈플레이트에 음복주를 뿌리고 있다. [강선아 기자]

LG 트윈스 'LG시즌 승리 기원제'가 2015년 3월 26일 잠실야구장에서 진행됐다. 박용택이 기원제 고사를 지내고 난 후 이진영 주장과 함께 홈플레이트에 음복주를 뿌리고 있다. [강선아 기자]

하지만 한 편으로는 농업 사회인 조선에서 음주는 경계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흉년이 오면 조정에서는 늘 금주령을 내렸습니다. 곡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술을 빚다간 식량 수급이 곤란해져 민심이 흉흉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무역 등 상업 활동을 활발히 했던 고려에 비해 조선은 농업 의존도가 훨씬 높았습니다. 따라서 흉년은 더욱 치명적이었을 것입니다. 정부가 술 생산에 대해서 더 민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과도한 음주 때문에 예도(禮道)가 무너지는 사례들에 대한 경고와 자숙의 차원에서도 금주령이 내려지곤 했습니다.
 
태종, "생원시에 합격하면 3일간은 음주를 막지 말라"
그렇지만 조선 전기엔 금주령이 그다지 엄격하진 않았습니다. 금주령이 내려지고 해제되기를 반복했지만 내려지더라도 ‘구멍’을 만들어 둬 빠져나갈 틈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 첫 금주령은 태조 2년(1393년)에 확인되는데 왕실 행사나 일월성신에 올리는 제사 등 예외조항을 많이 뒀음에도 고작 일주일 만에 해제됐습니다. ‘중국 사신이 와서 접대해야 한다’는 외교 문제와 ‘날씨가 춥다’는 이유였습니다. 당시엔 술이 주요 방한(防寒) 도구였던 것이죠.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성계 [사진=KBS]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성계 [사진=KBS]

어쩌면 한반도에서 최북단인 두만강 일대에서 기반을 닦은 이성계 집안의 내력이 작용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태조는 음주에 대한 처벌에 대해서도 “무릇 사람으로서 병이 있는 자는 혹여 술을 약으로도 마시게 되는데 일괄적으로 명령을 어겼다고 죄를 가하는 일이 옳겠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한술 더 떠 금주령 기간에 “생원시 합격자 발표 후 3일 동안은 술을 금지하지 말라”는 특별 명령을 내립니다. 생원시는 과거의 가장 기초단계인데,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대입 수능 정도가 되겠지요. 예나 지금이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은 마음껏 놀 수 있는 해방의 시공간이었던 모양입니다.
 
KBS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한 장면 [사진=KBS]

KBS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한 장면 [사진=KBS]

생원시 합격 발표 후 3일간 술을 마셔도 된다는 태종의 근거는 이랬습니다.
“새로 들어온 생원을 축하하는 것은 오래된 풍속이니, 3일 동안은 하고서 그침이 마땅하다.” (『태종실록』, 태종 17년 2월 16일)
그러고보면 선죽교 테러나 1·2차 왕자의 난으로 그런 이미지가 많이 희석됐지만 이방원 자신이 성균관 출신에 문과를 급제한 엘리트 출신이긴 했습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영조는 왜 금주령에 집착했을까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중앙포토]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중앙포토]

이처럼 금주령은 조선에서 특별한 이벤트는 아니었지만 대개 1~2년을 넘지 않았고, 적용도 느슨했습니다. 또 흉년에 대비한 경제적 요인에 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강력한 처벌과 10년간 이어진 영조 32년의 금주령은 특수한 사례였습니다.
 
여기엔 여러 가지 배경이 있겠지만 일단 영조가 매우 검소하고 자기 절제에 충실한 군주라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조선 27명의 왕 중에서 ’근검절약‘에 가장 힘쓴 왕으로 꼽혀도 손색이 없습니다. 83세에 사망한 그는 자신의 장수비결로 ’채식과 적게 먹는 습관‘이라고 꼽았을 정도였습니다. 
 
신윤복의 그림 '유곽쟁웅(遊廓爭雄)'

신윤복의 그림 '유곽쟁웅(遊廓爭雄)'

이렇게 절제된 모습을 갖추려 한 데는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도 작용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궁녀의 소생으로 알려져 있는데, 최근 연구에선 궁녀보다도 신분이 낮은 각심이(궁녀의 몸종)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혈통 문제에 대해 민감했는데, 행여나 사대부들에게 얕보이진 않을지 경계도 많았다고 합니다. 영조가 얼마나 신분 문제에 대해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지 반영된 일화도 있습니다. 영조는 정성왕후와 평생 사이가 안 좋았는데, 신혼 첫날밤 영조가 “손이 참 곱소”라고 말을 건네자 정성왕후가 “귀하게 자라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그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죠.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중 영조의 생모 최무수리(한승연) [사진=SBS]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중 영조의 생모 최무수리(한승연) [사진=SBS]

그런 만큼 영조는 자신에 대해 엄격하려 했고, 금주령 같은 법안도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밀고 나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태조 때의 전례를 떠올리며 “중국 사신이 오면 술을 대접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냐”는 신하들의 걱정에 영조는 “우리의 특별한 사정을 잘 설명하고, 감주(甘酒)로 드려라”는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술을 빚다가 갇힌 죄수가 무려 100여인입니다" 
조선 후기 화가 유숙이 그린 ‘대쾌도( 大快圖)’의 일부. 씨름을 구경하던 일부 관객이 외곽에 마련된 술판으로 가고 있다. [중앙포토]

조선 후기 화가 유숙이 그린 ‘대쾌도( 大快圖)’의 일부. 씨름을 구경하던 일부 관객이 외곽에 마련된 술판으로 가고 있다. [중앙포토]

이 같은 왕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영조가 “모두 풀어주도록 하라”고 명을 내린 날(영조 32년 10월 20일)로부터 불과 한 달 뒤에 형조판서(지금의 법무부 장관) 김상익이 “금주령을 어겨 술을 빚다가 갇힌 죄수가 무려 100여 인에 달합니다”라고 보고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영조의 반응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만 아마도 큰 한숨을 쉬지는 않았을까요.  
 
영조는 이때 엄벌이 능사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1년 전에 비해 처벌 수위를 확 끌어내리기 때문입니다.  
“선비는 10년을 관직 임명될 수 없도록 하고, 유생(儒生)은 10년 동안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없도록 하며, 서민과 천인들은 10년 동안 종으로 삼되, 술을 빚은 자나 마신 자는 같은 법으로 다스려라” (『영조실록』 33년 10월 24일)
 
김홍도의 풍속화 중 '주막'

김홍도의 풍속화 중 '주막'

사실 금주령은 실효도 없었던 데다 예상치 못한 부작용도 발생했습니다.  
왕이 사는 서울 중심가에선 금란방(禁亂房)이라는 밀주를 만들어 파는 비밀 공간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관리들은 이곳을 봐주는 대가로 돈을 받거나 심지어 직접 운영까지 하는 등 1920년대 금주령 시대의 시카고 마피아 뺨치는 부정부패 커넥션이 발각되기도 했습니다.  
 

'https' 차단하고 아이돌 외모를 규제? 
조선 영조 때의 금주령 해프닝은 최근 정부가 내놓은 두 가지 규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불법 성인ㆍ도박 사이트를 막겠다며 https 차단을 꺼내 들었던 것이나 여성가족부가 외모지상주의를 문제 삼으며 아이돌 외모 규제 가이드라인을 내놓은 것입니다. 두 사건은 서로 다른 기관이 벌인 일이지만 기저에는 인간의 욕망과 감정을 정부가 도덕적 기준으로 통제하겠다는 발상이 공통으로 깔려 있습니다.  
 
트와이스 'what is love'의 한 장면

트와이스 'what is love'의 한 장면

반발이 거세지자 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은 지난달 21일 “국민과 소통이 부족했다”며 사과했지만, 방통위 측은 “기존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차단됐던 불법 사이트들이 최근 하나둘 열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실 http를 차단했을 때도 이용자들은 우회 접속 등의 각종 꼼수를 이용했기 때문에 ‘접속 차단’이라는 정부의 목표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단지 접속 단계의 불편을 감수하느냐의 문제였을 뿐이라는 것이죠. 한편 여가부의 아이돌 외모 규제는 여론의 질타를 맞고 진선미 여가부 장관이 사과한 뒤 슬그머니 집어넣은 것 같습니다.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 [연합뉴스]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 [연합뉴스]

두 사건으로 인해 정부는 예상치 못한 ‘빅브라더’ 논란까지 휘말렸으니 명분도 실리도 잡지 못한 셈이 됐습니다. 안 그래도 떨어지던 20대 (특히 남성) 지지율을 회복하기란 당분간 난망한 일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영조의 금주령은 어떤 결말을 맞았을까요. 영조의 출구 전략이 꽤 흥미롭습니다.  

영조 43년 1월 영조는 제사를 지내러 종묘에 갔습니다. 그러면서 감주 대신 ’진짜‘ 술을 올리도록 합니다. “건강을 보존할 수 있도록 보살펴 준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토록 엄격하게 다스렸던 금주령을 거두어들인 명분으로선 군색했지만, 모두가 좋았던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쓰윽 지나갔습니다. 영조의 정치력이라고나 할까요. 조선을 요란하게 흔들었던 금주령은 이렇게 11년 만에 조용히 지워졌습니다.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중앙포토]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중앙포토]

 
이 급작스러운 반전에 대해선 학계에서도 ’미스터리‘로 여기고 있습니다. 영조가 금주령을 폐지한 이유가 어느 곳에서도 나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록에도 별다른 설명은 없습니다. 아마도 누구도 이 문제를 재론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골치 아픈 문제를 굳이 끄집어내지 않고 봉인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봤기 때문이겠죠. 단지 3년 뒤 한 사관은 금주령 시대를 되돌아보며 담담히 전할 뿐입니다.  
“혹자가 말하기를 ’술의 폐해가 병자년(영조 31년ㆍ금주령 1년 전을 가리킴)보다 심하다 하였다…(왕은) 형조에 명하여 술을 빚는 자를 처벌하고 주점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마침내 능히 금할 수 없었다.” (『영조실록』, 영조 46년 1월 26일)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박진 『朝鮮時代 禁酒令과 減膳의 정치적 활용』, 이정수 『16세기의 禁酒令과 儉約令』, 김준혁 『조선시대 선비들의 탁주(濁酒) 이해와 음주문화』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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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