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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익숙해지면 지는 거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998년 8월 31일 대포동 미사일 1호가 발사됐을 때 코스피 지수는 310.67로 마감했다. 전날보다 5.37포인트가 올랐다. 그 후로도 패턴은 반복됐다. 북한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반복했고, 서울은 평온했다. 외신들은 한국을 ‘안보 불감증에 걸린 이상한 나라’ 취급했다. “한국 증시는 되레 올랐고, 시민들은 평온했다”는 내용이 서울발 단골뉴스가 됐다. 하기야 전쟁을 하겠나, 조공을 바치겠나, 달리 뾰족한 해법도 없었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다. 결과는 누구나 안다. 북한은 핵보유국이 됐다. 그렇게 우리는 뼈아픈 교훈 하나를 배웠다. 익숙해지면 지는 거다.
 
이번엔 미사일 대신 미세먼지다. 이미 국민은 익숙해지고 있다. 마스크는 일상이 됐고, 용각산이 다시 팔린다. 공기청정기와 목에 좋다는 미나리가 인기다. 2년 전 “아이 대신 미세먼지를 다 마시고 싶은 심정”이라던 대통령의 진정성도 시들해졌다. 미세 먼지가 극심해질 때 간혹 “정부가 손 놓고 있다는 소리까지 들어서 되겠나”며 장관들 질책하는 게 고작이다. 이번 미세먼지 재앙 때도 대통령은 5일 만에야 “(필요하면) 대통령과 총리의 힘을 적극 이용하라”며 “공기 정화기 보급 방안을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그것도 환경부 장관에게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다. 미세먼지로 인한 조기 사망자만 2015년 1만2000명에 달한다. 세월호 참사 7시간 뒤에 나타나 “인력과 장비를 총동원해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고 했던 전임 박근혜 대통령의 뒷북 지시, 안전 불감증과 뭐가 다른가.
 
국민 분노도 폭발하고 있다. 환경재단 이미경 이사는 “목숨 걸고 시위하겠다. 국민 분노를 끌어내겠다. 그래야 바꿀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책임지지 않는 대한민국에 분노한다고 했다. 대통령은 환경부 장관에게, 환경부 장관은 시·도지사에게 미룬다. 도대체 국민은 누구에게 따지고 물어야 하나. 이럴 때일수록 대통령이 앞장서야 한다. 우선 진정성부터 보여야 한다. 쉬운 방법이 있다. 탈원전 폐기 선언이다. 미세먼지의 3번째 주범(15%)이 석탄화력 발전이다. 국민은 원전(54.9%)보다 미세먼지(82.5%)를 더 무서워한다. 석탄화력을 줄이고 원전 가동을 늘리는 게 답이다. 애초 미세먼지 30% 감축과 탈원전은 같이 갈 수 없는 사이다. 문재인 정부의 로드맵에 따르면 2030년이 돼도 석탄화력발전(33%→31%)은 별로 줄지 않는다. 오죽하면 SNS상에 “북한 석탄 수입하려고 석탄화력발전소를 안 없앤다”는 황당한 말까지 나돌겠나. 아예 석탄화력은 모두 폐기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미세먼지야말로 탈원전 도그마에서 벗어나는 좋은 출구전략이 될 수 있다.
 
대선 공약이라고 신성 불가침한 것도 아니다. 광화문 대통령 시대 공약도 무르지 않았던가. 대통령 스스로도 “비상시기에는 비상한 조치를 하는 게 정부의 책무”라고 말하지 않았나. 지금이 바로 비상시기다. 이미 여권에서도 운을 뗐다. 지난해 송영길 의원은 “미세먼지 주범인 화력발전소를 퇴출하고 신한울 3·4호기와 스와프하자”고 제안했다. 못 이기는 척 송 의원 손을 잡아주면 될 일이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한국전력의 적자를 줄이고 전기요금 인상 걱정을 더는 건 덤이다.
 
탈원전 폐기는 중국과의 협상에도 유리하다. “국민 분노가 워낙 커 핵심 대선 공약까지 포기했다”며 중국발 미세먼지 감축을 강하게 밀어붙일 명분을 준다. 한 걸음 더 나가 국민에 인내와 희생을 요구할 수 있다. “탈원전 공약마저 접는 비상한 각오”의 대통령이 국민의 분노를 뒤에 업고 “불편해도 참아달라”는데 누가 토를 달겠나. 중국 탓도좋지만 우리부터, 대통령부터 할 것을 다 해야 한다. 쉽지 않고, 효과도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익숙해지면 지는 거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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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