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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너희 집에 가니? 냉정했던 아버지의 속마음

기자
한순 사진 한순
[더,오래] 한순의 시골 반 도시 반(3)

삼십 대 초반부터 책을 만들기 시작해 편집자 생활 30여 년이 되어갈 무렵 막연히 시골로 가고 싶다는 몸과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 붓고 있던 생명보험을 해약해 경기도 양평 골짜기에 땅을 사 아틀리에를 짓고 시골 반, 도시 반 생활을 시작했다. 문을 나서면서부터 지출을 해야 하는 도시생활과 돼지고기 1근이면 푸성귀를 뜯어 풍요로운 며칠을 지낼 수 있는 시골 생활을 소개한다. 책을 만들면서 이데아와 관념이 커진 머리와 한없이 굼떠진 몸이 부딪히는 시골 생활, 활자로 구축된 세상과 이름 모르는 꽃이 깨우쳐주는 우주의 울림을 통해 삶을 통찰하는 이야기를 전한다. <편집자>

 
시골집 창가에 앉아 비 오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같이 서 있어도 서로 이질적인 재료들로 따로 놀던 바깥 풍경이 촉촉한 안개비에 한 덩어리로 뭉개진다. 엷은 안개를 몸에 감은 나무는 내리는 비에 겉만 젖은 것이 아니라 이미 몸속도 한껏 물을 빨아올리고 있다.
 
옛 어른들은 죽을 운을 맞은 해에 집을 짓는다고 했다. 그만큼 집을 짓는 일은 몸도 마음도 돈도 어려운 상황을 많이 맞이했다. 어찌어찌 우여곡절 끝에 근 1년이 걸려 집을 완성했을 때, 그 기쁨은 뭐라 형언할 수가 없었다.
 
지독히 성실하게, 위가 내려앉을 정도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서 이런 집을 가질 수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남편과 나는 집 주변을 돌며 이쪽에서도 사진을 찍고 저쪽에서도 사진을 찍고, 나무 한 그루를 집어넣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저 멀리 집과 떨어진 숲속에서 우리 집을 찍어 보기도 했다.
 
나무생각 아틀리에 풍경. [사진 진효숙]

나무생각 아틀리에 풍경. [사진 진효숙]

 
그러다 문득 이 집을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망설임 없이 떠오른 사람은 돌아가신 아버지였다. 나는 50이 넘은 지금도 아버지 품의 구수한 담배 냄새를 기억한다. 사춘기가 될 때까지도 내가 감기에 걸려 편도선이 부으면 아버지는 오렌지를 사 오고 다 큰 나를 업고 방 안을 서성이곤 하였다.
 
아버지는 세상살이에 능란하지 않았다. 동업하던 친구에게 곧잘 사기를 당하고도 ‘오죽하면 그랬겠냐’ 불쌍히 여기며 헤어질 때는 당신 손에 들린 국수 한 근 중 절반을 떼어 들려 보냈다는 말도 들었다. 그토록 마음이 약하고 인정 많은 아버지여서 어쩌면 우리는 하지 않아도 될 고생까지 했을 것이다.
 
아마 내가 대여섯 살 때일 것이다. 아버지는 무주구천동에서도 더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가 버렸다. 그곳은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에서 아버지는 혼자 집을 짓고 잠농을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려 아버지가 사는 산방까지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했는데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이따금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침에 청주 집에서 출발하면 저녁이 다 되어서야 아버지에게 다다를 수 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런저런 집안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마당 앞 조그만 연못 앞에 쭈그리고 앉아 배가 빨간 개구리와 놀았다. 
 
점심을 먹다가 “고추밭에 가서 고추 몇 개 따오너라.” 하면 잽싸게 뛰어가 고추를 따오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따온 고추를 상 위에 올려놓자 어머니와 아버지가 박장대소를 했다. 내가 먹을 만한 것을 따다 보니 여물지도 않은 작은 고추들만 따간 것이었다.
 
며칠인가 지나서 다시 청주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는 아침 일찍 구천동 산방을 나섰다. 그런데 점심때가 지나고 저녁이 가까워질 때까지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렸지만 버스가 오지 않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청주행 버스는 하루에 한 번밖에 없는데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기 직전에 떠나버렸다고 했다.
 
아버지와 나. 나는 이 집에 제일 먼저 아버지를 업고 들어서고 싶다. [사진 한순]

아버지와 나. 나는 이 집에 제일 먼저 아버지를 업고 들어서고 싶다. [사진 한순]

 
우리는 다시 아버지가 계신 산방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배가 몹시 고파 산길을 오르기가 힘들었다. 해가 거의 지고 있는 산방 저만치에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자 나는 “아버지!” 하고 부르며 달려갔다. 아버지는 나를 와락 끌어안더니 흑흑 소리 죽여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가 울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내 뒤쪽에 따라오던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한참 뒤 쪽,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한 수묵 빛깔 산속에 잠겨 있어 한복 치맛자락 밑 흰 고무신만 보였다. 이 시기를 제외한 나의 성장기에 아버지는 늘 내 사정거리 안에 계셨다. 예민하고 몸이 약했던 어머니를 대신해 내 주변을 맴돌고 계셨다.
 
내가 아버지 곁을 떠나 결혼을 하고 며칠이 지나자 이상하게 방이 지저분해졌다. 몇 번 방을 치우고 나서 ‘어! 이상하다. 시집오기 전에는 방이 이렇지 않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야 시집오기 전에 아버지가 “쟤 시집가면 나도 가야 하는데…” 하고 말한 기억이 났다. 내가 “왜요?”라고 묻자 아버지가 “방 치워줘야지.”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직장생활 합네 하고 방 한번 치워본 기억이 없었다. 시집을 와 집에서는 하지 않던 청소 하랴 빨래하랴 요리하랴 뭔지 모르게 고달팠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우리 집에 오세요” 하자, 아버지는 “내가 왜 너희 집에 가니?”하며 냉정하게 말했다. 전화를 끊으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집온 이곳이 뭔가 고달프지만 내가 이겨내고 살아야 할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큰아이가 세 살쯤 되었을 때 오랜만에 친정 나들이를 했다. 사방은 개나리 노란빛으로 떠들썩하고 우리는 오랜만의 만남에 들떠 떠들썩했다. 들떴던 분위기가 한차례 지나가자 아버지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얘야, 오지 말란다고 진짜 안 오면 어쩌니? 네가 막내로 자라 시집가서도 응석 부릴까 염려되어 그런 것이다.”하고 시집보낸 후 냉정했던 시기에 대해 다정한 목소리로 도닥여 주었다. 덕분에 나는 일찍이 시집이 내가 살 곳이다 생각하고 친정을 오가는 갈등 같은 것은 겪지 않고 잘 독립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사람을 좋아하셨다. 넘어진 곳에 핀 꽃. [사진 한순]

아버지는 사람을 좋아하셨다. 넘어진 곳에 핀 꽃. [사진 한순]

 
시골에 집을 짓고 하루 이틀 묵상의 시간이 늘어나면서 부모님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지금 내 나이 때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시부모님 나이에 나의 나이를 대보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어느 시기 아버지의 모습, 그러니까 아버지가 가족들을 두고 무주구천동 산골로 들어갔던 시절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아버지처럼 잠농까지는 하고 있지 않지만 지금 사는 시골집은 양평 시내에서도 꽤 떨어진, 논과 밭을 끼고도 한참 들어와 있는 산 중턱에 지어졌다. 이곳에 집을 짓겠다는 결정을 할 때까지 우리 부부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것은 한편의 포기이면서 동시에 한편의 선택이었다. 양적 팽창인가? 질적 팽창인가?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삶인가? 내가 선택한 삶인가? 더 잘 살 필요가 있는가? 잘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런 무수한 질문 속에서 택한 시골집이었다. 자수성가하다시피 한 우리를 보며 어른들은 시골집의 선택에 대해 수를 잘못 두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말은 하지 않지만 뭔가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그분들은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높이, 조금만 더 참기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사람을 좋아하고, 내 것만 챙기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아버지는, 동업한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동물 사료를 발명하다 실패하기도 하면서 세상과 사람들에게 원망이 깊어졌던 것 같다. 올망졸망한 우리 5남매를 도시에 놔두고, 땅과 자연과 함께 가족의 터전을 마련해보겠다고 무주구천동으로 들어가 버린 아버지. 아버지는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질문과 마주하고 있었을까?
 
깊은 산중에 집을 짓고 누에가 뽕잎 먹는 소리를 벗 삼아 지냈지만 청주 집으로 돌아가려던 막내딸이 해 질 녘 눈앞에 나타나자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던 아버지. 그날 이후 나는 무주구천동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아마도 아버지가 시골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청주로 나왔던 것 같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겉은 저렇듯 마른 듯 보이나 속에 물을 잔뜩 빨아올린 봄 나뭇가지 같은 우리 아버지를 등에 업고 우리 집에 제일 먼저 모시고 들어가고 싶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저 엷은 미소로 아버지의 삶을 끄덕여주고 싶다. 비 오는 창밖을 한 번 바라보고 아버지 얼굴 한 번 바라보면서.
 
한순 시인·도서출판 나무생각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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