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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코너에 몰린 김정은의 향후 선택지는

황준국 전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전 주영대사

황준국 전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전 주영대사

하노이 제2차 미북 정상회담은 합의 없이 끝났다. 합의문 한장 남기지 않았지만 이 정상회담은 몇 가지 중요한 깨우침을 준 것 같다. 양측의 보디랭귀지와 브리핑 등의 행간을 읽어보면 서로 강(强) 대 강(强)으로만 부딪힌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완전히 다른 북·미 비핵화 셈법
핵능력은 남긴 채 체제 안전과
경제 살리려던 북의 구상 차질
완전 비핵화, 베트남식 개혁도
1인 종신 체제와 양립 불가능

북한은 이 협상의 목표를 무역금수 해제에 두었다. 11개의 안보리 제재와 미국의 독자 제재로 중첩돼있는 복잡한 제재망 속에서 민수용 경제제재만 푸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2016년 초 4차 핵실험 후 채택된 안보리 결의 2270호는 2006년부터 시작된 대북 안보리 제재의 질적 도약을 가져왔다. 핵·미사일과 관련된 제재에서 북한 정권 자체의 약화를 목표로 한 제재로 성격이 변했다.
 
그로부터 5번의 안보리 결의에서 석탄, 철, 수산물, 의류 등 주요 수출을 전면 금지하고 근로자 해외송출도 금지해 북한은 경제 전반에 큰 충격을 받았다. 원래 빈곤한 나라가 수십억불의 외화수입이 막혔으니 살길이 암담해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백만명이 굶어 죽어도 정권이 유지되었지만 그 후 장마당 경제의 정착, 개인의 이익 추구, 휴대폰 수백만개 유통 등 북한 사회도 많이 변했다. 게다가 젊은 지도자가 서양식 엔터테인먼트 바람까지 불어 넣었는데, 갑자기 수출의 4분의 3 이상이 날아가 버리고 석유 수입까지 제한을 받으니 나라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김정은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다. 이용호 외무상은 새벽에 기자들을 모아놓고 40년간 공들인 영변을 통째로 폐기하겠다는데 그 정도 제재도 못 풀어주느냐고 간청하는 듯이 보였다. 북한은 완전히 약체임을 드러내고 말았다. 과거에는 영변 시설의 가동을 일시 중단하는데도 수억불 이상의 대가를 요구했었다. 이번에는 에너지 지원도, 종전선언에도 별 관심 없고 주한미군 철수 요구에는 근처에도 못 간 것 같다. 자기들이 무역해서 생활비를 벌 테니 그것만 허용해 달라는데 미국이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시론 3/6

시론 3/6

처음에는 영변의 일부 시설만 동결 내지 폐기하겠다고 하면서 반응을 타진해 보다가 끝에는 김정은 위원장이 영변 시설을 총체적으로 영구히 폐기하겠다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는데도, 미국이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미국의 논리는, 북한이 해제를 요구하는 그 제재들은 수십억 달러짜리이므로 사실상 제재의 거의 전부라는 것이다. 그리고 영변 밖의 숨겨진 핵시설에서 계속 핵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수십억 달러를 풀어주는 건 북한의 핵개발에 보조금을 주는 것과 같은 효과라는 것이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황당한 계산법이고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부동산업자라는 비아냥을 들어오던 트럼프 대통령이 원론적 선언을 담았던 싱가포르 때와는 전혀 다른 진면목을 이번 실질문제에서 보여준 것이다.
 
이용호 외무상은 한 번에 모든 것을 내놓는 것은 불가능하니 영변 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최대치 아니겠냐고 호소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많은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영변을 넘어 핵심으로 바로 들어갔다. 꽁꽁 감추어 놓아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고 믿고 있던 영변 밖 시설에 대한 증거들을 보여주어 김정은을 놀라게 했다. 미국이 이 정도까지 알고 있다면 북한 내부를 어디까지 보고 있을까, 혹시 미국 정보기관과 내통하는 자는 없는가, 많은 생각이 김정은의 머리를 스쳐 갔을 것이다. 시진핑을 만난다면, 중국도 모르는 것을 미국이 얼마나 알고 있느냐고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었냐고 궁금해 할 텐데 답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게 되었다.
 
평양으로 돌아간 김정은은 큰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경제가 다급해진 것은 물론이고 비핵화 협상의 기본 전략과 게임 플랜에 중대한 차질을 초래한 것이다. 김정은의 게임 플랜은 부분적 비핵화 조치들을 단계적으로 해나가면서 경제 안보 등 여러 측면에서의 상응 조치를 최대한 받아내어 결과적으로는 핵능력을 남긴 채 체제안전도 도모하고 경제도 살리는 것이었을 텐데, 미국의 계산법이 전혀 다름이 정상 레벨에서 확인된 것이다.
 
국력이 수백 배 우위인 상대의 접근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면 북한으로서는 돌파할 길이 막막하다. 도발로 선회할 수는 있지만 얻을 것이 별로 없고 후과가 두렵다. 그렇다고 앞으로 협상을 통해 챙겨 얻어야 할 것들이 많은데 처음부터 전모를 밝히고 처분에 맡길 수도 없다. 중국도 미국을 대신해서 안보리 제재를 풀어줄 힘은 없다. 완전한 비핵화도, 베트남식 개혁개방도 1인 종신 수령체제와는 양립 불가능하다. 핵을 가진 채 근근이 경제를 지탱하는 것이 독특한 체제를 유지하는 그나마 가능한 방법인데 이번 정상회담으로 그 전선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황준국 전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전 주영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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