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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머리’ 마을이 주꾸미 동네로 변한 황당한 사연

기자
박헌정 사진 박헌정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19)
용두동 주꾸미 골목. 신당동 떡볶이 골목이나 신림동 순대 타운처럼 식당이 밀집한 대규모 상권이 아니다. [사진 박헌정]

용두동 주꾸미 골목. 신당동 떡볶이 골목이나 신림동 순대 타운처럼 식당이 밀집한 대규모 상권이 아니다. [사진 박헌정]

 
“용두동이면 주꾸미잖아?” 그래서 또 한 번 주꾸미 골목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다. 주꾸미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작년에 이곳 동대문구 용두동으로 이사 온 뒤로 여기서 약속을 정해 가끔 모임을 갖는다. 만나는 지인마다 ‘용두동=주꾸미’로 반응하니 나 역시 입에 ‘용두동 주꾸미’가 달라붙었다. 어디에 사느냐고 물으면 용두동이 아니라 “주꾸미에 살아요” 소리가 나올 판이다.
 
주꾸미 볶음의 노하우는 주꾸미가 쪼그라들지 않고 탱탱하고 먹음직스럽게 보이도록 볶는 것이라는데, 이 골목 식당들이 그걸 잘한다. 매콤하고 담백한 주꾸미를 삼겹살과 곁들여 저렴하게 먹을 수 있어 좋다. 주꾸미 골목이라고 해봐야 식당은 열 곳 정도다. 정작 이곳보다는 전국 곳곳에서, 심지어 주꾸미가 잡히는 바닷가 도시에서도 주꾸미는 ‘용두동 주꾸미’다.
 
누구든지 어릴 때 살던 동네에 대해 애틋한 그리움이 있다. 어른이 돼 다시 찾아가 보면 초라하게 작아져 있는 동네, 내게는 이곳 용두동이 그런 곳이다. 하굣길에 우리 치와와 ‘미미’가 달려오고, 아버지한테 자전거를 배우던 골목이 있던, 바로 그 동네로 40년 만에 이사 왔다.
 
한때 20여 주꾸미 식당 성업  
그때는 주꾸미와 전혀 관련 없던 곳이었다. 용두동 주꾸미가 언제부터 유명해졌는지 검색해봐도 아무런 정보가 없다. 물어보니 1990년대에 한 식당이 성공한 후 점점 늘어나 한때 20곳 넘게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역사도 짧은 주꾸미 골목이 용두동을 대표하는 것 같아 좀 아쉽다. ‘용두동(龍頭洞)’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용 머리 형상의 산이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라 하고, 내가 다닌 용두초등학교 교가에도 ‘용꿈을 꾸자’는 대목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용은커녕 이무기나 가물치도 아닌 주꾸미라니.
 
1970년대에 들어선 제기동의 옛 미도파백화점 건물. [사진 박헌정]

1970년대에 들어선 제기동의 옛 미도파백화점 건물. [사진 박헌정]

 
용두동은 동대문과 청량리 사이, 그러니까 도심과 부심 사이에 있다. 한양 도성이 가깝던 만큼 일찍부터 개발됐다. 1899년 최초로 개설된 전차의 노선은 서대문부터 청량리까지였다. 고종황제가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까지 행차하기 위해 종점이 청량리로 정해졌다고 한다. 그 노선과 거의 비슷하게 1974년에 지하철 1호선이 개통돼 이곳을 지나간다. 그러니 서울 동쪽의 주축 교통 라인이다.
 
용두동과 좁은 골목 하나로 붙어있는 제기동에는 서울대 사범대학이 있었고, 그 동쪽으로 정릉천 건너 제기동역에는 명동에나 있을 법하던 백화점(미도파)이 이미 1970년대에 들어서 있었다. 그 옆이 제기동 약령시다.
 
임금이 매년 봄에 들러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선농단(先農壇)도 있다. 제를 올린 후 친히 밭에 들어가 농사를 시범 보이고 행사 후 소를 잡아 백성들에게 끓여 먹였다고 해서 붙여진 ‘선농탕(先農湯)’이 설렁탕의 유래라고 한다(어원의 신빙성에 대한 이견도 많다).
 
그리고 내가 살던 시립 동부병원 뒤편은 일찍부터 정방형으로 택지를 개발해 균일하게 도시형 개량한옥을 들여앉힌, 단정한 한옥 지구였다. 자료를 찾아보면 부동산 개발업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정세권 선생이 1920년대부터 40년대 초까지 가회동·익선동 같은 시내 중심지와함께 외곽의 보문동· 돈암동·왕십리에서도 한옥 건축사업을 벌였다고 한다. 용두동도 그 당시 개발됐다. 1978년에 처음 이사 왔을 때 40~50년 된 집이라고 하던 기억이 난다.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 선생은 1920년대부터 동대문 바깥쪽 보문동, 돈암동, 왕십리에 대규모 한옥 사업을 벌였다. 이곳 용두동도 그때쯤 개발된 것 같다. [사진 박헌정]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 선생은 1920년대부터 동대문 바깥쪽 보문동, 돈암동, 왕십리에 대규모 한옥 사업을 벌였다. 이곳 용두동도 그때쯤 개발된 것 같다. [사진 박헌정]

 
이 한옥 동네는 1980년대까지 거의 원형대로 유지되다가 하나둘씩 원룸과 다세대주택으로 바뀌면서 점점 쇠락했다. 그 당시 더 허름하고 궁벽하던 정릉천 건너편(지금 동대문구청 쪽)은 아예 싹 정비돼 신식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이쪽은 그 옛날에 구획정리가 됐다는 이유로 아직 그대로이니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된다’는 말이 실감 난다.
 
80년대까지 단정한 한옥지구였다 쇠락의 길  
이처럼 역사 있는 곳이 요즘은 그 위치와 교통여건 때문에 예전의 고적함이나 쾌적함은 사라지고 실용성만 부각된 동네가 돼 버렸다. 여기로 이사 와서 ‘직주 근접(직장과 집이 가깝다)’ 개념을 처음 들어봤을 만큼 도심으로 출퇴근하기 편한 곳이다.
 
그런 것이야 다 좋다. 동네가 복잡해져도 할 수 없고, 한옥이 사라지는 것도 막을 방법이 없다. 다만 추억이 남아있는 옛 동네가 난데없이 주꾸미 동네로 불리는 게 좀 황당하다. 강북에는 비슷한 곳이 많다. 신당동은 떡볶이고 장충동은 족발이다. 금산 인삼이나 청양 고추처럼 특산품 개념도 아니고, 그저 동네 이름만 내주는 셈이다.
 
어릴 적 살던 용두동 골목. 골목 전체가 한옥으로 오롯이 남은 곳은 여기뿐이다. [사진 박헌정]

어릴 적 살던 용두동 골목. 골목 전체가 한옥으로 오롯이 남은 곳은 여기뿐이다. [사진 박헌정]

 
어릴 때 살던 집이 있던 골목에 찾아가 봤다. 좁은 골목은 옛날 그대로인데 정말 이 골목이 창밖으로 아침마다 두부 장사의 딸랑이종 소리가 잠을 깨워주고 한밤중에 “찹쌀떡, 메밀묵~” 소리가 애처롭게 지나가던 40년 전의 그 골목인가 싶다. 어느 집에선가 이주노동자인 듯한 남녀가 크게 싸운다. 다른 나라말이라 왜 싸우는지 알 수 없다.
 
이미 땅이라는 말에서는 ‘고향’, ‘우리 집’, ‘이웃’ 같은 느낌이 사라지고 ‘개발’, ‘시세 차익’ 같은 말만 떠오른다. 사람이 늘고 집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다. 그런데 강남이 개발되고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유서 깊은 옛 동네는 뒤로 밀리고 낡아간다.
 
서울시장이 강북을 강남만큼 개발하겠다고 하니 부동산 시장이 요동쳐서 금방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쇠락하는 곳 아니면 땅값 치솟는 곳, 우리가 사는 이 도시에선, 아니 우리 머릿속에선 땅에 대한 느낌이 그 두 개뿐인 것 같아 안타깝다.
 
박헌정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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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