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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을 보면 떠오르는 술취한 아빠의 발길질 악몽

기자
김명희 사진 김명희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6)
이따금 추운 날 전철을 타고 한강철교를 지나다보면 강물이 두껍에 얼어 흰 시루떡처럼 보인다. 사진은 한강 결빙구간에 눈이 하얗게 쌓여 있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따금 추운 날 전철을 타고 한강철교를 지나다보면 강물이 두껍에 얼어 흰 시루떡처럼 보인다. 사진은 한강 결빙구간에 눈이 하얗게 쌓여 있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올겨울은 유난히 푹하다. 이렇다 할 한파가 없다 보니 오히려 마음 한편에서는 이러다 갑자기 기상이변이라도 오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까지 하다. 이따금 추운 날 서울 대학로에 있는 예술가의 집으로 시 창작 강의를 하러 갈 때가 있다. 전철을 타고 한강철교를 지나다 보면 강물이 두껍게 얼어 흰 시루떡처럼 보인다. 나는 그런 얼음을 보면 그 차가움을 온몸으로 심하게 느낀다. 이것은 어쩌면 그날의 트라우마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릴 적 내가 살던 경기도 양평은 살인적인 추위로 악명이 높았다. 어떤 때는 강원도 철원보다 더 내려갔다. 간밤의 한파로 창고에 저장된 소주병들이 다 동파돼 뉴스에 나온 적도 있다. 1981년에는 영하 32.6도가 공식 기록이다. 내가 열한 살이던 1979년 겨울도 영하 30도 가까이 됐다. 여기에 바람까지 불면 영하 40도 체감온도는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곳이 양평이다.
 
그때 다문리 과수원집에 한 평 남짓한 문간방 하나를 사글세로 얻어 살고 있었다. 그 집에는 막내인 나와 아버지와 작은 오빠가 살았다. 엄마와 언니와 큰오빠 셋은 객지로 돈 벌러 가서 따로 살았다. 그 당시 아버지는 암묵적으로 나와 작은 오빠에게 해야 할 일을 분담해 주셨다.
 
집안일 하느라 놀 틈 없었던 열세살 나
열세 살인 내가 할 일은 방 쓸고 걸레질하고 설거지하고 빨래 개고 집 안 청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학생인 작은 오빠는 학교 다녀와 지게 지고 동네 앞산에 가서 나무 짐을 져다 놓아야 했고 저녁이면 아궁이에 불을 때고 쌀을 씻어 석유풍로에 밥을 해야 했다. 석유풍로를 다루거나 아궁이에 불을 때는 일은 아버지가 오빠를 시켰다.
 
중학생이었던 작은 오빠는 열세 살이었던 나에게 아궁이에 불을 때는 것과 석유풍로에 밥하는 것까지 시키면서 주먹을 쥐고 눈을 부라렸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중학생이었던 작은 오빠는 열세 살이었던 나에게 아궁이에 불을 때는 것과 석유풍로에 밥하는 것까지 시키면서 주먹을 쥐고 눈을 부라렸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어느 날 아버지의 술 심부름으로 동네 구멍가게를 갔는데 소주가 없었다. 그날도 엄청나게 바람이 불고 추웠다. 해는 뉘엿뉘엿 지는데 아픈 아버지는 어디 가셨는지 집에 안 계셨다. 이때다 싶었던 나는 모처럼 친구들과 고무줄을 하며 신이 났다. 평소에 편히 나가 친구들과 놀 수도 없었다. 친구들은 엄마와 다 큰 언니들이 집에 있어 집안일을 하지 않았지만, 우리 집은 집안에 여자라고는 나 하나였고 늘 엄마 대신 무수한 집안일을 해야 했다.
 
그래서 어릴 적 내 소원은 단 하루라도 집안일 안 하고 친구들과 해가 질 때까지 놀다가 집에 들어가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과 된장찌개 한번 먹어보는 것이었다. 어쩌다 주말에 엄마가 서울서 와도 늘 불화가 생겼다. 잠시도 평안할 날이 없었기에 따뜻한 밥을 편히 먹어본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날은 모처럼 무서운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 나도 작은 오빠도 저녁까지 신나게 놀았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날 작은 오빠는 자신이 할 일을 내게 떠넘기고 친구들과 사라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빠는 그 당시 사춘기여서 더 뺀질거렸던 것 같다. 싫다는 내게 아궁이 불 때는 것과 석유풍로에 밥하는 것까지 지키면서 주먹을 쥐고 눈을 부라렸다. 차라리 무서운 아버지가 집에 있는 편이 더 나았다. 오빠는 그 당시 어린 내게 무척 무서운 대상이었다. 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아버지 눈을 피해 수시로 나를 때렸고 일러바치지 못하게 협박했다.
 
해가 어둑해지자 나는 아버지께 혼날까 봐 두려웠다. 신나게 고무줄하고 공깃돌 놀이하는 부러운 친구들을 뒤로하고 집에 돌아와 꽁꽁 언 펌프를 녹여야 했고 아궁이에 불을 때야 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날림으로 진 헛간 같은 곳이었다. 웃풍이 심해 방 안에서도 입김이 나오고 머리가 휘날릴 정도로 끔찍하게 추웠다. 그래서 저녁이면 아궁이 불은 미리미리 때 구들장을 덥히고 두꺼운 이불을 초저녁에 펴놔야만 온기가 스며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
 
디귿 모양으로 된 집 마당 한가운데에는 공동 펌프가 있었는데 영하의 칼바람이 불던 날 나는 쌀을 바가지에 꺼내 담고 펌프로 나갔다. 사진은 한 농부가 펌프질을 하여 물을 끌어올리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디귿 모양으로 된 집 마당 한가운데에는 공동 펌프가 있었는데 영하의 칼바람이 불던 날 나는 쌀을 바가지에 꺼내 담고 펌프로 나갔다. 사진은 한 농부가 펌프질을 하여 물을 끌어올리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디귿 모양으로 된 집 마당 한가운데 공동 펌프가 있었다. 나는 정부미를 바가지에 꺼내 담고 펌프로 나갔다. 주위는 캄캄했고 영하의 칼바람이 불었다. 키가 작은 나는 벽돌을 밟고 올라가 백열등을 켰다. 이미 옆집 아줌마들은 일찍 저녁을 해 먹고 다 마친 뒤였다. 나는 꽝꽝 언 함지박 속 얼음을 내 키만 한 절구 방망이로 내려쳐 깨뜨렸다. 허허벌판을 가로지르는 강풍이 온몸을 꽁꽁 얼렸다.
 
함지박 속 얼음이 깨지자 물이 출렁였다. 그 물을 떠 걸레를 빨고 쌀을 씻기 시작했다. 맨손으로 시루떡만 한 얼음을 이리저리 밀쳐가며 쌀을 씻다 보니 손이 차갑다 못해 아프고 저려 비명이 절로 나왔다. 얼음이 둥둥 뜬 물로 쌀을 거의 다 씻어가던 바로 그때였다. “야 이년아! 지금이 몇 신데 여태 쳐 놀고 자빠졌다가 이제 쌀을 씻어? 이 게으른 년아!”
 
아빠의 발길질에 함지박 얼음 속에 처박혀
뒤에서 누군가 욕설을 퍼붓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고개를 뒤로 다 돌리기도 전에 나는 쌀 바가지를 손에 든 채 그대로 상체가 함지박 얼음 속으로 처박혔다. 아버지가 수돗가에 앉아 쌀을 씻는 내 등을 신발 신으신 채로 내리밟은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그 정도 행동은 자주 겪어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양평의 강추위 속에서 얼음물 속으로 처박힌 그 날 저녁 추위는 정말 소름 돋았다.
 
나는 너무 차갑고 놀란 나머지 불에 덴 듯 얼른 몸을 일으켰다. 젖은 내 머리에서 흰 쌀알과 얼음조각이 뭉쳐져 고드름처럼 늘어졌다. 내게 욕을 퍼붓는 아버지에게서 역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아버지가 폭력을 쓸 때마다 나를 그 공포에서 구해주거나 말려줄 사람이 없는 게 더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아버지가 두 번째 발길질을 위해 한발을 높이 들다 술기운에 비틀거렸다.
 
나는 그 틈을 타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다. 술 취한 아버지가 나를 쫓아올까 봐 심장이 멈춰버릴 듯 무서웠다. 서울에 있는 엄마가 죽도록 보고 싶었다. 나는 가까운 내 친구 집 안방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가 아랫목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었다. 그 당시 친구네 집은 대문과 울타리가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더는 쫓아오지 않으셨다. 내 친구와 할머니가 놀라 나를 보았다. 내 몰골을 본 할머니는 더는 묻지 않으셨다.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야 하는데 책가방이 없었다. 감사하게도 할머니는 우리 집에 가서 내 책가방을 갖다 주셨다. [중앙포토]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야 하는데 책가방이 없었다. 감사하게도 할머니는 우리 집에 가서 내 책가방을 갖다 주셨다. [중앙포토]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야 하는데 책가방이 없었다. 감사하게도 할머니는 우리 집에 가서 내 책가방을 갖다 주셨다. 나는 그날 세상에서 가장 맛좋은 할머니 표 된장찌개에 아침밥을 쓱쓱 비벼 먹고 그 친구와 학교로 향했다. 그런 꿀맛 같은 된장찌개를 매일 먹는 내 친구가 정말이지 눈물 나게 부러웠다. 그런데 일은 그다음에 또 벌어졌다. 학교에서 수업 중 반 친구 몇이 수군거렸다. 내 짝꿍이 내게 와 귓속말을 해주었다. “명희야. 너 화장실 가서 뒤 좀 봐봐. 애들이 자꾸 놀려.”
 
나는 화장실 가서 뒤로 돌아보았다. 거울 속 내 등에는 신발 자국이 도장처럼 찍혀 있었다. 열세 살 여자아이 등에 찍힌 어른의 커다란 신발 자국. 우리 반 친구들은 그게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순간 엄마가 보고 싶고 너무 슬펐다.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그 시절의 내 삶이었던 것을. 그날 나는 공부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집도 그 어디도 내겐 피난처가 될 수 없었다.
 
오빠는 고구마 포댓자루로 머리 얻어맞고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작은 오빠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내가 얼음물에 처박혔다가 친구 집으로 줄행랑친 후 집에 돌아온 작은 오빠는 아궁이에 불을 안 땠다는 이유로 술 취한 아버지가 20㎏이 넘는 고구마 포댓자루로 오빠 머리를 내려쳤다는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작은 오빠는 그 트라우마로 오십 중반이 넘은 지금도 힘들어하곤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십여 년이 흘렀다. 우리는 아버지 기일이면 한숨 쉬며 안타까워한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왜 그리 혹독하셨을까.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긴 병을 앓으며 마음마저 병들어 피폐해졌을 아버지도 생각하면 통탄할 일이다. 그 속에서 또 다른 피해자로 살아야 했던 내 가족들. 가난해도 따뜻한 기억을 남겨주고 가셨다면 남은 우리도 떠나신 아버지도 이렇게 악몽만 남지는 않았을 터인데…. 가난과 질병이 죄는 죄다.
 
지금 그 숱한 30년 세월을 돌아보면 내가 겪은 현실이라기보다 마치 악몽을 꾸고 깨어난 느낌이다. 나는 그래서 지금 그 어떤 힘겨움이 닥쳐도 현재가 가장 행복하다. 꿈속에서조차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김명희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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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