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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3대 사찰 선광사의 ‘선광’은 의자왕 아들 이름

[이훈범의 문명기행] 백제의 혈맹 왜국
“백제의 주류성이 마침내 당에 항복했다. 이에 국인(國人·백제인)들이 말했다. ‘사태가 돌이킬 수 없게 됐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이제 조상의 묘가 있는 곳을 어찌 다시 갈 수 있겠는가. 호례성(弖禮城·전남 보성 또는 남해도로 추정)으로 가서 일본 장수들과 만나 어떻게 할지 의논하자.’ 그리고 침복기성(枕服岐城·전남 강진으로 추정)에 있던 처자들에게 나라를 떠나가려 한다는 마음을 알렸다.” (『일본서기』 663년 9월 7일)
 
“일본의 수군과 함께 좌평 여자신,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와 국민들이 호례성에 이르렀다.” (『일본서기』 663년 9월 24일)
 
“이튿날 비로소 배가 출항해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서기』 663년 9월 25일)
 
『일본서기』가 전하는 백제의 마지막 모습이다. 백제의 부흥운동은 이듬해 지수신이 사수하던 임존성이 무너질 때까지 지속되지만, 왜는 이때 사실상 지원을 포기한다. 지원군 철수 이후 한동안 보이지 않던 백제 관련 기사는 664년 3월에야 보인다.
 
“백제왕 선광왕(善光王) 등을 난파(難波·나니하) 에 살게 했다. 별이 수도의 북쪽에 떨어졌다.” (『일본서기』)
 
 
하나뿐인 백제 왕자에게 ‘백제왕’ 성씨도
 
백제 성왕이 왜국 흠명천황에 선물한 아미타삼존불. 불교를 수용하느냐 마느냐 하는 갈등 속에서 한때 강물에 던져지기도 했으나 현재 일본 3대 사찰 중 하나인 나가노의 선광사에 모셔져 있다. 7년에 한번씩 공개하는데, 그때도 지하 수장고에 있는 진품이 아닌 모조품이 전시된다고 한다. [중앙포토]

백제 성왕이 왜국 흠명천황에 선물한 아미타삼존불. 불교를 수용하느냐 마느냐 하는 갈등 속에서 한때 강물에 던져지기도 했으나 현재 일본 3대 사찰 중 하나인 나가노의 선광사에 모셔져 있다. 7년에 한번씩 공개하는데, 그때도 지하 수장고에 있는 진품이 아닌 모조품이 전시된다고 한다. [중앙포토]

선광은 631년 왜국에 파견됐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용이다. 660년 백제 부흥군과 일본 지원군 대 나당연합군이 맞붙었던 백촌강(금강 유역)전투에 함께 참여했던 형 부여풍은 패전 뒤 고구려로 망명하고 용은 왜국으로 몸을 피했다. 왜에 남은 유일한 백제 왕자에게 일본은 ‘백제왕’이라는 성씨를 붙여준다. 그를 백제계 도래인의 지도자로 인정한 것이다. 당이 옛 백제 땅에 설치한 웅진도독부의 도독으로 임명한 백제의 마지막 태자 부여융에 맞세우려는 의도도 보인다. 바로 그 무렵 융이 백제부흥군의 잔존세력을 최종 진압한 까닭이다.
 
“3월에 백제 잔당이 사비산성에 웅거해 반란을 일으키자, 웅진도독이 군사를 일으켜 쳐부수었다.” (『삼국사기』 문무왕 4년 664)
 
망국의 왕자들이니 형제의 운명이 기구할 수밖에 없다. 이후 백제유민들의 저항은 보이지 않지만, 풍과 용 두 왕자는 고구려와 왜에서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 해 10월 당나라 장수인 대방주자사 유인궤가 두 형제의 소통을 우려하는 상표문을 당 고종에게 바칠 정도였으니 융의 마음이 얼마나 좌불안석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이듬해 8월 융이 당의 칙사 앞에서 신라의 각간 김인문과 맺은 맹약문을 보면 더하다.
 
“지난날 백제의 전 임금이 역리와 순리를 분간하지 못해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교통해 함께 잔인함과 포악을 일삼아 신라를 침략해 마을과 성을 도륙하니 거의 평안한 해가 없었다. (…)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조상의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옛터를 보전하게 하니 신라에 의지해 (…) 묵은 감정을 버리고 우호를 맺어 화친하며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 길이 번방(蕃邦)이 될 일이다.” (『삼국사기』 문무왕 5년)
 
이 글은 유인궤가 쓴 것이다. 사실 대방주는 웅진도독부의 7주 중 한 주에 불과하다. 오늘날 전남 나주 일대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대방주자사인 유인궤가 웅진도독인 부여융에게 내밀 맹약문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얘기다. 망국의 왕자가 어찌 불만을 토로할 수 있었을까. 실제로 유인궤는 이후 고구려와의 전쟁에 전념했고, 융 역시 맹약을 맺은 뒤 당의 칙사가 돌아가자 신라가 두려워 당으로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패자에게 너그러운 인지상정 때문일까, 여기서 신라는 일부 후대로부터 불필요한 미움을 받는다. 가장 일반적인 비판은 외세와 결탁해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흔히 범하는 오류에서 비롯된 그릇된 시각이다. 현재의 신발을 신고 과거의 길을 걷는 오류 말이다. 과연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과연 서로 동족이라고 생각했을까. 같은 민족끼리 나뉘어 사는 게 옳지 않다고 여겨 패권을 다투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민족이란 19세기에 만들어진 개념이다. 근대에 형성된 개념으로 과거를 판단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적어도 백제로서는 신라보다 일본이 더욱 가까운 혈맹이었다. 신라와는 1세기가 넘도록 적대관계를 유지해온데다 가야 멸망 이후 수많은 한반도 도래인, 특히 백제 출신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왜국 땅이 더욱 친근했을 수 있다. 백제의 귀족들이 신분을 유지하는데도 일본 열도가 더욱 유리했을 것이다. 실제로 왜는 백제 유민들을 호의적으로 대접한다.
 
“이 달에 백제국 관직의 품계를 검토했다. 좌평 복신의 공적에 의해 귀실집사에게 소금하(小錦下)를 주었다. (이전 관위는 달솔이었다.) 또 백제 남녀 4백여 인을 근강국(近江國)의 신전군(神前郡·카무사키노코호리)에 살게 했다.” (『일본서기』 665년 2월)
 
복신은 백제 부흥운동을 주도했으나 풍 왕자와 갈등을 빚어 살해당한 인물이다. 그는 백제 멸망 때 왜에 사신을 보내는 등 실질적으로 백제를 대표했다. 귀실집사는 그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달솔은 백제 16관등 중 2위 자리고, 소금하는 당시 왜의 26개 관위 중 12위였으니 높은 자리는 아니지만 그 아들을 대접하는 데는 낮지 않아 보인다.
 
가야 멸망 당시 애통해마지 않던 분위기와는 달리, 백제 멸망에 대해서는 고구려 승려 도현이 쓴 『일본세기』를 인용해 간단하게 기록하는데 그친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호의다.
 
 
백제 도래인들 나가노현에 자리 잡아
 
선광사의 삼존불 개방축제. 관람객이 워낙 많아 불상에 연결된 나무기둥만 만져보고 돌아가기도 한다.

선광사의 삼존불 개방축제. 관람객이 워낙 많아 불상에 연결된 나무기둥만 만져보고 돌아가기도 한다.

“춘추지(春秋智·김춘추)가 대장군 소정방의 도움을 얻어 백제를 협공해 멸망시켰다. 혹은 백제는 자멸했다. 왕비가 요사스럽고 무도해 국정을 좌우하고 어진 신하를 주살했기 때문에 화를 자초했다.” (『일본서기』 660년 7월)
 
일본에 망명한 백제 유민들은 경작할 땅도 받는다.
 
“이 달에 신전군의 백제인에게 밭을 지급했다.” (『일본서기』  665년 3월)
 
근강은 오늘날 시가현 일대다. 왜국 조정은 이듬해 근강으로 천도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데 백제인들의 선진 기술을 이용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이 해 겨울에 도읍(飛鳥)의 쥐들이 근강으로 옮겨갔다. 백제 남녀 2000여 명을 동국에 살게 했다. 승속을 불문하고 계해(癸亥)의 해부터 3세에 이르기까지 관에서 식품을 공급했다.” (『일본서기』 666년 겨울)
 
“쥐들이 옮겨갔다”는 것은 『일본서기』 에서 지배층의 지지를 얻지 못한 천도를 얘기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 앞서 654년 12월 8일자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이 날에 황태자는 황모모존을 모시고 왜의 하변행궁으로 옮겨 거주했다. 노인이 ‘쥐가 옮겨간 것은 도읍을 옮기는 전조였다’고 말했다.”
 
황태자는 선왕인 효덕(孝德)천황을 남겨두고 관료들을 이끌고 비조로 천도한 천지(天智)천황을 말한다. 홀로 남은 효덕은 이듬해 쓸쓸히 사망한다. 그 천지가 다시 근강으로 천도를 하려던 것이다.
 
근강 인근의 나가노현은 일찍이 백제 도래인들이 자리잡고 살던 곳이다. 이곳에 선광사(善光寺)라는 절이 있다. 일본 3대 사찰 중 하나라는데 다름아닌 부여용 왕자의 이름인 선광이다. 실제로 이 절은 과거 백제사로 불렸다. 여기에는 본당 지하에 꽁꽁 숨겨졌다 7년마다 한번씩 공개되는 보물이 있다. 백제 성왕이 흠명(欽明)천황에 보낸 아미타 삼존불이다. 이 불상이 공개되는 개장 축제 때에는 수백만 명이 선광사를 찾아 절 안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가 된단다. 그래서 경내에 본존불과 줄로 이어진 기둥이 세워지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기둥을 만져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돌아간다고 한다. 경직된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은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다.
 
이훈범 대기자 / 중앙콘텐트랩 cielble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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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