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사형 집행 직전 목숨 건진 김구, 탈옥후 독립운동

기자
김준태 사진 김준태
[더,오래] 김준태의 자강불식(4)
백범 김구(1876~1949)는 생전에 세 번 투옥되었는데, 이중 첫 번째와 세 번째 투옥은 그에게 터닝포인트가 된다. [중앙포토]

백범 김구(1876~1949)는 생전에 세 번 투옥되었는데, 이중 첫 번째와 세 번째 투옥은 그에게 터닝포인트가 된다. [중앙포토]

 
독립운동의 거목이자 해방정국의 정치가 백범 김구(1876~1949)는 생전에 세 번 투옥됐다. 1896년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죽였고,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연좌됐으며, 1911년 안악사건(일제가 안명근 등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고 날조한 사건)의 공범자로 체포되면서다.
 
이 중 두 번째 사건은 곧바로 석방됐기 때문에 논외지만, 첫 번째와 세 번째 투옥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혹독한 고초를 겪은 것도 겪은 것이지만 수양을 깊이 쌓는 계기가 됐다. 특히 첫 번째 수감 생활은 의기(義氣)만 앞섰던 청년 김구를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시켰다.
 
김구, ‘국모보수의 의거’로 첫 수감 생활 
김구(당시 이름은 김창수였지만 편의상 김구로 칭한다)를 처음 감옥에 가게 한 ‘치하포 사건’은 ‘국모보수(國母報讎)의 의거’로 불린다. 그는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 스치다를 격살했는데, 명성황후를 잔혹하게 시해한 일본에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둘러싼 논란이 있다. 『백범일지』 에서는 스치다를 일본군 중위로 기술하고 있지만 일본 외무성 자료에는 대마도 출신 상인이라고 되어 있다.
 
백범일지 원본 첫 장.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주관적인 심증으로 일본인 스치다를 살해한다. 이후 감옥에 갇혀 사형수로 지내며 하루하루 남김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중앙포토]

백범일지 원본 첫 장.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주관적인 심증으로 일본인 스치다를 살해한다. 이후 감옥에 갇혀 사형수로 지내며 하루하루 남김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중앙포토]

 
또한 김구는 스치다를 두고 “혹시 저자가 우리 국모를 시해한 미우라가 아닐까. 만일 미우라가 아니더라도 미우라의 공범일 것 같다. 여하튼 칼을 차고 숨어다니는 왜인이 우리 국가와 민족의 독버섯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내가 저놈 한 명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치욕을 씻어 보리라” 생각했다고 밝힌다.
 
객관적인 증거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관적인 심증에 따른 행동이었다. 여하튼 일본인을 살해한 죄목으로 김구는 황해도 해주감옥에 갇혔고 다리뼈가 드러날 정도로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인천 감리영으로 옮겨졌다.
 
"인천으로 이감된 이유는 갑오경장 이후에 외국인 관련 사건을 재판하는 특별 재판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 감옥에서 김구는 자신의 기개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자신은 일개 시골 천민이지만 국모가 시해되는 참변을 보고 왜놈을 때려죽여 치욕을 씻고자 했는데 관리라는 자들은 어찌 부끄럽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느냐며 심문장에 참석한 관리들을 비판했다. 배석한 일본 순사를 엄히 꾸짖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을 때까지 글이나 실컷 보리라 하고 손에서 책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글을 읽었다. 그중에서도 신서적(新書籍, 신학문과 신문물에 관한 서적)을 탐독했고, 그 결과 전통 학문 일변도에서 벗어나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해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김구의 사형이 예정된 날, 고종이 사형 집행을 정지시켰고 김구는 탈옥한다. 사진은 김구의 묘 일대를 둘러보는 시민들. [연합뉴스]

김구의 사형이 예정된 날, 고종이 사형 집행을 정지시켰고 김구는 탈옥한다. 사진은 김구의 묘 일대를 둘러보는 시민들. [연합뉴스]

 
죽음과 직면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두 갈래로 나뉜다. 생에 집착하거나 아니면 생에 초탈하거나. 두려워 바동거리거나 아니면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에 집중하거나. 김구는 후자였다. 당장 오늘 형이 집행될지도 모를 사형수 신분으로 그는 하루하루 남김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아마도 이 시절이 훗날 수많은 죽음의 고비 앞에서 초연한 김구를 만드는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고종, 전화로 김구의 사형집행 정지시켜 
그렇다면 김구는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 사형이 예정된 바로 그 날, 뒤늦게 ‘국모보수’라는 죄목을 발견한 고종이 전화를 걸어 집행을 정지시켰다고 한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고종이 아니라 법부에서 전보를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김구는 탈옥했다. 내 나라에서 자신이 죽을죄를 짓지 않았다고 판단해 주었으니 “왜놈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옥중에 남아 죽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역사가 알려주는 바와 같다.
 
김준태 동양철학자·역사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