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일제 치하, 자강의 길 선택한 소년 과학도들의 실력 양성

지난해 3월1일 제99주년 3.1절을 맞아 부산 시민들과 학생들이 부산 동래고등학교에서 동래시장 사이의 거리를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뉴스1]

지난해 3월1일 제99주년 3.1절을 맞아 부산 시민들과 학생들이 부산 동래고등학교에서 동래시장 사이의 거리를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뉴스1]

 일제 강점기 조선인은 21세기의 후손이 살아갈 과학기술 문명을 상상이나 했을까. 이 글은 3.1운동 이후 조선 과학기술의 흔적을 살핀다. 물론 3.1운동과 과학기술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1919년이면 조선에서 과학기술자로 부를 사람이 거의 없던 상황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흥미를 끄는 사실이 있다. 독립만세운동에 미래의 남북한 과학기술계 대표가 될 소년 과학도가 참여했다는 점이다. 1902년생 화학자 이태규는 그의 회고록에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를 피해 낙향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후 대한민국에서 이태규는 화학계의 아버지로 추앙받았고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03년생 물리학자 도상록은 3.1운동 참여시 독립선언서 인쇄 혐의로 검거되어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8개월 구형, 경성복심법원에서 태 90의 실형을 선고받은 이와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이후 도상록은 북한에서 과학원 원사를 지냈고 인민과학자로 추대되었으며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3.1운동은 당시의 10대 소년에게 자강의식을 심었다. 1906년생 공업화학자 안동혁에 따르면, 소년학도 일부가 3.1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자강의 방법으로서 과학기술을 택했다. 과학기술의 길에는 두 개의 가능성이 있었다. 하나는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유학을 가는 길이었다. 전북대학교 김근배 교수에 의하면 3.1운동 이후 자비를 들여서 과학기술 유학을 떠나는 조선인이 늘었는데, 특히 일본 유학생이 증가했다. 졸업 후 근무할 대학과 연구소가 하나도 없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서 10대 소년학도의 과학기술 유학은 실로 대담한 선택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조선 과학자들

일제 강점기 때의 조선 과학자들

자강의식은 법문학 중심의 학문 편식이 심하던 식민지 조선에 과학기술의 바람을 불러왔다. 유학이 아닌 두 번째의 가능성은 조선에 과학 계몽운동을 일으키는 길이었다. 서울대학교 임종태 교수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경성공업전문학교 졸업생과 공업인 일부는 발명학회를 결성하고 과학지식의 보급과 물산장려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찰스 다윈의 기일이던 4월 19일을 과학데이로 정하고 자동차 퍼레이드를 주관하는 등 식민지 조선에 과학기술 문명의 힘을 전달했다.

 
실력 양성에는 시간이 걸리나 그 보상이 크다. 1931년 이태규가 교토제국대학에서 화학 분야 이학박사 학위를 받자 언론에서 이를 크게 보도했다. 일본인의 위세에 움츠러들던 조선인에게 이태규가 민족의 자긍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1935년 일본 이화학연구소의 김양하(1901년생)가 비타민 E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발표했는데, 이후 조선의 언론은 김양하를 노벨상 수상 후보로 치켜세웠다. 1939년 일본 교토제국대학의 리승기(1905년생)가 합성 1호를 발명하자 언론은 조선 사람에 의한 위대한 발명이라 치하하며 기쁨을 전했다. 조선에서 일어난 성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는 조선인 과학자의 성취에다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부족했던 긍지와 미래 희망을 투영했던 것이다.

 
1931년 7월2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태규 박사의 학위 취득 소식.

1931년 7월2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태규 박사의 학위 취득 소식.

식민지 조선의 과학기술 현실은 척박했다. 일본이나 미국 유학을 통해 과학기술 고등교육을 이수한 자들이 식민지 조선에 돌아와서 할 수 있는 일은 교사나 하급 기술관리 정도로 제한되었다. 답답한 현실은 물리학자 도상록이 언론에 기고한 한 문장에서 드러난다. “작금의 일기는 퍽도 침울터니 오늘은 낮잠이 깊이 들어 물리연구소가 꿈꾸어젓습니다.” 조선에 연구소 설립은 당대의 쓰임을 바라던 조선인 과학자의 공통 희망사항이었으나, 결과는 국가 없는 과학의 서러움이었다. 앞서 조선인이 과학기술에 미래의 희망을 품었다면, 과학기술자는 척박한 식민지 과학을 탈피할 강력한 국가주의를 품게 되었다.  
 
당장의 성과가 없어도 조선인 과학기술자를 후원하는 민족자본가가 있었다. 삼양사가 운영한 장학재단 양영회의 1940년 이사록이 그 증거다. 이사록의 첫 안건에서는 김양하·최삼열·강정택·리승기·박철재가 양영회(대표이사 김연수)로부터 각월 50원의 연구비를 3년간 받는다고 적혔다. 5명 중 강정택을 제외한 4명이 과학기술자다. 사진에는 없지만, 이태규 박사의 회고록에도 양영회로부터 학비와 생활비 지원을 받았다고 기록되었다. 이후 김양하·리승기·최삼열은 월북을 택했기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못했고, 박철재는 남한의 물리학자로 초대 원자력연구소장을 지낸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삼양사가 운영한 장학재단 양영회의 1940년 이사록 일부. 김양하ㆍ최삼열ㆍ강정택ㆍ리승기ㆍ박철재가 양영회(대표이사 김연수)로부터 각 월 50원의 연구비를 3년간 받는다고 적혔다. 5명 중 강정택을 제외한 4명 모두 과학기술자다. 자료: 삼양사 양영재단 (서울대학교 이문웅 명예교수 제공)

일제강점기 당시 삼양사가 운영한 장학재단 양영회의 1940년 이사록 일부. 김양하ㆍ최삼열ㆍ강정택ㆍ리승기ㆍ박철재가 양영회(대표이사 김연수)로부터 각 월 50원의 연구비를 3년간 받는다고 적혔다. 5명 중 강정택을 제외한 4명 모두 과학기술자다. 자료: 삼양사 양영재단 (서울대학교 이문웅 명예교수 제공)

우리나라 과학기술은 3.1운동 이후 자강을 꿈꾸던 소년 과학도에 의해 성장했다. 안동혁의 집계에 따르면, 해방 직전 전문학교 졸업 이상의 과학기술인력은 농업·토목공업·기계공업·물리학 등 19개 분야에서 1만330명이 종사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해방 직후 독립국가 건설의 기치가 높을 때, 과학기술계 인사들은 학계 및 단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8.15 직후 결성된 조선학술원, 적산을 인수할 정부기관과 대학 자치위원회,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정치단체에서 위에 언급한 인물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3.1운동 당시 보이지 않았던 과학기술이 1945년에는 나타났던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은 대한민국 과학기술에 하나의 큰 숙제를 던진다. 20세기에 형성된 자강의식과 국가로부터의 소외라는 식민지적 속성은,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정신적 저변에 ‘강력한 국가주의’를 각인했다. 한국 과학기술자에게는 종종 지사적 이미지가 입혀진다. 애국적 과학자, 국가적 기술자, 의기 있는 기업가와 같이 말이다. 하지만 2019년의 현실은 사뭇 다르다. 언론에서는 과학기술에 대한 긍지를 찾기가 어렵고, 과학기술자들은 강력한 국가주의를 속박으로 여긴다. 2019년의 한국인에게 과학기술은 무엇이고, 한국 과학기술자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성찰과 미래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 정치계와 과학기술계의 화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홍성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다른 기자들의 연재 기사 보기

뉴스레터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