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황제도 준공식 보러 왔다, 로스차일드의 파리 저택

기자
송동섭 사진 송동섭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12) 
제임스 로스차일드의 페리에르 저택. 파리에서 동쪽으로 약 25km 떨어진 페리에르-앙-브리(Ferrieres-en-Brie)에 소재. 19세기 저택 중 가장 호화롭다는 이 저택은 1850년대 후반 완공되었고 준공식에는 당시의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찾아왔었다. 비스마르크를 재상으로 두었던 프러시아의 황제는 ’어떤 왕도 이런 저택을 보유할 수 없다. 오직 로스차일드 만이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약 천 만평(32km²)의 공원에 둘러싸인 이 저택은 1975년 파리대학에 기증되었다. [사진 출처 Wikipedia(저자 MOSSOT)]

제임스 로스차일드의 페리에르 저택. 파리에서 동쪽으로 약 25km 떨어진 페리에르-앙-브리(Ferrieres-en-Brie)에 소재. 19세기 저택 중 가장 호화롭다는 이 저택은 1850년대 후반 완공되었고 준공식에는 당시의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찾아왔었다. 비스마르크를 재상으로 두었던 프러시아의 황제는 ’어떤 왕도 이런 저택을 보유할 수 없다. 오직 로스차일드 만이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약 천 만평(32km²)의 공원에 둘러싸인 이 저택은 1975년 파리대학에 기증되었다. [사진 출처 Wikipedia(저자 MOSSOT)]

 
로스차일드 금융재벌의 시조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의 프랑크푸르트 사업을 물려받은 큰아들 암셸(1773-1855)은 자식이 없었다. 큰아들의 부는 뒤에 빈 가족과 나폴리 가족에게 나누어졌다.
 
둘째 아들 솔로먼(1774-1855)은 한동안 파리에서 동생 제임스와 같이 있으면서 사업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1820년 빈으로 간 그는 그곳에서 은행을 설립하고 철도 등 기간 산업에 들어가는 자금을 조달해 주어 나라의 산업화에 기여했다. 그 기여로 1822년에는 오스트리아 황실로부터 자작(Baron) 작위를 받았고 그 작위는 전 형제들이 누렸다.
 
그가 쌓은 부(富)도 오스트리아에서 상당했고 부의 집중은 공공의 분노를 샀다. 1848년 프랑스의 2월 혁명은 전 유럽대륙으로 전파되어 기존 체제를 흔들었다. 오스트리아도 그 여파를 피할 수 없었고 솔로먼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오스트리아의 실력자 메테르니히는 영국으로 망명 갔다. 솔로먼도 그때 돈과 힘을 잃었다. 그는 회사를 아들에게 넘기고 파리로 물러나야 했다. 빈의 은행은 그런대로 굴러가다 2차대전 중 나치의 손에 넘어갔다.
 
1821년,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오스트리아 군대가 나폴리의 자유주의 운동을 진압하고 그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로스차일드 가족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독일에 있던 넷째 아들 칼만(1788-1855)을 나폴리로 보냈다. 그는 아들 중 수완이 제일 부족했다. 1861년의 이탈리아의 통일은 나폴리 가족의 주된 고객인 권력자와 귀족을 몰락시켰고 칼만의 후손이 이끌던 나폴리의 사업은 문을 닫았다.
 
로스차일드 가의 다섯 아들 중 사업 수완이 가장 좋았던 사람은 셋째 아들 나탄(1777-1836)과 다섯째 아들 제임스(1792-1868)였다. 런던이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자리 잡은 데는 혼란했던 18세기의 유럽 대륙의 정치 상황이 배경이 되기도 했지만 나탄의 기여도 있다. 런던에서 성공한 나탄은 로스차일드 가문에 예탁된 독일의 왕 빌헬름의 재산과 아버지 마이어의 지도와 조언에 도움을 받았다(전편 참조).
관련기사
 
돈을 버는 데는 막내인 파리의 제임스가 가장 나았던 것 같다. 그에게는 밑거름이 되어준 큰 손도 없었고 집안의 도움도 런던 가족의 경우처럼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 형제보다 영민했고 계산도 빨랐다. 제임스만큼 산업혁명이 주는 기회를 확실히 이용한 형제는 없었다.
 
제임스 로스차일드. 로스차일드의 파리 가족을 이끌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제임스 로스차일드. 로스차일드의 파리 가족을 이끌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제임스는 1811년 파리로 왔다.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에 있는 유대인은 자유로워졌고 이후 나폴레옹도 유대인의 권익 향상을 위해 힘썼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물러나자 반작용이 있었다. 루이 18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제임스의 아내가 궁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제임스는 루이 18세와 거래를 하지 않았다. 루이 18세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무능한 샤를(Charles) 10세가 1830년 7월 시민혁명으로 물러나고 루이 필리프가 왕이 되자, 제임스는 재빨리 그에게 접근하였다.
 
물론 제임스는 파리 시절 초기부터 어디서 돈을 벌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당시는 영국 산업 혁명의 영향이 프랑스 곳곳에서 발아하려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철도건설과 광산 개발에 자금을 조달하여 주었고 또 돈이 될 만한 곳에는 직접 투자도 하여 부를 쌓았다.
 
제임스는 혁명이 완전히 수습되지 못해 어수선했던 루이 필리프 왕정 초기에 정부가 필요로 했던 자금을 지원하여 새 정부가 빨리 안정을 찾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면서 새 정부와 로스차일드 파리가족은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의 사업적 수완과 안목은 루이 필리프 왕정기의 프랑스에서 산업혁명이 급격히 전개, 확대되는데 공헌하였다. 영국보다 40~50년 늦었지만 프랑스는 이로써 산업 강국으로 올라섰다.
 
루이 필리프 왕 시절 각종 산업의 발달로 돈은 곳곳에서 생겨났고 그 돈을 쫓는 이권을 따라 부정부패는 정부의 온갖 부서에 만연했다. 당시 프랑스의 부의 원천 중 많은 부분에 제임스의 손이 닿았다. 빠르게 불어난 프랑스의 전체 부 중 상당 부분은 제임스의 개인 부로 쌓였다. 그것은 엄청난 것이었고 그의 개인 재산은 가족 중에서도 제일 많았다.
 
로스차일드 가족이 영국의 산업혁명 전개 과정에서 배운 지식이 막내아들 제임스의 사업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때 그의 개인 재산은 현재가치로 환산했을 때 요즘 세계 최고 부자라는 빌 게이츠의 재산의 5배를 넘었다는 주장도 있다.
 
제임스는 젊은 나이에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가 되었고 많은 사람이 그를 시기하면서 부러워하고 경멸하면서 따라 하는 존재가 되었다.
 
1848년 2월 혁명은 제임스의 사업에도 위기를 주었다. 하지만 파리 가족은 여러 차례의 프랑스의 변덕스러운 정치 상황을 견디며 잘 지탱해 나갔다. 1880년대에 파리 가족은 카스피 해(海)의 바쿠(Baku) 유전개발에 참여했고 이것은 그들에게 또 한 번의 도약기를 가져다주었다. 유전이 속한 아제르바이잔은 당시 세계 제일의 석유생산국이 되었다.
 
영국 가족 나탄의 셋째 아들 나타니엘은 프랑스로 와서 1853년에 와인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샤또 무통 로스차일드 (Château Mouton Rothschild)는 현재 와인 라벨 중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이다. 이에 자극받았는지 제임스 자신도 근처의 와인 농장을 사들였고, 그의 라벨, 샤또 라피트 로스차일드(Château Lafite Rothschild) 또한 유명하다.
 

로스차일드 와이너리 전경. 로스차일드 가의 와인 라벨은 와인 시장에서 고급으로 꼽힌다. [사진 송동섭]

 
로스차일드 파리가족의 사업은 1982년 미테랑의 사회당 정부가 국유화 정책을 펴면서 괴멸적 타격을 받았다. 그 후 로스차일드 가는 와인 사업 외의 다른 프랑스내의 사업을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부의 분산을 막기 위해 로스차일드 가문이 족내혼을 했던 것은 전편에서 얘기한 바 있다.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의 다섯 아들 중 막내인 제임스(1792년생)는 둘째 형 살로몬의 딸 베티(1805)를 아내로 맞았다. 제임스와 베티 부부에게서 태어난 딸 샬롯(1825)은 제임스의 셋째 형 나탄의 아들 나타니엘(1812)과 결혼했다. 그러니까 영국의 나탄은 샬롯의 시아버지 겸, 큰아버지 겸, 작은 외할아버지였던 셈이다.
 
2018년 5월에 로스차일드 가의 후계자 중의 한 사람이 서울에 왔는데 마이어의 8세손으로 1985년 런던에서 태어난 그의 이름도 제임스였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호텔 재벌 힐턴 가의 상속녀 니키이다.
 
마이어의 8세손과 호텔재벌 힐튼 가의 상속녀 니키. 두 사람은 2015년 7월 결혼했다. [사진 송동섭]

마이어의 8세손과 호텔재벌 힐튼 가의 상속녀 니키. 두 사람은 2015년 7월 결혼했다. [사진 송동섭]

 
루이 필리프 왕과 제임스 로스차일드가 동행했던 시기는 쇼팽의 파리 시절과도 중첩된다. 로스차일드 가족과의 만남으로 인생이 바뀐 쇼팽에 관한 이야기가 다음 편에 이어진다.
 
송동섭 스톤월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