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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종이로 사각형 맞춰라’…IQ 테스트로 변질된 공시

경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지난 17일 오전 서울 노량진 윌비스학원에서 강의실 앞자리를 잡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이 학원은 강의실 자리를 착주일에 한 번씩 선착순으로 결정한다. 600명이 들어가는 대형 강의실에서 칠판이 보이는 중앙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최승식 기자]

경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지난 17일 오전 서울 노량진 윌비스학원에서 강의실 앞자리를 잡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이 학원은 강의실 자리를 착주일에 한 번씩 선착순으로 결정한다. 600명이 들어가는 대형 강의실에서 칠판이 보이는 중앙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최승식 기자]

‘상반기 결산 기념으로 박 과장에게 특별히 참치세트를 추가로 준다고 했을 때 최 부장 구매 비용은 얼마인가.’
 

직무 연관성 없는 이상한 시험
‘스펙 보지 말라’ 하니 지능 평가
“교수도 못 푸는 문제” 변별력 논란
미 언론 “하버드 합격보다 힘들어”
수험생 “노력 소용없어 더 불공정”

19일 찾아간 서울 서초구 대형 서점의 ‘공기업 인·적성 검사’ 코너에 비치된 국가직무능력표준(NCS) 예상문제집에 나온 내용이다. 상반기 결산 기념으로 직원들에게 한우와 전복, 화장품 등 선물을 주는데 가격표와 할인율을 제시한 뒤 부장이 과장에게 주는 선물 총액을 구하는 문제다. 3박4일 유럽 출장을 다녀왔을 때 식대로 청구할 수 있는 비용과 직원들과의 대화 내용을 알려준 뒤 생일을 알아맞히는 문제도 있었다.
 
노량진·신림동 학원가에서 밤새워 줄을 서가며 준비하는 취업준비생들은 실제 직무와 연관성이 거의 없는 ‘시험을 위한 시험’을 준비하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김선경(27)씨는 NCS와 민간기업 인·적성 시험을 1년 넘게 준비했지만 공부해서 점수가 올랐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김씨는 “소금물 농도를 구하거나 게임하듯 추리해 푸는 문제가 많은데 직무랑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학교에서 외부 강사를 초청해 연 특강에서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문제는 걸러라’ 같은 요령을 주로 알려주더라”고 말했다.
 
노량진 학원가에 붙어 있는 강의 홍보물(左), 노량진 독서실 벽에 붙어 있는 스터디 모집 안내문(右). [최승식 기자]

노량진 학원가에 붙어 있는 강의 홍보물(左), 노량진 독서실 벽에 붙어 있는 스터디 모집 안내문(右). [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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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영어 등 일반 공무원시험 과목에도 변별력 논란이 일었다. 지난해 서울시 지방공무원 7급 공채 한국사 시험 문제에 학원 강사가 문제를 제기했다. 해당 강사는 방송을 통해 원부·허공의 고금록(1284년)과 이승휴의 제왕운기(1287년)를 시간 순으로 나열하라는 문제를 지적하며 “대학교수도 풀 수 없는 이런 변별력 없는 문제를 내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미국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AT)도 최근 “한국에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가 미국에서 하버드대에 합격하기보다 어렵다”고 소개했다. 인·적성 시험을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다 보면 시험 준비 기간이 길어지더라도 포기하기도 어렵다. 장수생을 양산하는 고시 낭인(浪人) 문제가 ‘공시 낭인’ ‘인·적성 낭인’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산업구조가 바뀌고 정부의 역할도 따라서 바뀌어야 하는데, 공정성이라는 기준에만 매몰돼 공무원 채용 기준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외우느냐’는 것에서 변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출신 대학과 나이, 성별 등을 보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이 퍼지면서 직무와 관련 있는 지원자 역량을 평가할 방법이 없어지자 공기업은 NCS를 채택했다. 한 취업업체 관계자는 “박근혜 정부에서 개발한 NCS가 강원랜드 채용 비리 사건이 터지니 이번 정부에서도 계속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시중 서점에 팔리는 인·적성 시험 모의 문제. [최승식 기자]

시중 서점에 팔리는 인·적성 시험 모의 문제. [최승식 기자]

인·적성 시험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단순 IQ 테스트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노력으로 얻은 스펙이나 직무 능력보다 공간지각·추리 등 타고난 지능이 당락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과 교수는 “채용 비리가 생기고 공정성을 강조하다 보니 인사권자가 가진 주관성은 없어졌다”며 “필기시험 난이도를 높이자 이상한 문제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시험을 위한 시험’은 민간 기업에도 퍼지고 있다. 서점에서 판매되는 삼성전자 인·적성 시험 예상문제집에는 ‘4일마다 쉬는 가게와 6일마다 쉬는 가게가 어느 월요일에 같이 쉬었다면, 그다음에 같이 쉬게 되는 월요일은 며칠 후인가’를 묻는 문항이 나온다. 최신 출제 경향을 반영했다는 모의고사 문제집엔 블록을 회전시켰을 때 나오는 모양을 찾거나 찢어진 종잇조각을 하나로 맞추는 수리 문제가 20개 들어 있다.
 
직장인 박주희(26)씨는 “3개월에 15만원을 주고 인터넷 강의를 들어도 주사위 굴리기 팁을 알려주는데 설명을 제대로 못했다”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라는 말인데, 이런 문제들을 왜 변별력의 잣대로 활용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사람이 몰리자 사교육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학원가는 ‘지옥반-말뿐인 스파르타는 가라’ ‘사람은 간절해지면 무척이나 강해져요’라는 문구로 학생들을 끌어모은다. 20년 동안 노량진에서 활동한 한 온라인 강사는 “학창 시절 성적이 낮고 공부를 안 해본 학생을 상대로 공포 마케팅을 벌여 돈벌이를 한다”며 “학원 기업들이 아이들을 마치 로마시대 노예선으로 보내 채찍질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단기로 성적을 끌어올리는 공부 방식에 대해 채용된 공무원들도 고개를 젓고 있다. 주민센터에서 근무하는 지방직 9급 공무원인 장모(27)씨는 “공무원 시험 준비 영어 단어장에 풍진(rubella)이라는 단어가 기억난다”며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도 이 단어를 과연 쓸까 회의가 든다”고 말했다. 경희대에서 공기업 NCS 채용준비반을 담당하는 박언경 객원교수는 “과거엔 NCS에 별도로 시간과 돈을 투입해 공부할 난이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최근엔 속도 경쟁이 붙어서 관련 사교육이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에는 인성검사도 논란이다. 서점에서 팔리는 모의고사 문제에서는 ‘대인관계를 향상하는 경우가 아닌 것을 고르시오’라는 문제도 눈에 띄었다. 직장인 박모(26)씨는 “예를 들어 CJ가 도전과 혁신을 인재상으로 추구한다면 거기에 맞춰서 답을 찍어야 한다”며 “해당 기업에 맞춰 인성까지 맞춰 답을 내야 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전 세계에서 공채로 이렇게 대규모로 시험을 봐서 사람을 뽑는 건 한국밖에 없을 것”이라며 “회사 부서와 일에 필요한 사람은 인턴부터 시작해 수시 채용하는 방향으로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직무능력표준(NCS)
산업 현장에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지식·기술·태도 등을 정부가 문제로 표준화해 필기시험 형태로 정리한 내용이다. 2015년부터 공공기관 채용에 활용됐다.

 
정진호·임성빈·최연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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