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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지키는 독충? 황금빛 밀포드서 만난 흡혈파리

기자
박재희 사진 박재희
[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16)
여의도 면적의 110배가 넘는 테아타우 산중호수를 지나는데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사진 박재희]

여의도 면적의 110배가 넘는 테아타우 산중호수를 지나는데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사진 박재희]

 
하루 40명, 선택받은 방문객만 밀포드로 들어가는 배를 탈 수 있다. 선착장에서 보트까지 이어진 데크를 따라 걷는 동안 다른 세상으로 간다는 느낌이 선명해졌다. 트랙이 시작되는 글레이드 워프는 바다 같은 산중호수를 지난 곳에 있다. 테아나우 호수는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 대략 1만4천 년 전에 생겼다.
 
면적을 말할 때 왜 여의도를 기준으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호수의 크기는 여의도 110배가 넘는다. 연평균 강수량도 6천 밀리미터라고 하니 무엇이든 평소 우리가 익숙한 규모의 100배가 넘었다. 바다도 아닌 호수를 건너는데 배로 1시간 30분이 걸린다기에 ‘밀포드로 가는 길이 멀기도 하구나.’ 조급해하던 차에 인생과 여행에 목적지란 애초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고쳐 본다.
 
밀포드로 들어갈 수 있는 40인 중 하나가 되어 테아나우 다운스에서 배를 탄다. [사진 박재희]

밀포드로 들어갈 수 있는 40인 중 하나가 되어 테아나우 다운스에서 배를 탄다. [사진 박재희]

 
밀포드가 목적지라면 그곳으로 가기까지 모든 길은 그저 지나기 위한 것이란 말인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만 중요한 것은 아닐 텐데 우리는 그 사실을 종종 잊는다. 선착장에서 마지막으로 신발 소독까지 풍덩 마쳤다. 밀포드에만 사는 수 십만종의 이끼와 생태를 보호하기 위해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모두 소독약 통에 두 발을 차례로 담그게 되어있다. 마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 쿵쿵 도장을 찍는 예식처럼.
 
‘파르스름한 향기, 이건 뭐지?’ 밀포드 트랙으로 들어서자마자 싱그럽고 촉촉한 향이 뿌려졌다. 거대한 분무기라도 있는 것은 아닌지 자꾸 주변을 둘러봤다. 피부로 스며드는 향기가 매끄럽고 몽글몽글하다. 향기에서 부피감이 느껴지다니 아무래도 초능력이 생긴 것만 같았다. 청량한 입자가 몸에 닿는 감촉은 생소했다. 황홀한 순간이었건만 하필이면 왜 나는 그것을 떠올렸을까?
 
체험하지 못한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라더니 이제껏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청량함이 안개비처럼 내리는 숲에서 내가 떠올린 것은 기껏 ‘피톤치드 방향제’였다. 산 도깨비 백만 통!
 
밀포드에 사는 수십만 종의 이끼와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소독약에 발을 담가야 한다. 일종의 청정 서약을 하는 셈이다. [사진 박재희]

밀포드에 사는 수십만 종의 이끼와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소독약에 발을 담가야 한다. 일종의 청정 서약을 하는 셈이다. [사진 박재희]

 
‘세상이 그대로 멈추고 그 사람에게만 빛이 쏟아졌어.’
이건 운명처럼 첫눈에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람들이 쓰는 표현이다. 내게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쯤에 해당하는 말이었지만. 그 순간을 맞이하고 나서야 이해할 수 없던 이 표현이 실은 얼마나 정확한 묘사인지 깨달았다. 정말이었다. 클린톤 강을 마주한 순간 진짜 세상이 그대로 멈추고 빛이 우리에게만 쏟아졌다. 처음 구름다리를 건너던 그 순간만큼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호들갑을 빌어오지 않고는 설명하기가 힘들다.
 
트랙을 걷는 동안 수없이 만나게 될 풍경이었지만 처음이란 원래 그런 법이다. 처음은 그 자체로 우월하다. 첫사랑, 첫 키스, 첫눈, 첫 만남… 설사 더 좋은 다음 것이 있더라도 처음은 단 하나고 그래서 모든 처음은 대체 불가능하다. 그날은 첫날이었고, 우리는 몇 발짝마다 한 번씩 사랑을 고백해야 하는 마법에 걸린 사람들처럼 오두막으로 가는 길을 환호성으로 채웠다.
 
"Too good to be true!(실제라고 믿기엔 너무 좋아.)"
"꿈이야 생시야." 
 
완벽하고 너무 좋아서 믿어지지 않았을 때, 갑작스러운 습격을 당한 것도 그때였다. 우리가 첫 번째 구름다리를 건넜을 때, 그때를 기다렸다가 파리 대왕은 일제 공격 신호를 내린 것이다. ‘아악~ 아아악~’ 원정대의 막내를 시작으로 우리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바람이 눕는 들풀이 황금빛으로 빛나던 오후, 샌드플라이의 무자비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지나치게 완벽하다 싶었던 꿈결 같은 평화는 깨졌다.
 
클린톤 강에 놓인 출렁다리를 지나면 본격적인 숲길이 시작된다. 밀포드 트랙에 발을 들였을 때, 마치 첫눈에 사랑에 빠진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샌드플라이의 등장으로 꿈결 같은 평화는 깨졌다. [사진 박재희]

클린톤 강에 놓인 출렁다리를 지나면 본격적인 숲길이 시작된다. 밀포드 트랙에 발을 들였을 때, 마치 첫눈에 사랑에 빠진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샌드플라이의 등장으로 꿈결 같은 평화는 깨졌다. [사진 박재희]

 
마오리 신은 언젠가 인간이 밀포드를 찾아낼 것을 알았다. 인간들로부터 밀포드를 지켜줄 수호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마오리 신은 모래를 한 움큼 집어 던져 샌드플라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별다른 개성을 느낄 수 없는 '모래 파리(샌드플라이sandfly)' 라는 이름으로 정체를 숨기고 있지만 샌드플라이는 흡혈 곤충이다. 침입자들에게 달려들어 물어뜯고 맹렬하게 피를 빤다. 마오리 신의 명령대로 밀포드를 지키는 그들을 ‘가디언즈 오브 피오르드랜드’라고 부른다고 한다.
 
샌드플라이에 관한 전설 가운데는 다른 것도 있다. 마오리 여신께서는 1만4천 년 동안 꽁꽁 가려졌던 밀포드에서 좀 외로웠다고 한다. 맥킨논의 탐험 후에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기뻐하고 있었는데 웬걸! 사람들이 그녀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경치에 넋을 잃고 환호성을 지르는 통에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나 뭐라나. 여신은 질투심에 불타 환호성이 들리는 곳마다 모래를 던져서 샌드플라이를 만들었다고.
 
일단 물린 후에는 딱히 방법이 없다. 물린 자리를 손톱으로 눌러 십자가를 만들고 그 위에 침을 바르는 따위의 태평한 행위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독성이 강해 한 번 물리면 부어올라 물집이 생기고 진물이 흐른다. 가려움은 상상초월. 잠도 잘 수가 없고 미친 듯이 긁다 보면 어느새 피부 위로 빨갛게 피가 배어 올라오곤 한다.
 
오죽하면 밀포드 트랙을 개척한 맥킨논마저 그 지경이 되었겠나! (샌드플라이에 물린 후 가려움 발작을 참지 못하고 호수에 뛰어들어 변을 당했을 거라는 얘기가 있다. 믿거나 말거나) 실제로 그의 실종에 관하여 밝혀진 바는 없지만, 샌드플라이에게 피를 바친 한 사람으로서 볼 때 맥킨논 사망에 관한 추측은 신빙성이 있다.
 
밀포드 트랙은 '죽기 전에 걸어야 할 산길' 이라고 알려져 있다. 가장 유명한 그레이트 웍스 트랙중 하나이다. [사진 박재희]

밀포드 트랙은 '죽기 전에 걸어야 할 산길' 이라고 알려져 있다. 가장 유명한 그레이트 웍스 트랙중 하나이다. [사진 박재희]

 
“밀포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야. 하지만 샌드플라이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지.”
“샌드플라이는 아마존 콩가개미에 맞먹어. 최강 독충이라 정말 조심해야 해.”
 
뉴질랜드에서 트램핑깨나 한다는 친구들이 원정대에게 수없이 경고했던 말이 떠올랐다. 최소한 1인 2통씩 퇴치제를 준비하라고 했건만 우리는 너무 흥분하여 서두는 바람에 방문객 센터에서 사는 것을 깜박했다. 완벽한 꿈만 같았던 밀포드가 원정대에게 공포를 안겨주고 있었다. 우리는 먹이가 되자고 밀포드에 왔단 말인가.
 
무거운 배낭도 예삿일은 아니었다. 이미 얘기했듯 원정대는 별의별 방법으로 무게를 줄이고 수십 번 넘게 배낭을 메봤지만, 점검은 점검일 뿐이다. 배낭 무게도 인생의 무게와 마찬가지였다. 잠시 어깨에 메보는 것과 실제로 짊어지고 걸어야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길이 끝날 때까지 걸으며 감당해야 할 무게가 우리를 눌렀다. 우리는 황홀해서 자주 서야 했고,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워 멈추기도 했다. 그때마다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은 샌드플라이였다.
 
천국에 왔다고 호들갑을 떨다가 지옥을 엿보기도 했던 첫날은 지금 생각해보니 완벽한 예고편이다. 트래킹을 하는 동안 마주할 기쁨과 환호, 고통 그리고 이겨내야 할 고난까지 모두 알뜰하게 맛보기로 준비된 날이었다. 우리는 40명 중 가장 꼴찌로 숙소에 도착했다. 밤 10시가 넘도록 어두워 지지 않는 남반구의 해는 길었다. 밀포드의 첫날 밤, 별이 뜨기를 기다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계속)
 
박재희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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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