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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잃은 도시에 시적인 사랑얘기 펼친 일본 차세대 거장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의 첫 장면을 여는 도쿄 도심 전경 . [사진 디오시네마]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의 첫 장면을 여는 도쿄 도심 전경 . [사진 디오시네마]

“일본 노래 중에 제목에 도쿄가 들어간 게 최소 스무 곡은 될 거예요. 주로 지방 출신이 도쿄를 야망과 희망이 있는 동경의 대상으로 바라본 가사죠. 하지만 다 옛날얘기입니다. 40년 전쯤부터 도쿄는 젊은이들이 패배의 쓴맛을 보고, 꿈이 부서지는, 살기 팍팍한 도시가 됐죠. 차이는 있겠지만 다들 무리를 해가며 숨 막히는 기분으로 살고 있어요. 단지,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만 품은 채로요. 저 또한 마찬가지고요.”
 
새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를 들고 서울을 찾은 이시이 유야(36) 감독의 말이다. 14일 개봉한 이 영화는 절망의 도시에서 건져낸 사랑 이야기랄까. 주인공은 도쿄에서 살인적인 물가와 공허감에 시달리며 살아가던 간호사 미카(이시바시 시즈카). 생활비를 충당하려 밤마다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막연한 희망을 꿈꾸는 일용직 노동자 신지(이케마츠 소스케)를 만나게 되면서 조금씩 변화한다.  
 
밤의 어둠 속에 이들을 비추는 푸르고 붉은 빛과 섬세한 사운드가 근래 어떤 영화보다 시적이다. 2년 전 베를린영화제 포럼부문에 초청된 데 이어 지난해 아시안필름어워드에선 한국과 중국 거장들을 제치고 감독상을 차지했다.  
 
어느 밤 유흥가, 자전거를 타던 여주인공 미카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남자 신지를 뒷모습만으로 알아본다. 일본에서 차세대 연기파로 주목받는 이케마츠 소스케가 신지 역을, 이시바시 시즈카는 이 영화의 미카 역으로 첫 주연을 맡았다 . [사진 디오시네마]

어느 밤 유흥가, 자전거를 타던 여주인공 미카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남자 신지를 뒷모습만으로 알아본다. 일본에서 차세대 연기파로 주목받는 이케마츠 소스케가 신지 역을, 이시바시 시즈카는 이 영화의 미카 역으로 첫 주연을 맡았다 . [사진 디오시네마]

실제로 시(詩)가 토대가 된 영화다. 일본 시인 사이하테 타히의 시집 『밤하늘은 항상 최고 밀도의 푸른색이다』에서 영감을 받아 감독이 직접 각본을 썼다. “도시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 자살한 거나 다름없어.” 영화 초반 미카가 자조적으로 읊조리는 말들이 바로 이 시집의 시구다. 이 시집은 일본에서 2만 7000부나 팔리며 주목받았다. 
 
“시집으로부터 스토리보다 좀 더 깊은, 세상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영향을 받았어요. 30대 여성 시인이 누군가한테 말을 건네듯 쓴 시였기 때문에 미카를 여주인공으로, 상대역 신지 캐릭터를 만들었죠. 논리적으로 고민하면 오히려 시의 파워에 압도당하지 않을까 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중시하려 했어요.”
 
감독은 신지가 한 눈이 안 보인다는 설정 역시 시집을 읽자마자 떠올렸다고 했다. “세상의 절반인 암흑만 볼 수 있게 허용된 사람이죠. 오히려 그렇기에 그 속에서 어떻게든 밝은 빛을 찾으려 해요.” 그는 “완전무결한 히어로보단 조금 모자란 인간에게 관심이 많다”면서 가만히 덧붙였다. “누구에게나 안고 가야 할 흉터가 있고 그게 긍정적인 뭔가로 전환됐을 때 그 사람에게 더 깊이 매료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시이 유야 감독. 18일 서울 서초동 웅진빌딩에서 만났다. 권혁재 기자

이시이 유야 감독. 18일 서울 서초동 웅진빌딩에서 만났다. 권혁재 기자

 
사전을 만드는 편집자의 독특한 사랑 이야기 ‘행복한 사전’(2013), 갑작스레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엄마와 가족들을 그린 ‘이별까지 7일’(2015) 등도 무엇인가 결여된 이들이 가까스로 다시 희망을 찾는 얘기였다. 특히 '행복한 사전'은 일본 아카데미상을 휩쓸며 감독을 차세대 일본 거장으로 불리게 했다.  
 
이번 영화에서 희망은 잡힐 듯 가까워지다 다시 멀어지길 반복한다. 떠들썩한 파티 장소 옆방에선 고통스러워하는 남자가 있고,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 직후에는 떠돌이 강아지가 도살처분 되는 현실이 그려진다. 죽음은 서서히, 혹은 돌연히 닥쳐온다.  
 
“세상의 양면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 했어요. 죽음을 명확히 인식하지 않는 한 삶도 똑바로 볼 수 없으니까요. 도쿄 같은 대도시에 살다 보면 죽음이란 것이 누군가에 의해 끊임없이 가려지고 은폐된다는 느낌을 받게 되죠. 제대로 죽음을 마주하지 않기 때문에 삶에 대한 허무감도 점점 커지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랑은, 이런 흉터투성이 도시의 밤에 투명하게 내린 이슬처럼 스며든다. 마치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만을 위한 선물처럼. 어느 밤 자전거로 어지러운 유흥가를 내달리던 미카는 저만치 앞서가는 남자가 신지란 걸 곧바로 알아본다. 신지가 과자 먹는 소리가 미카에게만 유독 크게 들리는 듯 표현되더라고 하자 감독이 “발견해준 사람이 처음”이라며 반가운 기색을 내비쳤다.  
 
“도시를 걷다 보면 여러 소음이 혼재돼 들려오죠. 그중 어떤 소리를 들을지는 각자에 달린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신지가 나타난 순간, 미카에겐 그가 과자 먹는 소리만이 들립니다. 불쾌하고 좋지 않았던 다른 소음들은 신지의 존재 뒤에 모두 사라져버리는 거죠.” 
어쩌면 이 영화의 주제다.  
한쪽 시력을 잃은 신지는 여전히 보이는 다른 쪽 눈으로 막연하나마 세상의 빛을 찾으려 애쓴다. [사진 디오시네마]

한쪽 시력을 잃은 신지는 여전히 보이는 다른 쪽 눈으로 막연하나마 세상의 빛을 찾으려 애쓴다. [사진 디오시네마]

 
“도쿄는 왠지 모르게 갑갑하고 괴롭고 슬픔이 쌓인 인상이에요.”(이시바시 시즈카)
“적어도 지금 도쿄에서 신지처럼 타인을 생각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제 주변엔 없는 것 같아요.”(이케마츠 소스케) 주연 배우들의 말이다. 감독은 이런 도쿄에도 “희망이 있단 말은 곧 죽어도 제 입으로 하기 힘들지만, 그런 암흑 속에 빛을 찾아내는 게 영화감독의 일”이라 했다.  
 
“요즘 일본에선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장래에 대한 불안도 크고요. 어떤 게 행복이고 풍요인지 삶의 대원칙을 너무 수십 년간 생각해보지 않고 살아온 게 문제 아닌가, 싶어요.”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와 영화 개봉에 맞춰 한국을 자주 찾았던 그는 “일본에선 최근 저처럼 수입이 불안정한 프리랜서 감독도 줄어드는 추세”라며 “한국 관객에게 매번 힘을 얻는다”고 했다. “빈말이 아니라 한국에 올 때마다 상당히 기대합니다. 한국 관객들은 영화를 깊이 봐주시니까요. 작가로서 자극이 될 만한 질문도 많이 해주시죠. 항상 영화를 만들고, 살아가는 데 있어 소중한 힌트를 얻어가고 있습니다.”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한 장면. [사진 디오시네마]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한 장면. [사진 디오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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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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