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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말도 안 통하는 미군들 상대로…” 기지촌 여성의 비애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의 집창촌 속칭 ‘옐로하우스’의 업소 철거가 지난 16일 시작됐다. 1962년 생겨난 이곳에 지난달 철거 최후통첩이 날아온 데 이어 중장비가 들어왔다. 10여 개 업소의 성매매 여성 20여명은 갈 곳이 없다며 버티고 있다. 철거가 시작되면서 불상사에 대한 우려도 커진다. 벼랑 끝에 몰린 여성들이 마음속 깊이 담아뒀던 그들만의 얘기를 꺼냈다. 성매매 여성 B씨(53)의 증언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집창촌에서 벌어진 일들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지난 16일부터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 집창촌 옐로하우스에서 철거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사진 옐로하우스 이주대책위원회 제공]

지난 16일부터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 집창촌 옐로하우스에서 철거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사진 옐로하우스 이주대책위원회 제공]

옐로하우스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는 기사가 나갈 때마다 많은 댓글이 쏟아졌다. 지난 16일 이들의 정신적 고통을 다룬 기사에도 포털사이트 네이버와 다음에 각각 2000개 넘는 댓글이 달리며 독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다양한 관점이 표출되는 가운데 성매매 여성들이 겪는 고통에 국가의 책임은 없느냐를 두고서도 상반된 의견이 맞섰다. 
 
한 네티즌(every******)은 ‘이 사람들도 열심히 그 상황에서 노력하며 산 사람들인데…제발 정부에서 도와주세요’라는 생각을 적었다. 
 
반면 다른 네티즌(sacr****)은 ‘공장 다니면서 열심히 사시는 분들도 많은데 본인이 원해서 성매매 업종 종사 하시는 분들이 왜 꼭 세상 탓, 남의 탓, 나라 탓을 하는지 이해가 안가네요’라고 썼다. 
 
성매매와 국가의 관계를 얘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장소가 군부대 주변 집창촌이다. ‘옐로하우스 비가(悲歌)’ 시리즈가 나가는 동안에도 기지촌을 언급한 시민들이 많았다. 
 
‘돈되는 건 무엇이든 해야만 했던 시절...대일청구권자금,관광(기생관광,미군집창촌),재벌기업특혜...할 수 있는건모두 다했지.’(umdy****) 
 
‘옛날에는 인신매매가 많았다. 군부대 동네는 방석가게 투성이였음.’(skat****) 
 
2000년대 들어 집창촌 여성들이 겪어온 고통에 국가는 책임이 없는지 법적으로 따져보자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2014년 6월 미군 기지촌에서 일했던 여성 117명이 국가를 상대로 한 사람당 1000만원씩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면서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재판은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과연 군부대 기지촌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옐로하우스 여성 B씨에게 물었다.
 2017년 1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 소송 1심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참석자가 사죄 촉구 관련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2017년 1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 소송 1심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참석자가 사죄 촉구 관련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그는 직접 미군 대상 업소에서 일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같은 업소 여성들을 통해 기지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전해 들을 수는 있었다고 한다. 
 
부산 완월동 집창촌에서 일본 야쿠자 등을 상대하며 약물에 중독됐던 B씨는 삶에 대한 비관으로 극단적 시도까지 저지른 뒤 완월동에서 빠져나왔다. 업소에 진 빚이 없어 감시를 심하게 받지 않았기에 잠깐 물건을 사 오겠다며 도망칠 수 있었다. 
 
그는 성매매를 더는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망가진 몸으로 차마 집에는 갈 수 없어 완월동에서 함께 일했던 언니에게 연락했다. “먼저 일을 그만두고 결혼해 평범하게 살고 있었는데 1년 넘게 저를 돌봐줬어요. 제 평생 가장 고마운 사람입니다.” 
 
미군 만행에 사회적 이슈 떠올라  
 
완월동 사람들 전화번호를 다 지우고 언니 집에서 지내며 겨우 약을 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몸은 추슬렀지만 다시 살길이 막막했다. 결국 B씨가 찾아간 곳은 경기도 평택의 집창촌 ‘쌈리’다. ‘그렇게 고생하고도 왜 다시 이 일을 택했느냐’고 묻자 그는 “다른 일로는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없는 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해 취직하기가 녹록지 않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쌈리는 과거 평택3리(현 평택동)에서 딴 이름으로 평택역과 가깝다. 이곳은 미군 부대를 상대로 한 집창촌은 아니다. 홍성철 작가의 『유곽의 역사』에 따르면 한국전쟁 직후 평택역 인근 서정리와 안정리, 송탄 신장리 등에 미군 부대원들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기지촌이 발달했다. 1960대 안정리에는 ‘양공주’라 불리는 성매매 여성이 2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경기도 평택시 오산공군기지 주변의 미군 클럽. [사진 독자 제공]

경기도 평택시 오산공군기지 주변의 미군 클럽. [사진 독자 제공]

해방 이후 서울 용산, 인천 부평동, 경기도 평택·동두천, 전북 군산, 부산 범전동 등 미군 부대가 있는 곳곳에 기지촌이 형성되면서 집창촌이 생겼다. 옐로하우스 역시 미군 부대와 인연이 있다. 50~60년대 옆 동네인 용현동·학익동에 미군이 주둔했기 때문이다. 옐로하우스라는 이름은 62년 처음 조성될 때 근처 미군 부대에서 노란 페인트를 얻어 와 벽에 칠한 것에서 유래했다. 
 
사회에서 소외됐던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관심이 폭발한 사건이 92년 발생했다. 동두천 기지촌 술집 종업원이었던 윤금이씨 살해 사건이다. 당시 20세였던 주한 미군 제2사단 소속 케네스 마클 이병은 우산대와 콜라병 등으로 윤씨의 몸을 잔인하게 유린하며 살해했다. 충격을 받은 시민들은 대규모 항의 시위를 벌였다. 마클 이병은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2006년 가석방됐다. 
 
성매매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는 계속됐다. 99년 동두천 한 주택에서 45세 여성이 참혹하게 살해됐다. 침대에는 빨간 립스틱으로 ‘Whore(매춘부)’라고 적혀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이 여성은 미2사단 캠프 케이시 앞 유흥가에서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한 것이 밝혀졌지만 결국 범인을 찾지 못했다. 
 
최근까지도 미군을 두려워하는 성매매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옐로하우스에서 만난 한 여성은 “동두천 여성들은 덩치 큰 미군들이 무서워 주말이나 밤에 잘 돌아다니지 않았다더라”고 말했다. 
 
2010년을 전후해 2년 정도 동두천 집창촌에 있었다는 또 다른 옐로하우스 여성은 좀 다른 기억을 얘기했다. 그의 말이다. “의외로 그렇지 않아요. 매너 좋고 약속 잘 지키고요. 뭐든 ‘노(No)’라고 하면 존중해 줬어요. 근처에 양키시장이 있어 평일에는 미국인 바이어들도 자주 왔는데 이런 일 한다고 무시하지 않고 편견 없이 대해줬어요.” 
 
B씨가 평택에 있을 때 미군 장교와 결혼해 친정처럼 그곳을 찾던 여성도 있었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의 국적이 한국에서 필리핀·러시아 등으로 바뀌었다. 
 
평택의 역사를 연구해 온 한 지역 역사가는 “평택은 미군기지 이전에 대한 기대로 외부자본이 많이 들어와 환경이 바뀌고 있다”며 “현재 기지촌 여성은 거의 없고 유명 클럽 역시 대부분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 여성들이 특수관광 형태로 들어왔지만 한국 여성들이 있을 때 사실상 한국 정부가 관리하던 것과 달리 관리가 어려워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지촌이 형성된 평택 안정리의 미군 클럽. 현재는 문을 닫았다. [사진 독자 제공]

기지촌이 형성된 평택 안정리의 미군 클럽. 현재는 문을 닫았다. [사진 독자 제공]

 
 
B씨는 90년대 후반 경찰의 대대적 단속 때문에 평택을 떠났다. 이후 잠시 머무른 곳이 포항이다. 포항역 앞 집창촌은 해병대 1사단과 가까웠다. “해병대 군인들이 가끔 단체로 오기도 했어요. 사고 치면 바로 헌병이 달려오니까 행동을 함부로 못 했어요.” 
 
홍성철 작가는 『유곽의 역사』에 “해병대뿐 아니라 미군들도 주 고객이 됐다. 특히 팀스피리트 훈련이 있을 때는 아예 동두천이나 의정부, 평택 등지에서 기지촌 여성들이 포항에 내려와 일부 업소를 빌려 성매매를 하곤 했다”고 썼다. 
 
여성들이 증언하는 기지촌 생활과 관청의 대응 등을 종합하면 군부대 인근의 집창촌에 모종의 역할을 바라는 행태는 분명히 존재했다. B씨의 주장이다. 
 
“기지촌 여성들이 말도 안 통하는 미군들을 상대하며 무언가 역할을 한 셈입니다. 당시에 여성들 사이에선 외화벌이로 경제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했다는 나름의 자부심도 있었어요. 인권이 뭔지도 몰랐고 그냥 팔자라고 여기고 살았으니까요.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법원 “국가가 여성들에 배상해야” 
이런 여성들의 아픔과 정부에 대한 원망이 5년 전 소송으로 표출된 셈이다. 
 
미군 기지촌 여성들은 “정부가 불법적으로 기지촌을 조성해 운영하고 ‘애국교육’으로 성매매를 정당화했을 뿐 아니라 강제 격리해 성병 치료를 했다”고 주장했다. 
 
성매매 여성들의 피해에 국가가 책임이 있는지를 따지는 3년여의 법정 공방이 이어졌고 법원은 여성들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해 2월 서울고법 민사22부(이범균 부장판사)는 “정부는 43명에게 각각 300만원씩, 74명에게 각각 700만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각종 공문에 ^외국군 상대 성매매에 있어서의 협조 당부 ^주한미군을 고객으로 하는 접객업소의 서비스 개선 등이 적혀있다고 지적했다. 공무원들이 기지촌 위안부들을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로 치켜세우거나 ‘다리를 꼬고 무릎을 세워 앉아라’ 등의 내용을 직접 교육한 점도 고려했다. 
 
재판부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기지촌 성매매를 시작했더라도 정부가 이를 기화로 이들의 성과 인간적 존엄성을 군사동맹의 공고화 또는 외화 획득의 수단으로 삼은 이상, 이들의 정신적 피해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117명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던 여성들은 훨씬 많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소송이 이어질지 지켜봐야 한다. 
 
최은경 기자 choi.eunkyung@joins.com 
 
<14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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