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졸업식날 입으라고 오빠가 입던 나팔바지 줄여준 엄마

기자
김명희 사진 김명희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5)
입춘 절기와 함께 찾아왔던 설 명절이 지나고 반짝 추위가 이어지고 있다. 살갗으로 파고드는 기온은 아직 겨울이지만 2월의 찬바람 속에 봄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느끼는 요즘이다. 설이 지났으니 연례행사처럼 바야흐로 졸업시즌이다. 나도 막내가 올해 간호대학 졸업반이라 이달 14일에 졸업식장에 가려 한다. 생각만 해도 기쁜 일이다.
 
서울 경희대에서 졸업생이 꽃다발과 선물을 한 아름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중앙포토]

서울 경희대에서 졸업생이 꽃다발과 선물을 한 아름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중앙포토]

 
오빠와 부모가 준비할 자신의 대학 졸업 축하선물이 무엇일까 기대하는 딸의 모습을 훔쳐본다. 대학 졸업과 사회 첫출발 그 끝과 새로운 시작의 경계에 선 나의 딸. 행복과 기쁨에 들뜬 아이의 해맑은 모습을 보면 나까지 정말 행복하다. 마침 우리 부부는 이번에 작품 취재차 해외에 다녀오면서 딸의 졸업선물로 사파이어 목걸이 핑크와 블랙 두 가지를 세트로 준비했다.
 
엄마·아빠로부터 뜻밖의 보석선물을 건네받은 딸의 미소는 생각보다 더 눈부셨다. 외출할 때마다 목걸이가 마땅치 않아 늘 아쉬웠다는 아이의 말에 우리 부부는 목걸이 선물을 준비하길 참 잘했구나 생각했다.
 
이 글을 쓰다가 문득 깊숙이 감춰두었던 내 오래전 국민학교 졸업사진을 꺼내보았다. 요즘 시쳇말로 웃픈(웃픈: 웃기다와 슬프다의 합성어) 사연이 그 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졸업과 입학에 대한 좋은 기억이 전혀 없다. 대부분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이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나와 같은 쓸쓸한 추억을 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나는 분명히 부모가 있었다. 위로 나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언니도 있었고 나보다 네 살 두 살 위인 오빠도 둘이나 있었다. 2남 2녀 중 내가 막내였던 셈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집안의 귀여움과 전폭적인 물심의 지원을 독차지해야 했을 막내인 나는 초등학교부터 졸업과 소풍, 입학을 모두 고아처럼 나 혼자 해결해야 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보니 이미 아버지는 아프셨다. 늘 그렇게 성장했으니 그게 어떤 상황인지조차 모른 채 그저 그런가 보다 하며 성장했던 시절이다. 다만 언뜻언뜻 나를 바라보는 친구 부모님들 시선 속에 담긴 묘한 연민의 눈길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평소에는 몰라도 졸업과 입학의 상징이었던 꽃다발도 내겐 건네주는 이가 없었다.
 
그 당시 아버지는 여섯 가지 합병증 환자로 늘 집에 누워계셨다. 어떻게든 여섯 식구가 먹고살 돈벌이를 찾던 엄마는 경기도 용문면에서 일할 곳이 마땅치 않자 일자리가 많은 서울로 언니와 큰오빠를 데리고 이사했다. 셋은 용문에 셋은 서울 강동구 하일동에 이렇게 두 집 살림하게 됐다. 엄마는 병든 남편 대신 새벽부터 노동판에 계셨다.
 
세상에 태어나보니 아버지는 아주 아프셨고 우리 집은 가난했다. 엄마는 이화 벽돌공장에서 일하며 식구들을 먹여 살리셨다. [중앙포토]

세상에 태어나보니 아버지는 아주 아프셨고 우리 집은 가난했다. 엄마는 이화 벽돌공장에서 일하며 식구들을 먹여 살리셨다. [중앙포토]

 
그러다 보니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 밤에 막차로 경기도 용문면 집에 오셨다가 밑반찬을 해놓고 서둘러 다음날인 일요일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시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언니와 큰오빠도 남들처럼 공부할 형편이 못되어 일찍 엄마 따라 서울로 가 공장생활을 했다.
 
오늘은 내가 국민학교 졸업했던 날의 에피소드를 말하려 한다. 이것은 내가 싫어하는 기억 중 하나다. 우리는 저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한두 개는 있다. 나도 평소에는 이 기억을 꺼내지 않지만, 오늘은 한 번 꺼내보기로 한다.
 
그날도 서울 하일동 이화 벽돌공장에서 일하던 엄마가 토요일 일을 마치고 밤 기차로 용문에 내려오셨다. 용문 집에는 중학생인 작은 오빠와 그 당시 심한 병을 앓으셨던 아버지와 내가 사는 단칸 셋방이 있었다. 마침 다음 주에 나는 국민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있었다.
 
2월 추운 한겨울임에도 너무 오래 입은 내 바지는 심하게 찢어지고 낡았던 기억이 난다. 6년 전 국민학교 입학 때쯤 샀던 그 바지는 여섯 해 동안 밑단과 통을 늘이고 늘이다 생명을 다하고도 훨씬 지난 뒤였다. 입을 것이라곤 그것 하나인데 더는 입기 어려울 만큼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그때 엄마는 공장에서 나왔어야 할 월급이 나오지 않아 빈손으로 내려오신 눈치였다. 엄마는 내일이면 다시 서울로 상경해야 월요일에 출근할 수 있었다. 엄마가 돈을 갖고 오지 못해 수중에 돈이 없으니 아버지의 분노와 극에 다다른 술주정은 또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 나는 그날 밤도 밤새 내 머리 위로 집안 물건이 날아다닐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눈치껏 일찍 눈을 감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척했다.
 
비좁은 방에서 내 귓가에 엄마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싹둑싹둑 무쇠 가위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 소리가 궁금해진 나는 참다못해 이불을 밀치고 일어나 엄마를 보았다. 엄마는 아직 2월인 그때 큰오빠가 유행 지나 입지 않는 여름 기성복 바지를 어딘가에서 찾아내 수선 중이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체크무늬 검은 나팔바지를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인 내가 입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가위질 소리를 듣고 잠자리에서 일어나보니 엄마가 오빠의 철 지난 나팔바지를 수선 중이셨다. [중앙포토]

가위질 소리를 듣고 잠자리에서 일어나보니 엄마가 오빠의 철 지난 나팔바지를 수선 중이셨다. [중앙포토]

 
엄마는 신중하게 나팔바지의 절정이 시작되는 활짝 펴진 무릎쯤을 싹둑 잘라 밑단을 한 뼘이나 접어 안으로 욱여넣고 시침질을 하고 계셨다. 나는 말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밑단을 한 뼘이나 접어 안으로 넣어 바느질한다는 것은 그만큼을 사철 계속 늘려가며 여자인 내게 입히겠다는 뜻이었다.
 
언니 바지도 아니고 엄마 바지도 아니고 왜 하필 큰오빠가 입었던 유행 지난 남자 나팔바지인가. 더구나 모두 나름 최대한 멋을 내고 꽃다발 안고 사진 찍을 국민학교 졸업식에 입어할 내 바지가 바로 그것이라니. 무서운 아버지 앞이라 투정이나 불평할 엄두를 못 냈던 나는 말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거리며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차라리 발가벗고 가면 갔지 도저히 그 남자 바지를 입고 졸업식에 갈 자신이 없었다. 그 바지를 입고 졸업식장에 들어선 나를 보면 남학생 여학생 친구들이 과연 뭐라 할까? 정말이지 너무 창피했다. 나는 그 순간 밤새워 지구의 종말이 찾아와 나에게 내일이 절대 오지 말기를 바랐다. 그때부터 나는 잠도 오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절대 그 바지를 입는 일은 없을 것이라 다짐하며 새벽 늦게 잠이 들었다.
 
아침에 깨고 보니 엄마는 이미 서울로 돌아가시고 난 후였다. 내 머리맡에는 한눈에 봐도 성인 남자 바지인 것이 확 표가 나는 그 괴물이 가지런히 접힌 채 놓여있었다. 그 공포의 남자 바지가 체크무늬 나팔바지가 나를 향해 웃었다. 그러나 사흘 후 초등학교 졸업식장에 나는 아얏소리도 못한 채 그것을 입고 고삐에 끌려가는 소처럼 홀로 교정으로 들어서야만 했다.
 
수선한 남자 바지를 입고 졸업식에 가려니 너무 창피했다. 당시에는 속상했지만, 지금은 그 당시를 버텨준 철인이자 여장부이셨던 엄마에게 감사하다. [사진 김명희]

수선한 남자 바지를 입고 졸업식에 가려니 너무 창피했다. 당시에는 속상했지만, 지금은 그 당시를 버텨준 철인이자 여장부이셨던 엄마에게 감사하다. [사진 김명희]

 
졸업식이 있던 날 아침 아버지는 내 앞에 그 바지를 내놓으시며 성한 옷은 이것뿐이니 군소리 말고 입고가라며 도끼눈을 뜨셨다. 워낙 무서웠던 아버지 앞에 저항이나 투정이란 허용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아버지께 작게라도 대들거나 투정을 부리면 ‘자식새끼 교육 더럽게 가르쳤다’고, 그 모든 결과를 엄마가 매와 폭력으로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입고 가서 찍은 나의 졸업사진. 그날도 내 가슴엔 꽃다발은커녕 멋진 옷과 신발도 없었다. 그러나 낡은, 그것조차도 엄마의 노동 대가로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을 지금은 너무 잘 알고 있다. 또한 덕분에 이런 웃픈 추억 한장도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세월이 흐른 지금 엄마는 팔순을 앞에 두고 계신다. 엄마와 그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우리 모녀는 어처구니없어 웃곤 한다.
 
엄마는 내게 ‘너무 없이 키워 미안했다’고 하시지만 그게 어디 엄마 탓이랴. 나는 가끔 그 시절을 돌아볼 때마다 철인이자 여장부이셨던 엄마가 버텨준 것이 감사하다. 엄마의 그 모진 희생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고 이번에 내 딸이 웃으며 대학 졸업식장에 갈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금 엄마의 그 큰 희생과 어린 막내딸에게 남자 바지를 입힐 수밖에 없었을 캄캄한 슬픔이 전해져 가슴이 먹먹해진다.
 
김명희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