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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말이 칼이 될 때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이 XX 같은 XX아, 일 그렇게밖에 못하겠어?”
 
이른 새벽 수화기 너머로 쏟아지는 욕설에 몸서리치던 날들이 있었다. 제대로 된 취재는 고사하고 보고조차 서툴렀던 수습 기자 시절, 날마다 무슨 일용할 양식처럼 꾸역꾸역 욕을 먹곤 했다. 나름대로 곱게 자라 난생처음 욕을 듣는 데다 남도 출신인 선배의 어휘력이 워낙 풍부한 탓에 적잖이 고통스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타사 동료가 보다 못해 전수해준 요령이 그나마 도움이 됐다. 욕이 들려오면 전화를 멀찍이 뗐다가 잠잠해지면 귀에 갖다 대고, 또 시작된다 싶으면 다시 치우라는 거였다.
 
그땐 그랬다. 요즘 같으면 언어폭력으로 문제 삼고도 남겠지만 당시엔 다들 꾹 참고 넘겼다. 그 선배도 선배에게, 그 선배의 선배도 선배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어가며 일을 배워야 했으니 말이다. 이른바 욕의 대물림이라고 할까.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얼마 안 가 그 대(代)가 끊기게 됐다는 거다. 일단 나부터도 후배들에게 상스런 말을 한 마디도 쓴 기억이 없다. 시집살이 세게 겪은 며느리가 모진 시어머니 노릇 한다는데 적어도 내가 속한 업계에선 몹쓸 악순환의 고리가 진작에 끊어진 셈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 곳곳엔 여전히 위험 수위의 욕설이 범람한다. 설 연휴 직전에 보도된 어느 회장 부인의 검찰 공소장만 들여다봐도 그렇다. 상상을 초월하는 갑질과 함께 직원들에게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을 내뱉은 사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만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험한 말들을 입에 올렸다는 것 자체가 내겐 물건을 집어 던지고 얼굴에 침을 뱉은 행위 못지않게 충격적이었다. 하기야 ‘삐’ 소리로 점철된 기업 대표며 대학교수의 녹취가 하루가 멀다 하고 공개되는 판이니 누군가의 사회적 위치와 말의 품위는 전혀 별개라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보이지 않는 칼’. 전문가들은 언어폭력을 이렇게 정의한다. 말로 받은 마음의 상처는 몸에 난 상처보다 훨씬 깊게 새겨져 더욱 오래 가기 때문이란다. 지속적으로 말 폭탄에 노출된 경우의 피해는 예상을 뛰어넘는다. 우울과 불안을 겪게 될 뿐 아니라 뇌의 연결 회로에 문제가 생겨 언어 능력이나 이해력 저하까지 나타난다고 한다(하버드대 의대-가톨릭대 의대 공동 연구). ‘손찌검이나 발길질도 아닌 그깟 말쯤이야…’라며 가벼이 여길 일이 결코 아니란 얘기다.
 
갈수록 거칠어지는 정치권의 언어가 걱정스러운 것 역시 그래서다. 걸핏하면 터져 나오는 몰상식한 혐오와 차별의 언어는 가히 고질병 수준이다. 그에 더해 도를 넘는 모욕의 표현이 횡행하는 것도 볼썽사납기만 하다. 얼마 전 정부 관련 의혹을 폭로한 이들에게 “미꾸라지” “피라미” “꼴뚜기” “망둥이” 등 어물전을 총동원한 듯한 공격이 쏟아진 게 한 예다. 개·돼지·말 따위의 육상 동물에 빗댄 것과 다를 것이 무언가. 비단 당사자들뿐 아니라 건네 듣는 국민들의 정신 건강에도 하등 좋을 게 없을 터다.
 
욕설에 카타르시스의 효과가 있고, 심지어 물리적인 고통을 완화시킨다는 주장도 있긴 하다. 극심한 산고를 겪는 산모들이 무의식중에 사나운 말을 해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란다(『우리는 왜 위험한 것에 끌리는가』, 리처드 스티븐스). 하지만 이런 욕은 상대를 깎아내리거나 흠집 내려는 목적이 없는, 즉 폭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특징이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악담을 퍼붓는 욕쟁이 할머니를 아무도 위협으로 느끼지 않는 것과 흡사하다. 작정하고 내지르는 공격적인 욕설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옛말에 “혀엔 뼈가 없지만 심장을 찢어버릴 만큼 힘이 세다”고 했다. 그러니 너나없이 세 치 혀를 쓰는 일에 좀 더 조심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말이 칼이 될 수 있다는 건 언젠가 그 칼날이 자신을 향해 되돌아올 수도 있다는 소리일 테니 말이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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