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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의 시시각각] 진실은 저절로 지켜지지 않는다

권석천 논설위원

권석천 논설위원

우린 늘 진실이 승리하길 바라지만 현실은 다를 때가 많다. 그것은 진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기득권이나 돈벌이, 자신의 믿는 바를 위해 진실을 음해하고 왜곡하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부정한다(Denial)’는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다.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부정론을 비판해온 미국 교수 데보라 립스타트의 출판 강연회에 영국의 자칭 역사학자 데이비드 어빙이 나타난다. “히틀러의 학살 명령을 증명하는 기록을 가져오면 1000달러 주겠다.” 어빙은 청중을 향해 지폐 다발을 흔든다. 그는 뒤이어 “립스타트의 책이 내 명예를 훼손했다”며 런던 법원에 제소한다.
 
‘No Holes. No Holocaust(구멍은 없다. 홀로코스트도 없다).’ 재판에서 어빙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 지붕 사진에 독가스를 주입한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한다. 이 단순한 프레임은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빈틈 하나를 비집고 들어가 전체를 뒤흔드는 어빙의 전략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아우슈비츠를 찾은 립스타트의 변호사는 연구자들에게 집요하게 묻는다. “그 증거가 뭡니까.”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급기야 분통을 터뜨린다. “왜 50년이 지나도록 이곳 전부에 대해 과학적인 조사를 하지 않은 거죠?”
 
그렇다. 진실은 저절로 지켜지지 않는다. ‘홀로코스트 부정하기’가 좌판을 벌인 건 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이 넘도록 과학적·체계적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란 확신이 오히려 음모론의 온상이 돼버린 것이다.
 
“5·18은 폭동이다.” “북한 특수군이 일으킨 게릴라전이다.” “5·18 유공자란 괴물집단을….” 숨 막히는 망언들이 국회에서 쏟아졌다. 이를 두고 판사 출신이라는 야당 원내대표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국민을 대표할 자격이 없는 사람은 국회에 있을 이유가 없다.
 
고통스러운 건 그들이 사라져도 ‘5·18 부정하기’는 그치지 않으리란 것이다. 별로 닮지도 않은 얼굴 몇 개를 앞세워 ‘북한군 5·18 개입’을 주장하는 이들은 계속해서 출몰할 것이다. “헛소리에 굳이 대꾸할 필요가 있어?” 이런 속삭임을 웃어넘겨선 안 된다.
 
따지고 보면 ‘5·18 부정하기’도 철저하고 지속적으로 조사하기보다 정부 바뀔 때마다 재조사만 거듭했던 탓이 크다. 그러는 사이 ‘전두환 회고록’ ‘이순자 자서전’이 나왔고, 신봉자들의 부흥 집회가 열렸다. 이들에 맞서 진실을 지키려면 끊임없이 조사하고, 증거와 기억을 보존하고, 책을 쓰고, 싸워야 한다. 노력하지 않아도 진실은 지켜질 거란 환상부터 버려야 한다.
 
5·18은 예고편일 뿐이다. 10년, 20년 뒤엔 세월호 참사가 조작됐다는 주장이 국회에 등장할지 모른다. 당장 세월호 유족 단식 현장에서 피자와 치킨을 뜯어 먹던 자들이 있지 않은가. 최순실 게이트와 국정농단, 사법행정권 남용을 놓고도 밑도 끝도 없는 음모론과 조작설, 그리고 ‘다양한 해석들’이 제기될 것이다.
 
단언컨대, 시간이 흐르고 때가 되면 사이비 정치인과 유사 법조인, 자칭 역사학자들이 “증거를 가져오라”며 돈다발을 흔들어댈 것이다. “내 두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면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다.” ‘No Holes…’라는 영화 속 헤드라인은 현실에서 ‘△△△ 없으면 ○○○도 없다’는 프레임으로 변주될 것이다.
 
악(惡)은 성실하다. (드라마 ‘귓속말’) 1㎜의 작은 빈틈도 놓치지 않고 악착같이, 지능적으로 파고든다. 진실을 검찰과 법정에만 맡겨선 안 되는 이유다. 진실이 중요하다면 그만큼 더 진실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싸움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각자 선 자리에서 차갑게 분노하고, 우리의 성실함으로 악의 성실함을 이겨내야 한다.  
 
권석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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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