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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훈 칼럼] 하노이 회담장을 서성거릴 고약한 세 유령들

최훈 논설주간

최훈 논설주간

오래된 세 유령이 되살아났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하노이 회담장을 찾아 서성거릴 녀석들이다. 우선 현실주의. 20세기를 누비던 미국 외교 원칙의 부활이다. 미국 대외정책엔 늘상 “선한 사마리아인의 도덕적 의무”란 라벨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백악관 내 ‘결단의 책상((Resolute desk)’에 놓인 전략 타깃은 그 말과는 판이했다. 한 대국의 유라시아 대륙 지배를 저지하는 ‘세력 균형’이었다. 미국 국익에 적대적 팽창을 꾀할 대국이란 러시아 이전의 소련과 독일, 일본이었다. 조지 F 케넌 전 주소련 대사는 현실주의를 간명히 요약했다. “민주국가들이 세 강국 가운데 하나의 도움 없어도 물리칠 나라는 일본뿐이었다. 독일과 소련이 힘을 합치면 절대 물리칠 수없다. 이 둘 중 하나와 맞붙을 경우, 다른 한 나라의 협조를 얻어야 격퇴가 가능했다.”(『미국외교 50년』) 가장 진보적인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조차 나치독일과 싸우려고 ‘학살자’ 스탈린과 덥석 손잡은 이유였다.
 
66년 전 한반도의 정전(停戰) 역시 현실주의의 산물이었다. 미국과 소련 모두 38선을 뛰어넘는 3차대전을 원치 않았다. 2차대전 뒤 유럽의 한 축인 독일이 무너지고 동쪽 절반이 소련의 붉은 빛으로 물들어 왔다. 다급해진 영국까지 지구 동쪽 변방의 휴전을 채근할 수밖에 없었다. 정전된 한반도는 김정은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에 미국이 눈을 부릅뜨기까지 ‘냉전시대의 희미한 유물’로 기억 속에 갇혀 있었다.
 
소련 붕괴 뒤 미국의 냉혹한 현실주의를 부활시킨 건 남중국해 진출과 일대일로(一帶一路)로 포효하던 ‘21세기의 소련’  중국이었다. 때로는 어르고(engage), 가끔은 격퇴(rollback)해 가면서 이 괴물을 봉쇄할 신현실주의는 지금 미국 외교를 지배하는 십계명이다. 북·미 회담 역시 ‘핵’과 ‘돈’의 산술적 맞교환 외엔 평화나 한반도의 통일국가 비전 등 어떤 가치의 고민도 없을 뿐이다. 아마도 스탈린과 거리를 유지하며 서방과도 교류한 독자적 사회주의였던 유고의 티토(Tito)체제같은 북한을 미국이 꿈꾼다면…. 중국과 떼어놓아야 할 김정은에게 트럼프가 통큰 선물을 건네며 적당히 타협하고 싶은 유혹을 참긴 힘들 것이다.
 
최훈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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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그리고 민주주의·사회주의 이념보다 오래 묵은, 가장 잔인한 유령은 ‘민족주의(nationalism)’다. ‘미국 최우선(America First)’을 내세워 보호무역과 이민·국경 봉쇄, 동맹에의 국방비 전가 등을 강행하며 민족주의 붐을 이끈 건 바로 트럼프다. 시진핑(중국굴기), 아베(정상국가), 푸틴(차르의 귀환) 모두 질세라 자국의 실리를 외교 어젠다의 최상단에 올려놓았다. 이 민족주의의 강자들 틈새에서 대한민국의 이해를 지켜내기란 광풍노도 앞 촛불의 운명에 다름아니다.
 
하노이를 배회할 세 번째 악령. 남미가 원조였던 포퓰리즘이다. 올 국정연설에서 트럼프는 자신의 외교 기조를 “통제력있는 현실주의(disciplined-realism)”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가 애용한다는 마이크 타이슨의 이 말이 보다 더 진실일 듯하다.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을 갖고 있지…. 턱주가리에 한 방 먹을 때까지는.”  “내가 없다면 지금 북한과 전면전 중일 것”이란 트럼프에게 “ICBM 제거로 미국 안전을 지켜냈다”는 하노이의 트윗 한 방이야말로 더 힘든 유혹일 것이다. 내정(內政)의 포퓰리즘이야 선거로라도 심판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애국주의로 포장, 선동하는 포퓰리즘이 외교와 뒤섞이면…. 결과엔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결과의 복원도 불가능하다. 남은 고통은 악마 같은 디테일에 죽고 살 약자들의 몫이다.
 
‘장사꾼 대통령’의 증강된 현실주의, 거기에 민족주의·포퓰리즘까지 가세한 유령들의 장난질은 이런 협상 결과를 낳을 수도 있겠다. ‘미국 안전을 위협하는 북한 ICBM 제거와 상당한 제재 해제를 교환한다. 남은 비핵화는 단계적으로 추진. 미국이 북한을 불가침하는 종전선언을 선사한다. 트럼프는 미국이 안전해졌다며 뮬러 특검을 피해 재선 가도로 내달린다.’
 
한국전 당사자인 우리에게 이런 ‘종전의 기쁨’은 허구일 뿐이다. 과연 무엇이 달라지는가, 정전과. 핵무기·핵물질 폐기의 검증에 지루한 곡절을 겪으며 어딘가 숨어 있을 핵을 근심으로 이고 가야 하는 건가. 미국의 중국 봉쇄 거점은 과연 일본인가, 한국인가. 역사상 미국의 종전은 대개 적의 무조건 항복(독일·일본·이라크) 아니면 철군(베트남·시리아·아프간)의 수순을 밟았다. 종전이란 허울 아래 미군 감축과 철수가 늘 화근의 불씨로 남는 건 아닐까. 북한의 100만 대군과 재래식 전력, ‘전국적 범위의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과업 완수’라는 노동당 규약엔 무슨 변화가 있을 건가. 무엇보다 종전 이후 우리 내부 양 극단 세력의 ‘광장 대치’야말로 더 험악해지진 않을까…. 고약한 세 유령에 맞서 우리의 안전과 평화를 지켜야 할 하노이 협상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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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