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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의 퍼스펙티브] “바이두는 베이징역에서 대놓고 촬영하는데… ”

한국형 CES에서 본 한국
‘한국 전자 IT산업 융합전시회’(일명 한국형 CES·소비자가전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반가운 마음 가득했다. 우리가 마주하는 여러 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근본 해법은 성장이다. 이제 더는 성장정책이 별 의미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성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성장이 사라진 후에 알게 된다. 다만 예전처럼 정부 주도의 양극적 성장이 아니라 민간 주도의 생태계 성장이어야 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열쇠는 혁신이다. 그런 혁신의 싹을 틔울 수 있을까. 지난달 30일 행사가 열리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향했다.
 
듣던 대로 행사 장소의 문제는 심각했다. 주차장에서 행사장까지 가는 길을 알아내는 것은 방 탈출 게임을 연상케 했다. 어렵사리 행사장에 도착하니 턱없이 작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무리 작게 잡아도 이것의 10배는 되는 공간이 필요하다. 더 심각한 것은 기반시설이었다. 기업들이 야심 차게 준비한 기술을 시연하려고 하는데, 네트워크가 연결되지 않아 말로만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연이어 벌어졌다. 필자도 가상현실(VR) 기기를 코앞에 두고도 말로 설명을 듣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연애를 글로 배운 기분이랄까.
 
취재를 위해 사전에 몇몇 기업의 협조를 얻은 상태에서 갔기 때문에 일반 관람객은 경험하기 어려운 ‘VIP 투어’를 하는 특혜를 누렸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대부분의 대기업은 투어를 전담하는 도우미들에 의존했는데, 기술에 대한 그들의 이해 수준이 낮은 것은 당연했다. 관련 기술을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신기해할 만한 수준의 설명을 친절하게 제공했지만, 기술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사람이 한 걸음만 더 들어가면 답을 하지 못했다.
 
아쉬움 컸던 ‘한국형 CES’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한두 번 기술 관련 질문을 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왜 기술을 잘 아는 기업 담당자들이 직접 설명하지 않을까. 담당자가 직접 나와 설명해야 할 만큼 중요한 사업 파트너는 ‘한국형 CES’에 올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필자가 지켜본 몇 시간 동안 ‘한국형 CES’를 가장 즐긴 사람들은 어린 자녀와 함께 온 가족들이었다. 어른이 보기에도 신기한 기술들은 동심을 매료시켰고, 이다음에 커서 과학자가 되겠다며 기업 관계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한국형 CES’라는 별명은 그리 적절치 않아 보였다. 라스베이거스 CES나 베를린 국제가전박람회(IFA)가 기본적으로 글로벌 비즈니스들이 서로의 혁신을 내놓고 파트너를 모색하는 B2B(기업 대 기업) 만남의 장이라면, 이번 행사는 기업이 아니라 일반인을 위한 행사였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1월 29일 간담회에서 국민이 직접 라스베이거스까지 가지 않고도 세계적 ICT 혁신의 흐름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발언했다고 하니, 한국형 CES는 처음부터 국내 일반인을 위한 것으로 기획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다. 당장 수지맞는 행사는 아니지만, 우리 기업이 어떤 기술을 만들어냈고 어떤 기술을 개발 중이며 세계 시장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국민에게 알리는 것은 장기적으로 막대한 이익이 될 수 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가지게 된 혁신에 대한 존경과 존중은 때로는 도를 넘는 반기업 정서를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다. 그뿐 아니라 많은 국민의 마음속에 혁신의 씨앗을 뿌려줄 수 있다.
 
대기업과 스타트업 기술 격차 실감
 
그러나 여기에 그쳐서는 국내 홍보용 행사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더 나아가 국내 사업 파트너를 위한 행사가 되기를 모색한다면 어떨까. 라스베이거스 CES에 글로벌 기업들이 모인다면 한국형 CES에는 국내 기업들이 모이거나 혹은 아시아 지역 기업들이라도 모여서 경쟁과 협력의 장을 만들 수는 없을까. 안타깝게도 현재로서는 이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였다. 무엇보다 대기업과 스타트업 사이의 기술 격차가 너무 컸다. 두 평 남짓한 부스에 피땀 흘려 개발한 기술을 전시한 채 우두커니 앉아있는 스타트업 관계자의 모습은 마치 척박한 우리의 혁신생태계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우리는 대기업을 향해 상생을 외치지만, 솔직히 내가 대기업 경영자라 하더라도 스타트업과 협력하기보다는 자체적으로 기술을 개발하는 쪽을 택할 것 같았다. 실제 일부 대기업이 사내 벤처 등을 통해 자체 육성하는 스타트업의 경우 유기적인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들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한다면 좋은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기업이 스타트업까지 독점하려 한다는 비판도 나올 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 협력할 수 있는 분야는 단순 하청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로봇 밀도 세계 1위인 한국에서 단순 하청이 설 자리는 빠르게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자생적 스타트업은 기술 격차가 너무 크고, 대기업 사내 벤처는 혁신의 독점이 우려된다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다. 한국형 혁신생태계를 향한 길은 무엇인지 빨리 찾아내야 할 이유다.
 
인간과 함께 하는 로봇 대세
 
한국에서 4차 산업혁명이란 단어는 거의 항상 구체적 내용은 없는 거대 담론으로 쓰이거나 아니면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위기로만 묘사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한국형 CES’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주도해 나가려는 큰 흐름을 찾기는 어려웠다. 관련된 기술이라면 로봇과 인공지능(AI)이었다. 로봇과 관련해서는 더 이상 인간을 대체하는 로봇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하는 로봇이 대세다. 삼성전자가 전시한 웨어러블 기기나 네이버 랩스가 전시한 지능형 로봇팔 등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이나 작업 공간에서 더 쉽게 몸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적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간과 로봇이 따로 일하느냐 함께 일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따로 일하는 대표적인 모델이 조립용 로봇이다. 이것은 인간의 일자리를 대규모로 빼앗아갔다. 함께 일하는 로봇은 같은 일을 훨씬 쉽고 안전하게 할 수 있도록 해주며, 과거에는 육체노동을 할 수 없었던 노인이나 장애인도 일할 수 있게 해준다. 방향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4차 산업혁명은 노동을 업그레이드할 기회이다.
 
데이터 규제에 갇힌 한국 4차산업
 
AI와 관련해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기술의 완성도보다 오히려 사용하는 데이터의 제한성이었다. 문 대통령도 가장 인상적으로 꼽았다는 8K티브이는 AI를 활용해 화질을 개선한다. 원본 이미지를 일부러 여러 차례 다운스케일링 한 후 AI에게 이 이미지를 개선하라고 명령한다. 개선된 이미지가 나오면 이에 대항하는 다른 AI에게 원본이 아닌 개선된 부분을 찾아내라고 명령한다. 두 개의 AI를 경쟁시키는 것이다.
 
원래의 AI는 대항 AI가 구별하지 못하는 개선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끝없이 해결책을 찾는다. 사람을 대신해 수 없는 시행착오를 반복해준 AI 덕분에 우리는 믿기 어려운 고화질을 눈앞에 보게 된다.
 
이처럼 모든 AI는 학습의 재료가 되는 데이터가 필요하다. 이세돌 9단을 이겼던 알파고도 수많은 기보를 학습했다. 그런데 ‘한국형 CES’에서 확인한 우리의 AI 기술은 ‘사람이 아닌’ 데이터만을 학습하고 있었다. 위치 기반 서비스를 개발하는 한 관계자는 이렇게 하소연했다. “중국 바이두는 베이징역에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대놓고 찍습니다. 우리는 프라이버시 때문에 엄두도 못 내는 일이지요.”
 
무턱대고 개인정보를 개방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금 어떤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느냐에 따라 우리가 가진 기술이 달라질 것이고, 그것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처럼 정부나 기업에 대한 신뢰가 낮은 사회에서는 데이터 관리에 대한 신뢰도 낮을 수밖에 없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의 석유나 마찬가지인 데이터 활용에 심각한 한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석유를 쓸 수 없었다면 우리의 제조업은 어찌 되었을까. 어떤 데이터를 어떤 방식으로 쓸 것인지 사회적 합의가 절실하다.
 
과거에 얽매이면 미래 없어
 
‘한국형 CES’를 참관하고 나서 라스베이거스 CES에 여러 차례 참석했던 기업인을 만났다. 그와 나눈 대화 중 가장 울림이 컸던 말은 “미래를 내다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현재를 봐 달라”는 지적이었다. 과거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가 있었고 기업 책임도 크지만, 과거의 경험에 근거해 미래에 대한 규제를 만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기술 영역에서는 과거가 아닌 현재 벌어지는 일을 기준으로 무엇은 할 수 있고, 무엇은 할 수 없는지 합의가 필요하다.
 
20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세기 초반 영국 노동자들은 기계가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며 비밀 결사를 만들어 기계를 때려 부쉈다. 러다이트 운동이다. 그러나 산업혁명의 결과는 무엇인가.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노동자들을 중산층으로 만들었다.  
 
물론 기술이 저절로 중산층을 만들어준 것은 아니다. 어린이 노동까지 착취하는 야만을 향해 폭주하는 기술을 오늘날과 같은 사회적 합의의 틀 안에 가두기 위해 인류는 여러 번의 혁명과 반혁명, 전쟁과 희생을 겪어야 했다. 그 결과 기술은 유례없는 중산층을 만들어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똑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할 수는 없다. 어떤 종류의 4차 산업혁명인지에 대해 합의하고 그 광범위한 합의의 틀 안에서 기술과 사회 사이의 신뢰를 쌓아나가야 한다. 과거의 기준으로 미래를 재단하면 암울한 미래만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은 기술의 변화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폭넓은 사회 혁신 프로그램이 되어야 한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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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