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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대한은 만성의 것” 국민국가 선언…항일운동 불 질러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④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원 안)이 해방 후 환국해 경기도 남양주 홍릉(고종릉)을 참배했다. 젊은 시절 김구가 해주감옥과 인천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고종황제의 명으로 사형을 면했던 인연이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원 안)이 해방 후 환국해 경기도 남양주 홍릉(고종릉)을 참배했다. 젊은 시절 김구가 해주감옥과 인천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고종황제의 명으로 사형을 면했던 인연이 있다.

1910년 2월 14일 뤼순 지방법원, 안중근은 사형을 선고받자 곧 법원장 면담을 요청하였다. 사흘 뒤 법원장과 대면한 안중근은 ‘나는 구차히 목숨을 구하기 위해 상고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상고하면 그 순간 일본의 한국 통치를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고. 이어 이토 히로부미의 거짓 동양 평화론을 비판하면서 “한국 황제(고종)는 총명하시므로 이토가 마음대로 황제를 좌우할 수 없어 입장이 불리해지자 황제를 폐하고 이에 뒤떨어지는 현 황제를 세웠다”고 하였다. 안중근의 발언은 진실일까?
 
1892년 서울의 서양인들이 한국을 알리기 위해 영문 잡지 ‘한국지식(The Korean Repository)’을 발간하였다. 1896년 11월호에 조선 군주를 인터뷰한 8쪽짜리 기사가 실렸다. 취재 기자는 근 10년 군주를 지켜본 호머 헐버트와 헨리 아펜젤러. 군주는 서양인들을 궁으로 초대하면 만찬장 입구에서부터 한 사람씩 대화를 나누어 친밀감을 표하면서 물어보는 것이 많다고 하였다. 군주는 아버지 대원군과는 달리 기독교에 대한 편견이 없으며, 수개월 전 남 감리교 주교가 서울에 와서 알현할 때 군주는 선교사들은 우리에게 신문명을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니 더 많은 선생님을 보내달라고 청한 것을 소개하였다. 두 기자는 ‘이 말은 교회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잊지 말아야 할 말씀’이라고 하였다.  
 
군주는 나라 안에서 최고의 지식인으로 서재에는 많은 책이 있으며, 신하들이 업무 중 역사와 고전에 관해 의문이 생기면 왕을 찾아 물어본다고 하였다. 또 백성들은 관리들에 대한 불만은 많아도 임금에 대해서는 늘 따뜻한 애정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교육 조서엔 덕·체·지 3양 교육 큰 뜻  
 
‘황성신문’ 1907년 2월 15일자 국채보상운동 기사. 사설과 제목에 ‘2천만 국민’이란 글자가 보인다.

‘황성신문’ 1907년 2월 15일자 국채보상운동 기사. 사설과 제목에 ‘2천만 국민’이란 글자가 보인다.

고종은 1880년대 미국과 수교 후, 미국 정부의 협조 아래 육영공원을 세워 똑똑한 관리와 젊은 자제들을 뽑아 영어교육을 받게 하고 또 같은 시기 서울에 전기를 시설하고, 국토의 남북, 동서로 전신 시설을 하였다. 근대화 시책은 일본의 침략으로 방해받기도 했지만, 1900년 무렵 주한 일본공사는 서양 기업가들의 한국투자를 그대로 두면 일본 기업의 진출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보고할 정도로 달라지고 있었다.
 
청일전쟁 중인 1895년 1~2월 사이, 고종은 홍범 14조, 신분 차별 없는 인재 등용 방침, 교육 조서 등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셋은 역사상 최초의 국한문 혼용 교서였다. 놀라운 것은 교육 조서가 지·덕·체의 삼양(三養) 교육을 표방한 점이다. 17세기 영국의 존 로크가 처음 내세운 이 교육론은 18~19세기 미국 중등교육에 크게 활용되었다. 19세기 말에 지구 반대편의 조선 군주가 이를 채택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미국에서는 체육, 덕육, 지육의 순서이던 것을 고종은 덕, 체, 지로 순서만 바꾸었다. 선대왕 정조처럼 임금 스승(君師)의 자격으로 “국가 중흥 대공”을 위해 새로운 교육의 틀로 삼는다고 하였다. 정부 재정의 한계로 외국어 학교, 전문학교, 중학교 설립을 앞세웠지만, 소학교 설치령도 곧 내렸다.
 
‘황성신문’ 1907년 5월 4일자 국채보상운동 모금자 명단을 전면에 걸쳐 실었다. 근 1년간 이 같은 지면이 이어졌다.

‘황성신문’ 1907년 5월 4일자 국채보상운동 모금자 명단을 전면에 걸쳐 실었다. 근 1년간 이 같은 지면이 이어졌다.

정조는 일찍이 소민(평민) 보호를 왕정의 대본이라고 표방하여 나라의 주인은 소민과 왕이란 뜻으로 ‘민국’(民國, 국은 왕을 의미) 정치이념을 내세웠다. 고종 시대에 이 용어는 조정의 상용어가 될 정도로 사용 빈도가 늘어났다. 고종은 민국 이념의 현대화 차원에서 서양의 3육 교육을 도입하였다. 1894년 동학 농민 봉기 때, 한 신하가 토벌을 주장하자 임금은 동학교도도 내 백성이라는 한마디로 물리쳤다. 최근 일본 학계에서 동학 농민군 토벌에 관군이 개입한 것은 일본 측의 위계에 걸린 결과란 연구가 나왔다.
 
1904년 일본은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11월 전승국으로서 ‘보호조약’을 강제하고 한국정부에 고의로 거금의 빚을 지웠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나라의 빚 갚기는 국민의 의무라면서 수백만이 참가하였다. 위대한 국민 탄생의 순간. 의무를 앞세운 국민 탄생은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해 7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 3특사 사건을 구실로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거짓 조칙으로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전국 곳곳에서 무장하여 일본군과 싸우는 사람들이 급증하였다. 일본 육군 통계는 1908년 한해 교전 1976회, 참전 의병 수 8만2767명으로 기록하였다.
 
의병 진압에 어려움을 느낀 통감 이토는 꾀를 냈다. 1909년 1월부터 2월 초까지 이완용의 한국정부와 공동행사로 황제의 순행(巡幸)을 계획하였다. 이토가 황제를 잘 모시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회유하려는 수작이었다. 기차를 타고 대구-부산-마산(남순)을 다녀온 뒤, 곧 개성-평양-의주(서순)로 향하였다. 황제를 맞이하는 환영 인파가 남순 때 최대 3만 명이었다. 평양, 개성에서는 오갈 때마다 10만 명이 나와 태극기를 흔들었다.  
 
 
의병 진압 어렵자 이토 히로부미 ‘잔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당시 프랑스 신문 ‘르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에 소개된 대한제국관. 45x30.8㎝. [사진 이돈수 소장]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당시 프랑스 신문 ‘르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에 소개된 대한제국관. 45x30.8㎝. [사진 이돈수 소장]

이토는 개성을 떠난 귀경 열차 안에서 자신의 보호국 정책의 실패를 자인하고, 야마가타 아리토모, 데라우치 마사다케 등 군부세력에 한국 통치를 넘기려고 결심하였다. 그들이 주장해온 강제 병합만이 저항을 누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토는 2월 8일 창덕궁의 한국 황제를 방문한 뒤, 이틀 뒤 일본으로 돌아갔다. 황제와 국민의 단합 모습이 그를 물러나게 하였다.
 
한 달 뒤, 3월 15일자로 태황제(고종)는 ‘서북 간도와 그 부근 민인에게 알리는 교서’를 내렸다. “대한은 나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여러분 만성(萬姓)의 것이다” “독립이라야 나라며, 자유라야 민이며, 나라는 민이 쌓인 것으로 민은 선한 무리라”고 적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나라는 왕과 소민의 것이라는 민국 정치이념이 100년 만에 나라는 오로지 민의 것이라고 황실 스스로 선언한 역사적 문건이다. 태황제 고종은 이렇게 국민국가 시대를 선언하면서, ‘나의 부덕으로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으나 여러분 만성이 있으니 이미 망했다고 말하지 말자’고 당부하였다.  
 
1900년께 미국 워싱턴의 대한제국 공사관 모습. [사진 이돈수 소장]

1900년께 미국 워싱턴의 대한제국 공사관 모습. [사진 이돈수 소장]

1910년 강제 병합 후 국민은 여러 조직을 만들어 여러 형태로 싸웠다. 의병은 이제 국군을 뜻하는 ‘의군(義軍)’이란 호칭을 선호하고, 대한인국민회 등 ‘국민회’를 일컫는 단체가 수없이 등장하였다. 그들이 각기 ‘애국가’를 지어 부른 것이 110종에 달하였다(한국예술종합학교 민경찬 교수 수집).
 
3·1운동은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국민이 하나로 뭉친 거족적 항일 국민운동이었다. 그 함성의 힘으로 세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킨 김구 주석이 환국 후 고종황제의 홍릉을 찾아 예를 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파리 박람회서 휘날린 태극기, 국권 침탈 후 구국의 상징으로
태극기

태극기

1900년 4월 14일~11월 12일 열린 ‘파리 만국(세계)박람회’에 태극기가 휘날렸다. 대한제국(1897~1910)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프랑스의 초청을 받았다. 당시 신문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은 전체 8개 쪽 중 1개 면을 대한제국관 화보로 꾸몄다. 궁궐 모양의 한국관 우측 상단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그림이 지금도 전해진다. 프랑스 화보잡지 ‘르 펠르랭(Le Pelerin)’ 1904년 1월 31일자에도 대한제국이 소개되는데, 태극기와 이화문양이 고종·순종의 사진과 함께 실렸다.
 
태극기는 조선 말기인 1880년대부터 국가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82년께의 태극기가 전해진다. 1890년대 들어선 일반인이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엽서나 한국 방문 외국인의 기행문 표지 등에도 태극 문양이 활용됐다.
 
무엇보다도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현관 박공판에 태극기 문양을 새겨놓은 점이 주목된다. 국내에서는 고종이 후원하고 독립협회가 주관해 만든 ‘독립문’과 ‘독립신문’ 제호에도 태극기 문양을 삽입했다.
 
1900년을 전후한 시기의 여러 태극기 도식은 태극의 색깔이나 형태, 괘의 위치 등이 조금씩 다르다. 미술사학자 목수현에 따르면, 흰색 바탕에 태극과 사괘를 그려놓는다는 기본 원칙 외에 초기에는 규범이 제시되지 않았다가 1900년께 『각국기도(各國旗圖)』에 이르러 대체로 도안이 정돈된 것으로 보인다. 1905년께엔 황토현의 국기 발매소에서 궁내부의 전매특허를 얻어 태극기를 대·중·소 크기로 제작·판매했다. 1905년 8월 14일자 ‘황성신문’에 ‘태극국기 발매 광고’까지 실렸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침탈당하자 항일 의병들이 태극기를 내세우며 구국의 이미지로 변화했다. 1919년 3·1운동 때도 태극기가 쓰였다.  
 
2009년 5월 서울 은평구 진관사 내 칠성각 해체·복원 작업 때 태극기(사진)가 발견됐다. 1919년 6~12월 사이 발행된 19점의 항일 지하신문들과 함께 보관된 것으로 보아 3·1운동 당시의 태극기로 추정된다.
 
독립운동가들의 태극기도 모양이 조금씩 제각각인데 태극기를 그리고 보관하는 자체가 위험한 상황을 감안할 때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는 태극기 양식 일치안을 제정했다. 1948년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며 국기 제정안을 새로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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