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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악한 프랑코, 영국 총리 속인 히틀러를 농락했다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파시스트끼리의 외교전쟁, 뻔뻔하거나 교활하게
1940년 10월 프랑스 앙다예(2차대전 중 독일 점령)역 플랫폼 열병식. 나치 독일의 히틀러(왼쪽)와 스페인의 프랑코가 독일 의장대에 파시스트식 답례를 하고 있다. 작은 역의 좁은 플랫폼 탓에 붉은 카펫은 프랑코의 발걸음이 차지했다. 왼편은 프랑코가 타고 온 열차. 앙다예 국경 너머는 스페인 이룬. [중앙포토]

1940년 10월 프랑스 앙다예(2차대전 중 독일 점령)역 플랫폼 열병식. 나치 독일의 히틀러(왼쪽)와 스페인의 프랑코가 독일 의장대에 파시스트식 답례를 하고 있다. 작은 역의 좁은 플랫폼 탓에 붉은 카펫은 프랑코의 발걸음이 차지했다. 왼편은 프랑코가 타고 온 열차. 앙다예 국경 너머는 스페인 이룬. [중앙포토]

국경에 닿았다. 접경은 호기심이다. 프랑스의 앙다예(Hendaye)역. 파리에서 TGV로 4시간45분 걸렸다. 거기와 붙은 곳(거리 2.5㎞)은 스페인의 이룬(Irún). 이룬에서 ‘산티아고 순례 길’(북쪽 출발지)이 열린다. 역은 아담하다. 나는 오래된 흑백사진과 비교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프란시스코 프랑코

촬영날짜 1940년10월 23일(제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와 스페인 총통 프란시스코 프랑코(사진)의 앙다예역 열병식 장면이다. 80년 가까이 지났다. 그곳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좁은 플랫폼, 기둥모양, 레일 위치의 풍광은 옛날 그대로다.
 
역에서 스페인 친구 디에고 바스케스를 만났다. 그는 마드리드 역사박물관의 학예관 출신. 그는 이렇게 정리한다. “두 독재자는 비슷했다. 무자비한 파시스트다. 하지만 국익을 다투는 외교에선 갈라섰다. 둘의 만남은 처음이고 국력차이는 컸다. 히틀러는 교활한 카리스마다. 프랑코의 기회주의적 영악함이 한 수 위였다.” 앙다예는 20세기 외교사의 절묘한 현장이다.
 
 
치의 파죽지세 시절이다. 1940년 5월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했다. 프랑스는 6주 만에 항복했다. 그 무렵 파시스트 원조인 베니토 무솔리니(이탈리아 독재자)가 히틀러에 합세했다.
 
그해 10월 21일 히틀러의 특별열차가 독일 수도 베를린을 떠났다. 프랑스 서쪽 끝으로 달렸다. 그의 전략 의지는 선명했다. 베를린-로마 추축(樞軸·Axis)에 마드리드를 넣는 것이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23일 오후 2시 약속시간이다. 특별열차는 앙다예역에 도착했다. 스페인 열차는 국경을 넘지 않았다. 히틀러는 시간 준수에 철저하다. 프랑코는 1시간 늦게 도착했다. 지각은 열악한 철로 사정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기분이 상했다. 기대하지 않은 심리전이 작동했다.
 
프랑코는 미소로 분위기를 바꿨다. 둘은 퓌러(Führer, 히틀러), 카우디요 (Caudillo)로 서로를 불렀다. 뜻은 최고 지도자(총통으로 번역). 히틀러는 51세, 프랑코는 48세다. 플랫폼에 독일 의장병 100여 명이 도열했다. 간략한 열병 후 둘은 히틀러 열차 안 회담장으로 들어갔다. 프랑코의 감미로운 외교 수사(修辭)가 작렬했다. “정신적으로 양 국민은 어떤 주저함도 없이 결속했다.” 그 바탕에는 스페인 내전이 있었다. 내전은 장군들의 반란이었다. 프랑코 군부(우파 국민전선)와 좌파 인민전선의 공화정부는 격돌했다. 그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군사 원조를 받았다. 그것은 내전 승리의 주요 요소다.
 
프랑코는 추축국 편으로의 참전 의사를 확인했다. 그는 어려움을 호소했다. “스페인 내전(1936.7~1939.4)이 끝난 지 얼마 안 된다. 나라가 피폐해 있다. 전쟁준비에 시간이 필요하다. 경제·식량 원조를 부탁한다.” 그것은 약소국의 징징거리는 말투였다. 히틀러는 지원을 약속했다. 처음엔 설득조다. 거기에 위압과 회유를 섞었다. 그는 지중해 서쪽에서 영국을 퇴출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지브롤터(영국령, 스페인 남단)의 공격이다(펠릭스 작전).
 
프랑코의 열망도 지브롤터 점령이다. 그는 카나리아 제도(아프리카 북서부) 방어도 강조했다. 그러면서 조건을 걸었다. 대규모 군수물자와 장비를 요청했다. 히틀러는 어처구니없어 했다. 프랑코는 대담해졌다. 참전의 대가를 요구했다. 그것은 교묘한 물타기 역습이다. 그는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프랑스령 모로코와 알제리 오랑)를 넘겨달라고 했다. 그곳은 영화 ‘카사블랑카’(험프리 보가트, 잉그리드 버그먼 주연) 배경이다.
 
히틀러는 도저히 받을 수 없었다. 그곳은 프랑스 비시(Vichy) 정부 관할. 비시의 수장 필리프 페탱의 식민지 집착은 뚜렷했다. 히틀러의 다음(10월 24일) 비밀 일정은 페탱과의 만남과 협력이다. 프랑코는 수위를 조절했다. 히틀러의 인내심이 마를까 조심했다. 프랑코의 외동딸(마리아 델 카르멘)은 이렇게 회고했다. “아버지는 히틀러에게 납치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졌다.” (『프랑코 나의 아버지』)
 
1938년 뮌헨협정의 4개국 정상, (왼쪽부터) 영국 체임벌린, 프랑스 달라디에, 독일 히틀러, 이탈리아 무솔리니. [중앙포토]

1938년 뮌헨협정의 4개국 정상, (왼쪽부터) 영국 체임벌린, 프랑스 달라디에, 독일 히틀러, 이탈리아 무솔리니. [중앙포토]

회담 9시간째. “프랑코는 개인적 군사 경험, 사소한 여담(petty digressions)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히틀러를 짜증나게 했다.”(스탠리 G. 페인 지음, 『프랑코와 히틀러』) 페인 교수(위스콘신- 매디슨 대학) 는 스페인 현대사의 대가다. 대충 결론이 났다. 하지만 스페인의 참전 시점과 대가는 모호하고 막연했다. 히틀러는 나흘 후 무솔리니를 만났다. 그는 분통을 터뜨렸다. “이 자(프랑코)와 다시 만나느니 내 이빨을 서너 개 뽑는 게 낫다.”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는 프랑코를 “배은망덕한 겁쟁이”라고 했다. 그 분노는 역설이다. 히틀러 외교의 패배를 드러낸다. 유럽의 최강자가 약자에게 허(虛)를 찔렸다.
 
프랑코는 작지만 단단하다. “별명은 꼬마지휘관(comandantín). 냉정하고 집요하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introvertido).” (앤서니 비버 지음 『스페인 내전』) 프랑코는 내심 히틀러를 경멸했다. 그는 정통파(33세 최연소 장군) 군인이다. 히틀러는 사병 출신이다.
 
 
프랑코가 세운 ‘전몰자 계곡’의 십자가.

프랑코가 세운 ‘전몰자 계곡’의 십자가.

랑코의 협상술 구성은 흥미롭다. 첫째, 거절하지 않았다. 히틀러의 압박과 기대에 맞췄다. 참전 의사를 원론적으로 표시했다. 대신 복잡하고 턱없는 전제와 조건을 달았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 프랑코는 거기서 실리의 기량을 발휘했다. 둘째,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웨이팅(waiting) 게임’은 담판 분위기를 헝클어뜨렸다. 셋째, 프랑코는 카멜레온처럼 행동했다. 자신의 색깔을 죽였다가 기회를 보고 되살렸다. 그것으로 그의 국내 철권통치도 유지했다.
 
그 선택은 치밀한 지피지기(知彼知己) 덕분이다. 1940년 5월 윈스턴 처칠이 영국총리로 등장했다. 처칠의 메시지는 투혼이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 프랑코는 영국의 전쟁 의지와 미국의 참전 가능성에 주목했다. 반면에 무솔리니의 참전은 영국의 패배를 전제로 했다. 그의 몰락은 권력 허세 탓이다. 프랑코는 독일 첩보기구(Abwehr)수장 카나리스와 친했다. 카나리스는 그에게 나치 전략의 장단점을 말했다. 카나리스는 히틀러 노선에 반대했다. 지피지기 외교는 국가 생존술이다. 그것은 어떤 정치체제에도 적용된다. 2019년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 아래 거대한 지하 성당 내 프랑코 묘지.

그 아래 거대한 지하 성당 내 프랑코 묘지.

히틀러 외교에 제동이 걸렸다. 수법은 협박과 사기(위장평화)다. 뮌헨협정(1938년 9월)은 그 절정이다. 뮌헨협상은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프랑스의 달라디에 총리, 히틀러, 무솔리니 간 거래다. 결과는 히틀러의 압승.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이 독일에 넘어갔다. 대가는 나치의 평화약속. 체임벌린은 그것을 “우리 시대의 평화(peace for our time)”라고 했다. 하지만 6개월 후 히틀러는 협정을 파기했다.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했다. 체임벌린의 유화(宥和)정책은 비굴하다. 평화는 전쟁불사의 용기를 요구한다. 그게 부족하면 속임수에 당한다. 1941년 6월 독일은 소련을 침공했다. 프랑코는 군대(1만8000명)를 보냈다. 명칭은 푸른 사단(División Azul), 정식 군대가 아닌 지원병. 그것으로 비교전국(non-belligerence) 지위를 유지했다. 1943년 전세는 소련군 우위로 역전됐다. 프랑코는 그해 11월 군대를 철수시켰다.
 
나는 이룬으로 넘어갔다. 거기서 열차로 게르니카에 갔다. 그곳은 바스크의 성지. 1937년 4월 독일 콘도르 군단 전투기들이 그곳을 무차별 폭격했다. 마을은 잿더미다. 피카소는 내전의 야만적 참상을 전율스러운 시각 메시지로 응징했다. ‘피카소 게르니카’는 마드리드의 소피아 미술관에 걸려 있다. 그 그림은 게르니카의 주택가 담벼락에 타일 벽화로 존재한다.
 
게르니카 주택가 담장에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복사한 타일 벽화가 붙어있다. 앞은 박보균 대기자.

게르니카 주택가 담장에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복사한 타일 벽화가 붙어있다. 앞은 박보균 대기자.

스페인 내전은 이념의 광기(狂氣)를 표출했다. 올해가 내전 종식 80주년. 내전은 외국과의 전쟁보다 처절하다. 그 후유증은 거칠고 길다. 6·25 한국전쟁이 떠오른다. 마드리드 인근(거리 40㎞)에 ‘전몰자 계곡’이 있다. 그곳 과다라마 산맥 기슭에 세운 십자가(높이 150m)는 압도적이다. 아래는 거대한 지하성당. 프랑코는 그곳을 속죄와 화해의 징표로 삼았다. 한복판에 그의 시신(1975년 죽음)이 묻혀 있다. 좌우 양 진영의 희생자 유해(3만3000명)도 안장돼 있다. 2018년 사회당 내각은 프랑코 묘지 이장(移葬)을 결의했다.
 
역사학자 바스케스는 전몰자 계곡 앞에서 회고한다. “프랑코의 억압 통치는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하지만 히틀러의 압박을 물리친 외교술은 국민 대다수가 인정한다.” 그는 단언했다. “스페인이 2차대전에 참전했으면 패전국이 되고 참혹한 내전이 재발했을 것이다. 바스크와 카탈루냐 지방은 분리됐을 것이다.”
 
앙다예(프랑스)·게르니카·마드리드(스페인)=글·사진 박보균 중앙일보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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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