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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떠나려던 쇼팽, 극적으로 '귀인'을 만나다

기자
송동섭 사진 송동섭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10) 
파리는 바르샤바나 빈과는 완전히 달랐다. 8개월 동안 빈에서 답답하게 지냈던 쇼팽은 파리의 활기와 소란을 처음 접하고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시골 청년의 눈에 번화한 파리는 신기함이 가득했다. 그곳에는 최고의 화려함과 지저분함, 최고의 미덕과 악덕이 공존했다. 모두가 바쁘게 걸어가는 것을 보며 쇼팽은 새 도시에서 자신 앞에 펼쳐질 가능성에 가슴이 떨렸다.
 
비 내리는 푸아소니에르 대로 - 장 브로(Jean Beraud, 1885). 카르나발레 미술관 소장. 초가을에 파리에 도착한 쇼팽은 이 거리의 한 건물 5층에 방을 구했다. [사진 송동섭]

비 내리는 푸아소니에르 대로 - 장 브로(Jean Beraud, 1885). 카르나발레 미술관 소장. 초가을에 파리에 도착한 쇼팽은 이 거리의 한 건물 5층에 방을 구했다. [사진 송동섭]

 
폴란드인의 봉기가 러시아에 의해 제압되고 많은 폴란드인들은 파리로 몰려들었다. 파리는 다른 주변국가들에 비해 폴란드인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쇼팽과 친교가 깊었던 폴란드의 유력 귀족가문들도 파리로 왔다. 때문에 바르샤바에서 알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쉬웠고 낯선 도시에서 향수는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곳은 혁명의 여파 속에 여전히 정치적으로 시끄러웠다. 바로 한해 전에 7월 혁명의 결과로 들어선 루이 필리프 정부는 구체제 부르봉 왕조의 지자들과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시민혁명을 겪은 후 파리는 근대 시민정신이 발원지였다. 자유는 최대한으로 보장되었고 개방적인 분위기는 외국인들을 편하게 해주었다.
 
파리는 유럽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전 유럽에서 예술가, 문학가, 사상가들이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이 도시로 몰려왔다. 음악도 이제는 파리가 중심지가 되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시절 음악의 중심지였던 빈은 퇴조했다. 새로운 사조가 생겨났고 그것은 속박을 거부하는 낭만주의 물결이었다.
 
거처를 마로니에 가로수가 늘어선 푸아소니에르 대로의 한 건물 5층에 마련했다. 몸이 약한 그로서는 계단을 오르기 힘들었지만 월세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반대 급부로 전망은 좋았다. 쇼팽은 베란다에서 굽어보는 파리의 모습에 감격했다.
 
그는 파리에는 활동하고 있던 피아니스트와 음악계의 거장들을 만나고 다녔다. 빈에서 만난 궁중 의사 말파티가 소개해준 파리 궁중음악감독 파에르(Paër)를 통해서 롯시니(Rossini), 체루비니(Cherubini), 베이요(Baillot), 칼크브레너(Karlkbrenner) 등 파리에서 잘 나가는 음악가들을 만났다.
 
쇼팽은 곧 리스트(Franz Liszt)와 힐러(Ferdinand Hiller),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Bartholdy)과도 친해 졌다. 그들은 모두 비슷한 또래로 음악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기 위치를 잡아가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쇼팽이 덜 알려져 있었다. 첼리스트 프랑숌(Franchomme) 그리고 베를리오즈(Berlioz)와도 친하게 되었다.
 
쇼팽은 누구보다 칼크브레너와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는 당대 이름 높은 피아니스트로 쇼팽, 리스트, 탈베르크(Thalberg) 등의 젊은 음악가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였다. 칼크브레너의 명성을 익히 들어온 쇼팽은 그를 만나자 겸손하게 존경하는 마음을 전했다.
 
칼크브레너는 변방에서 온 젊은이에게 피아노연주를 부탁했다. 쇼팽이 자신이 작곡한 곡을 연주했을 때 그는 비범한 재능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거만한 그는 자신의 지도하에 몇 가지를 다듬으면 대가가 될 거라며 자기에게 3년간 교습을 받으라고 제안했다.
 
칼크 브레너(Fridriech Karlkbrenner) - 칼 마이어(Carl Mayer) 판화. 독일 볼펜뷔텔의 헤르촉 아우구스트 도서관(Herzog August Bibliotheck, Wolfenbuttel) 소장. 쇼팽보다 앞선 세대에서 최고의 피아노 거장으로 칭송받았다. 그는 쇼팽의 재능을 보고 자기 문하에 묶어두려 했다. [사진 송동섭]

칼크 브레너(Fridriech Karlkbrenner) - 칼 마이어(Carl Mayer) 판화. 독일 볼펜뷔텔의 헤르촉 아우구스트 도서관(Herzog August Bibliotheck, Wolfenbuttel) 소장. 쇼팽보다 앞선 세대에서 최고의 피아노 거장으로 칭송받았다. 그는 쇼팽의 재능을 보고 자기 문하에 묶어두려 했다. [사진 송동섭]

 
폴란드에 있던 그의 스승 엘스너는 그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는 과시적이고 허영심 많은 칼크브레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엘스너는 3년은 너무 길고, 칼크브레너에게 묶이면 자신의 독창적 세계를 잃고 그의 아류가 될 것이며, 피아노 외에 여러 분야에서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그를 말렸다. 친구들은 칼크브레너가 그렇게 제안한 것에 화를 냈다. 멘델스존은 쇼팽이 그보다 휠씬 낫고 그에게 배울 것이 없다고 했다. 쇼팽은 칼크브레너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로서 쇼팽은 확실히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깨친 피아니스트로 남게 되었다. 서로간에 존경심이 있었으므로 둘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쇼팽은 e 단조 피아노 협주곡을 칼크브레너에게 헌정했다. 그는 ‘쇼팽의 마주르카에 의한 화려한 변주곡 작품번호 120’을 작곡했다.
 
친구들은 쇼팽에게 연주회를 빨리 열어 자신을 알리라고 권했다. 쇼팽도 그게 좋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동반 연주자가 문제였다. 가수를 초빙하고 싶었는데 당시 유명 극장의 담당자들은 쇼팽을 잘 몰랐다. 때문에 쇼팽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소속 가수의 연주회 출연을 허락하지 않았다. 연주회는 두 차례나 연기되었다.
 
파리에 온지 5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데뷔연주회를 가질 수 있었다. 파리의 유명 피아노 제작자 이름을 딴 플레옐(Pleyel) 홀에서 열린 이 연주회는 칼크브레너와 힐러가 함께 출연하여 연주해 주었다. 그러나 그 연주회는 수익 면에서 적자였다. 아직 파리의 청중들은 그를 몰랐다. 음악계의 주요인사들이 참석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초청 받은 사람들이었고 유료 청중은 폴란드인이 대다수였다.
 
평론가들의 평은 호의적이었다. 유명한 평론가 페티(François-Joseph Fétis)는 그가 전에 없던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보여줬다고 했다. 당시 거의 매일 만나던 친구들인, 힐러, 멘델스존, 리스트도 박수갈채가 컸다고 썼다. 음악계에 이름을 알리는 효과는 있었다.
 
로셰슈아르(Rochechouart) 가(街)의 플레옐 홀(Salle Pleyel) -에두아르 르나르 Edouard Renard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한 목판화. 쇼팽은 파리에서의 대중 연주회는 모두 플레옐 홀에서 가졌다. 피아노 제작자 플레옐은 피아노 쇼룸 겸 음악 연주홀을 만들었다. 110석 규모이었던 것을 1839년에는 로셰슈아르 가에 300석 규모의 큰 홀로 만들었다. 지금의 포부르 생 오노레(Fourourg Saint-Honore) 가의 홀은 1927년 새로 꾸민 홀이다. 플레옐 홀은 파리 최고의 콘서트 홀로 꼽히는데 첫 개관이래 파리 문인과 예술가들의 명소였고 파리 문화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출처: L’illustration (9 June 1855)]

로셰슈아르(Rochechouart) 가(街)의 플레옐 홀(Salle Pleyel) -에두아르 르나르 Edouard Renard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한 목판화. 쇼팽은 파리에서의 대중 연주회는 모두 플레옐 홀에서 가졌다. 피아노 제작자 플레옐은 피아노 쇼룸 겸 음악 연주홀을 만들었다. 110석 규모이었던 것을 1839년에는 로셰슈아르 가에 300석 규모의 큰 홀로 만들었다. 지금의 포부르 생 오노레(Fourourg Saint-Honore) 가의 홀은 1927년 새로 꾸민 홀이다. 플레옐 홀은 파리 최고의 콘서트 홀로 꼽히는데 첫 개관이래 파리 문인과 예술가들의 명소였고 파리 문화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출처: L’illustration (9 June 1855)]

 
두 번째 연주회는 석 달 뒤인 1832년 5월에 열렸다. 하지만 자선음악회 형식으로 열린 이 연주회에서 쇼팽은 주목 받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f 단조 협주곡을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는데 오보에 연주자가 더 주목을 받았다. 쇼팽의 우아하고 감미로운 피아노 소리는, 과장된 몸짓과 화려한 기교 속에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를 기대하던 청중들에게 호소력이 적었다. 힘의 부족은 그의 연주에 대해 평생 따라다니는 부정적 평가였다.
 
비슷한 시기에 열렸던 힐러의 연주회는 호평을 받았다. 멜델스존의 무대도 성공적이었고 악마적 기교를 뽐내는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는 바르샤바에서 그랬던 것처럼 파리에서도 연주회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전문가들은 쇼팽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대중은 더 자극적인 것을 원했다. 이국 땅에서 홀로 지내는 쇼팽은 위축되었고 마음이 무거웠다. 어린 시절부터 찬사와 칭찬 속에서만 자란 그였다.
 
동포를 만나거나 친구들과 있을 때 그는 즐거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속을 채운 것은 ‘우울함, 불안, 사나운 꿈자리, 불면증, 안절부절, 허무함, 무기력함, 죽음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는 친구 티투스에게 장문의 편지를 통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누구하고도 소통할 수가 없어”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었다. 그에게 생활비를 보내주고 있던 바르샤바의 아버지는 교수로 있던 바르샤바 리세움의 폐쇄로 수입이 줄었다. 쇼팽은 파리에서 성공할 자신이 없었다. 많은 폴란드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신대륙 미국으로 갈까 생각했다. 미국에는 유명한 음악가들이 많지 않았고 이름을 떨치기도 쉬울 것 같았다. 더 이상 아버지에게 신세지지 않아도 되었다.
 

프레데릭 쇼팽(1838). 무명화가의 작품을 아리 셰퍼(Ary Scheffer)가 복제. 폴란드 국립 쇼팽협회 소장. [사진 송동섭]

 
아버지는 아들의 생각에 반대했다. 참고 기다리면 좋은 날이 올 테니 파리에 그냥 있거나 아니면 바르샤바로 돌아오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의 여권은 이미 만료되었고 바르샤바로 돌아가면 지배자 러시아 인들은 무엇보다 먼저 여권을 제때 갱신하지 않은 그를 괴롭힐 것이었다.
 
화려한 도시 파리는 단 물만 줄 것 같았다. 파리는 그가 꿈꿔왔던 그 곳 인줄로만 알았다. 자신감은 매일 줄었다. 갈등하던 그는 마침내 결심을 하고 일어섰다. 신대륙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것 같았다. 그 곳에서는 쉽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짐을 싸던 쇼팽은 마지막으로 파리의 거리를 걷고 싶었다. 바로 그때 매정하게만 느껴졌던 파리의 거리는 그에게 극적인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연히도 동포 발렌틴 라지비우(Valentin Radziwill) 공(公)을 거리에서 만났다. 그는 폴란드에서부터 잘 알고 지내던 안토니 라지비우 공의 동생이었다. 쇼팽의 실의에 찬 얼굴을 보고 그는 이유를 물었고 쇼팽은 파리를 떠나려 한다고 말하며 작별을 고했다.
 
발렌틴은 그를 붙잡았고 곧이어 로스차일드(Rothschild) 남작가의 파티에 데려갔다. 로스차일드 가는 역사상 가장 큰 부를 모았다는 바로 그 가문이다. 우연한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 이 일은 벼랑 끝의 쇼팽에게 최고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쇼팽에게 기회를 가져다 준 로스차일드 가(家)가 어떻게 그 큰 부를 모았는지 그리고 로스차일드 가를 통해 일어난 쇼팽의 기적 같은 성공에 관한 이야기이다.
 
송동섭 스톤월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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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