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채인택 기자 사진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독립투쟁·민주화···학생운동 시작은 100년 전 도쿄

1919년 기미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모여 2·8 독립선언을 했습니다. 조선인 유학생들이 도쿄의 당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 현재 재일본 한국YMCA 건물에 모여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조선인 유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를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 등 외교 공관은 물론 일본 정부와 국회에도 발송하고 독립선언식을 열었습니다. 2·8독립선언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신음하던 동포들에게 조국 광복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고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국제적인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한일 국교 수립 뒤론 매년 일본 도쿄의 재일본한국YMCA회관에 재일교포, 재일한국인, 광복회원, 정부와 주일본 한국 대사관. 한국·일본YMCA의 관계자 등이 모인 가운데 2·8 독립선언 행사가 열려왔습니다. 올해로 딱 100년을 맞습니다. 한 세기 전 이 쾌거에 대해 문답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지금부터 딱 100년 전인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선언서. 사진은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2015년 12월에 공개한 '2ㆍ8 독립선언서 원본이다. [서울=연합뉴스]

지금부터 딱 100년 전인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선언서. 사진은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2015년 12월에 공개한 '2ㆍ8 독립선언서 원본이다. [서울=연합뉴스]

 
‘적 심장부’에서 통쾌 독립선언  
-국내도, 제3국도 아니고 침략국인 일본의 수도에서 독립을 선언했다는 것이 독특합니다.  
“그렇습니다. 적국인 일본의 심장부인 수도 도쿄에서 통쾌하게 독립선언을 한 것 자체가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문 대담한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젊은 유학생들이 앞장섰다는 것은 그야말로 학생이 공부하고 유학하는 목적이 개인의 출세나 영달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 국민을 위하는 것임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당시 학생들의 독립 의지와 민족 의식을 짐작할 수 있는 거사입니다. ‘청년이 살아야 민족이 산다’ ‘젊은이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우리 역사의 명장면입니다.”
7일 2.8 독립선언 100주년 기념 전야제가 열린 일본 도쿄의 재일본한국YMCA에서 참석자들이 아이랑을 부르고 있다. 100년 전 2.8 독립선언을 했던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이 바로 이곳이다. [연합뉴스]

7일 2.8 독립선언 100주년 기념 전야제가 열린 일본 도쿄의 재일본한국YMCA에서 참석자들이 아이랑을 부르고 있다. 100년 전 2.8 독립선언을 했던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이 바로 이곳이다. [연합뉴스]

 
‘스릴러 영화’ 뺨치는 독립선언 과정
-어떤 분들께서 주도하셨나요?
“이날 조선인 재일 유학생 600여 명 앞에서 와세다(早稻田)대 정경과 학생이던 최팔용 선생(1891~1922년)이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했습니다. 그 뒤 같은 와세다대 철학과 학생인 소설가 이광수(1892~1950년)가 기초한 2·8독립선언서를 메이지(明治)대 법학과 학생이던 백관수 선생(1889~1952년)이 낭독했습니다. 당시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하다 1월 중순 파리강화회담이 열리던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2월부터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펼친 김규식(1881~1950년) 선생의 지시에 따라 조소앙(1887~1958년) 선생이 도쿄에 파견돼 유학생을 지도해 이뤄졌다는 설도 있습니다. 조소앙 선생은 2월 1일 중국 지린(吉林)에서 발표된 최초의 독립선언인 대한독립선언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입니다. 2·1 대한독립선언, 2·8 독립선언과 3·1 독립선언이 서로 연관됐음을 보여주는 독립 운동가들의 활약상입니다. 독립 운동가들이 국경을 넘나들고 국제 전보를 치며 독립선언서를 조선 땅에서 인쇄해 일본으로 다시 가져 가는 장면 등은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과감하고, 치밀한 준비 속에 펼쳐진 초기 독립운동의 모습입니다.”  
 
일본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간다(神田) 재일본한국YMCA회관의 2.8독립선언 기념자료실에 설치된 선언문 전시물. [연합뉴스]

일본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간다(神田) 재일본한국YMCA회관의 2.8독립선언 기념자료실에 설치된 선언문 전시물. [연합뉴스]

모든 학생운동의 원조가 되다
-2·8 독립선언은 같은 해 있었던 3·1운동은 물론 그 뒤 국내외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의 기폭제로 평가 받았다죠.  
“조선인 유학생들이 주도한 2·8독립선언은 3·1운동은 물론 1926년의 6·10만세운동,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지는 독립운동과 학생운동을 촉발한 신호탄이었습니다. 2·8독립선언은독립운동은 물론 이 땅에서 벌어진 모든 학생운동의 원조로 볼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기득권이 아닌 민중과 민족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겠다는 선구자적 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올해 100주년을 맞아 더욱 뜻이 깊습니다. ”
 
-허를 찔린 일제는 당시 어떻게 대응했나요?  
“이날 600여 명의 재일 조선인 학생은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참석자들이 독립선언을 가결하고 앞으로의 운동 방향을 논의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참석자 가운데 60여 명이 잡혀갔습니다. 이중 8명은 나중에 기소까지 당했습니다. 학생들은 다시 2월 12일에 다시 모여 독립운동을 논의하다 또 붙잡혀 갔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이 국내외에 계속 보도되면서 국내의 조선인의 의식을 자극해 결국 3·1운동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2·8 독립선언서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요?
“선언문을 보면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했는데요, 이는 3·1독립선언서와 일치합니다. 3·1 만세운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며 민족의 궐기를 촉구했습니다. 2월 1일 중국 지린(吉林)에서 발표한 2·1 독립선언에 이어 조선의 유학생 청년들이 일제 심장부에서 독립선언서 낭독과 집회라는 과감한 행동에 들어가면서 민족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고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다고 하겠습니다. ”
 
100년 전 민주공화국에 목말랐다
-2·8 독립선언은 어떤 형태의 독립국가를 추구했나요?  
“독립선언에만 그치지 않고 독립운동의 목적을 ‘민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나라를 세우는 것임을 분명히 한 최초의 선언이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민주공화국과 한민족의 인류에 대한 기여라는 지향점을 분명히 담고 있다는 게 2·8 독립선언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바로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의 선진국의 모범을 취하야 신국가를 건설한 후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민족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함이 있을 줄을 믿노라’라는 구절에 이런 내용이 담겼죠. 독립선언을 해도 나라의 독립에 그치지 않고 독립 뒤에 인류 문명사에 기여할 내용까지 밝혔다는 점에서 참으로 뜻깊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그 자체로 인류사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뿌리가 여기까지 뻗어있습니다. 2·8독립선언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사건입니다.”
 
‘국제정세 흐름’ 활용  
-왜 지금부터 딱 100년 전인 1919년 2·1 대한독립선언, 2·8 독립선언, 3·1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을 벌인 건가요?
“독립선언 몇 달 전인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 파리에서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 등 각국 대표가 모여 강화조약의 내용을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1차대전 뒤 새로운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외교적 회의가 열리니 조선의 지식인과 학생들은 독립의 기회로 보고 행동에 나선 것입니다. 국제정세의 흐름을 속에서 독립을 이루고 자존과 국민 이익을 되찾을 방법을 구체적으로 추구했다는 점이 돋보입니다. 게다가 그 한 해 전인 1918년 1월에는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그 유명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포함된 14개조를 발표했습니다. 민족자결주의는 각 민족 집단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독립과 정치 조직,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타민족이나 타국가의 간섭을 인정하지 않을 집단적 권리를 말하죠. 그 발표 뒤 전 세계 약소민족, 피압박 민족의 가슴에는 불이 붙었습니다.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856~1924년, 재임 1913~1921년) . 191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나 약소국과 피압박 민족 독립에는 공로가 별로 없고 1920년 창설된 국제연맹 설립 과정을 주도한 공적으로 받았다. [중앙포토]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856~1924년, 재임 1913~1921년) . 191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나 약소국과 피압박 민족 독립에는 공로가 별로 없고 1920년 창설된 국제연맹 설립 과정을 주도한 공적으로 받았다. [중앙포토]

 
민족자결주의라는 이상론 철저 무시
-그럼 월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어떤 성과를 거뒀나요?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된 1개조는 미국 프린스턴대 총장 출신인 윌슨 대통령의 이상주의가 작용한 선언이라는 평가입니다. 민족자결주의는 다민족국가이자 패전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튀르크 제국을 해체해 수많은 나라를 새로 만드는 데만 적용한 측면이 강합니다. 14개조에는 ‘식민지 문제의 공정한 해결’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강대국 식민지를 독립시키고 해방시킨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파리강화회의의 결과로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 등 강화조약을 통해 승전국인 강대국들은 패전국의 식민지나 영토를 마음대로 차지하고 나눠가지고 자신의 영향권으로 편입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국제사회, 그때도 지금도 냉혹하다
-2·8 독립선언이 오늘날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사람에 따라 수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땅의 학생운동은 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과 헌신으로 시작했다는 사실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학생운동 경력을 자신의 입신이나 정치적 이익에 활용하는 것은 운동의 정신과 동떨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국제적인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윌슨의 14개조가 국제사회의 흐름이 될 것으로 판단해 적극적인 움직임에 나섰지만 강대국은 이런 이상주의나 이념은 장식용으로만 사용하고 자국의 이익만 챙겼습니다. 결국 수많은 약소민족과 피압박 민족은 눈물을 삼키며 장기간의 독립운동에 들어갈 수밖에 밖에 없었습니다.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뒤에나 독립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한민족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처럼 냉혹한 국제관계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국제사회에선 나라나 국민이 힘을 가져야 제대로 뜻을 펼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열릴 2차 북미정상회담이 코앞에 다가온 지금, 100년 전 2·8 독립선언은 생각하기에 따라 우리에게 참으로 여러 가지 가르침을 줍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이메일 받기를 하시면
기사 업데이트 시 메일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기자들의 연재 기사 보기

뉴스레터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