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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대학 꽉 틀어쥐면 한국형 ‘미네르바스쿨’ 안 나온다

[양영유의 총장 열전] 보광 한태식 동국대 총장
스님 총장과의 인터뷰라 긴장이 됐다. 4년 임기의 끝자락인데 무슨 말을 들을 수 있을지 걱정도 됐다. 기우였다. 그 어느 대학 총장보다도 해박하고 통찰력 있으며 예지력 있는 고등교육 전문가였다. “마무리를 잘해야죠. 전국의 총장들에게 교훈도 남기고.” 동국대를 4년간 이끌었던 보광(普光) 한태식(68) 총장의 첫마디였다. 2015년 3전4기로 총장 자리에 올랐던 터라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한 총장은 “사심 없는 내 말이 대학 발전에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태식 총장은 "대학의 문제는 정치가 아닌 자율의 눈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종근 기자]

한태식 총장은 "대학의 문제는 정치가 아닌 자율의 눈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종근 기자]

네 번 도전해 총장이 됐는데 이달 말 임기를 마친다.
“교수생활 27년 중 교무위원을 16년 했다. 학장과 대학원장으로 8년, 대외협력처장으로 8년 일하면서 학교 구석구석이 보였다. 모교 발전에 밀알이 돼야겠다는 신념이 생겼다. 총장 직선제에서도 1등, 간선제에서도 1등을 했으나 이사회 벽을 못 넘어 세 번 고배를 들었다. 내가 부족했던 탓이다.”
 
왜 연임에 도전하지 않았나.
“처음부터 뜻이 없었다. 4년마다 총장 선거를 치르면서 갈등과 반목이 거듭됐다. 그러다 보니 113년 동국대 역사에 연임 총장은 두 명뿐이다. 그래서 연임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더 훌륭한 분이 이끌 것이다.”
 
동국대는 후임 총장 선임을 진행 중이다. 후보자 정견 발표회와 공개토론회에 이어 최종 후보자 3명이 이사회에 추천됐다. 설 연휴 직후 제19대 총장이 결정돼 3월에 취임한다.
 
 
25년 만의 스님 총장, 일심동행 실천
 
스님 총장으로서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스님 총장은 지관 스님 이후 25년 만이었다. 동국대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종립대학이다. 조계종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정신은 간화선(看話禪)이다. 선(禪) 수행 방법 중 화두(話頭)를 들고 수행하는 간화선은 중국 임제 스님의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 중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는 말씀이 있다. ‘참사람 열린 교육’이라는 뜻이다. 열린 교육을 통한 참사람 양성이 모토다. 일심동행(一心同行) 리더십으로 4년을 보냈다.”
 
막상 총장을 해보니 어땠나.
“(웃으며) 역대 18명의 총장 중 가장 욕을 많이 먹었던 것 같다. 총장 선거 당시엔 종단 개입설, 취임 후엔 논문 표절 오해와 학생 농성·단식 등 여러 일이 있었다. 모든 갈등과 오해가 해소돼 홀가분하다. 대학은 사찰과는 달리 다양성이 넘실대는 시끌벅적한 곳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교훈 재정립이다. 1934년 제정한 교훈 ‘섭심(攝心)·신실(信實)·자애(慈愛)·도세(道世)’를 83년 만에 바꿨다. 교수들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데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나. 2017년 개교 111주년을 맞아 누구나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지혜(智慧)·자비(慈悲)·정진(精進)으로 바꾼 이유다. 지금은 학생들에게 물어봐도 다 외우고 있더라.”
 
소회를 얘기하다 자연스럽게 고등교육 문제로 넘어갔다. 한 총장은 자료 하나 보지 않고 열변을 토했다. 행정에도, 숫자에도 밝았다.
 
재정 문제에 각별히 신경 쓴 것으로 안다.
“취임해 보니 곳간이 다 비어 있더라. 부채가 600억원이 넘었다. 전임 총장들이 성과를 내려고 과도하게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수의계약도 극심했다. 병원의 경우 10년 동안 수술용 가스를 L당 700원에 납품받았더라. 경쟁입찰에 부치니 200원이 안 들었다. 거기다 신정아 가짜 학위 사건까지 겹쳐 예일대와의 소송에서 60여억원을 날렸다. 방만 경영을 추방해 빚을 200억원대로 줄였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엔 교육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하다. 총장의 마인드가 중요하다.
“난 커리큘럼을 바꿨다. 신입생 교양교육은 융·복합 마인드를 심어주려고 명상, 고전 읽기, 소프트웨어 교육, 창업 교육 등 4개 과목을 의무화했다. 학생들에게 소프트웨어 울렁증을 없애줘야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겁 없는 도전자가 될 수 있다. 창업교육은 에피소드가 있다. 학승들이 ‘웬 창업이냐’고 불만을 제기했다. 사찰도 신도한테만 손 벌리지 말고 된장을 팔더라도 수익사업을 해야 한다고 설득하니 이해하더라.”
 
커리큘럼 리모델링은 정말 중요하다.
“맞다. 통째로 뜯어고쳐야 한다. 학과 명칭과 관련 수업의 교과과정을 혁신해야 한다. 동국대는 일어일문학과를 일본학과로 바꾸고 일본의 사회·경제·문화·역사·문학을 다루게 했다. 대학원생이 다섯 배나 늘더라. 법학과에는 정보보호법 같은 최신 트렌드를 반영하고, 탐정학과를 만들었더니 인기가 폭발적이다.”
 
안타깝게도 국내 대학의 글로벌 경쟁력이 떨어진다. 원인을 뭐라 보나.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세계 대학평가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동국대는 세계 400위권인데(2018 QS 세계대학평가 432위) 국내 순위로 따지면 13위다. 세계 400위권 대학이 국내에 13개밖에 없다는 얘기다. 정부 규제와 부실한 재정이 걸림돌이다. 정부가 대학을 꽉 틀어쥐고 있으면 절대 한국형 ‘미네르바스쿨(Minerva School)’이 나오기 어렵다. 세계 대학들과 경쟁할 수 있게 지원하고 자율성을 확대하되 결과에 책임지게 하는 게 정부 역할이다.”
 
한 총장이 미네르바스쿨 얘기를 꺼낸 건 신선했다. 2014년부터 신입생을 뽑은 미네르바스쿨은 합격률이 2%로 하버드대(4.6%)보다도 더 바늘구멍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행정본부는 있어도 캠퍼스는 없다. 매학기 미국·독일·영국·대만 등 세계 7개국을 돌며 공부한다. 모든 수업은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나머지 시간은 현장을 파고든다.
 
정부 규제를 미네르바스쿨에 비유했다.
“미네르바스쿨처럼 각종 규제에서 자유로운 캠퍼스가 생겨야 글로벌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 거기 학생들은 토굴(교실)을 박차고 나와 구글·아마존 같은 기업과 공동 프로젝트를 한다. 실력이 어떻겠나. 미국 정부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다. 우리는 교육부가 모든 걸 간섭한다. 왜 도서관에 의무적으로 종이책을 사고 사서를 둬야 하나. 전자책이 더 효율적이고 학생이 다 디지털 사서가 될 수 있는데 말이다. 온라인 수업도 마찬가지다. 미네르바스쿨 학생들은 온라인 강의를 듣고 토론한다. 그런데 우리 교육부는 25분 이상 강의만 학점으로 인정한다. 전체 온라인 강좌가 20%를 못 넘게 한다. 무슨 블랙코미디인가.”
 
교육부의 지나친 애정이 독이 된다는 말씀 같다.
“다른 대학 총장들이 말을 못 하니 내친김에 더 얘기하자. 고등교육 수요가 팽창하는 동남아에 진출하려 해도 ‘허들’이 한둘이 아니다. 지난해 하반기 시행한 ‘해외 프랜차이즈법’은 캠퍼스 신설이 아니라 커리큘럼 수출이다. 그렇지만 외국 대학에 제공하는 커리큘럼의 4분의 1 이상은 국내 대학 전임교원이 직접 수업해야 한다. 등록금 동결에 입학금 폐지, 강사법까지 겹쳤는데 재정을 감당할 수 있나. 말로만 규제 완화다. 더구나 교육부는 각종 재정사업을 내걸고 대학을 쥐락펴락한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 등록금·입시·강사법 문제는 정치의 눈으로 보지 말고 자율의 눈으로 봐야 한다.”
 
 
교훈 재정립, 지도교수 선택제 보람
 
한 총장은 대학의 책무도 중요하다고 했다. 정부 탓만 하지 말고 대학 스스로 구각(舊殼)을 깨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의 책무를 강조하셨다.
“등록금은 선불제다. 선불 받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취업 못 시키고, 진학(대학원) 못 시키면 환불해 줘야 한다. 졸업생들이 등록금 반환청구소송을 하는 날이 올 수 있다. 교수도 정신차려야 한다. 동국대가 대학원생 지도교수 자율선택제를 도입했더니 100여 명의 학생이 갈아탔다. 이게 뭘 의미하는가. 다른 대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총장은 전국의 대학 총장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총장은 풀코스 마라톤 선수가 아닌 ‘구간’을 책임지는 릴레이 선수다. 구간보다 더 뛰려고 욕심부리면 소신 행정을 못한다. 내부와 외부 눈치 보지 말고 소신껏 일하라”는 주문이었다. 그게 학생과 대학과 국가를 살리는 총장의 자세라는 것이다.
 
힘들어하는 청년들에게도 조언해 달라.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도전하는 삶이 중요하다. 방탄소년단(BTS)을 보라. 명문대 나왔나, 유학 갔다 왔나. 그렇지만 세계 최고가 됐고 영어도 잘한다. 자신이 잘하는 음악을 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잘하는 게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장점을 살려야 한다. 그게 성공의 길이다. 어릴 적 꿈이었던 승려가 된 나도 그랬다.”
 
퇴임 후 계획은.
“청계산의 정토사로 돌아가 건강에 신경써야겠다. 4년 동안 세 번 큰 수술을 받았다. 나이 탓도 있고, 스트레스도 상당했던 것 같다(웃음). 어느 곳에 있더라도 학교를 돕겠다.”
 
고3 때 출가한 정토학 권위자
경주고 재학 시절 불교학생회 동아리 활동을 하며 학교 인근 분황사를 자주 왕래하다 출가를 결심했다. 농사를 짓던 완고한 유교 집안의 종손(3남1녀)으로 반대가 극심했으나 고3 때 뜻을 이뤘다. 온 세상을 밝히라는 뜻의 법명 보광(普光)은 은사 임도문 스님이 지어줬다. 원효 스님이 생전에 머물렀고 영정이 모셔져 있던 보광전의 ‘보광’에서 따왔다고 한다. 불교의 내세관과 죽음의 문제, 극락에 대해 연구하는 정토학(淨土學)의 권위자로 1982년 청계산에 정토사(淨土寺)를 세웠다.  
 
90년 동국대 불교대학 교수로 부임해 27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머리 스타일은 개성의 상징”이라며 청소년 두발 자율화를 이끌어낸 일화는 유명하다. ‘집착을 버리는 것’이 무소유(無所有)라는 인생 철학을 갖고 있으며, 주지로 있는 정토사의 전 재산(700억원 상당)을 대한불교조계종 대각회에 넘겼다. 취미는 명상과 독서. 1951년생. 동국대 불교학 학·석사, 일본 붓교대 문학박사. 동국대 대외협력처장, 불교대학장, 불교대학원장, 한국정토학회장. 2015년 5월 동국대 18대 총장.
 
양영유 교육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yangy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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