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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는 짜깁기 아닌 편집서 나온다, 피카소도 그랬다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3>
‘창조적’이 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창조적’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다. 창조적 인물로 매번 레오나르드 다빈치나 스티브 잡스 등 역사적으로 탁월한 인물들을 꼽는다. 그리고 그들처럼 ‘창조적’이 되라고 한다. 그게 전부다. 구체적인 창조방법론은 없다.
 
독일어에 ‘행위가능성(Handlungs-möglichkeit)’이란 단어가 있다. 난 이 단어로 낯선 개념이나 이론의 효율성을 판단한다. 해당 개념이나 이론으로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내게 도움이 되는가를 바로 판단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제 아무리 위대한 이론도 내 ‘행위가능성’을 열어주지 못한다면 그리 필요한 게 아니다. ‘창조 방법론’과 관련해서 수년간 자료를 찾아봤지만 내 ‘행위가능성’을 넓혀주는 개념을 찾지 못했다. 융합, 통섭, 크로스오버, 콜라보레이션, 큐레이션 등등 어깨에 힘만 잔뜩 잡는 개념들이 전부였다. 뭔가를 구체적으로 시도하기에는 너무 공허한 개념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이 번쩍 뜨이는 단어를 만났다. ‘편집’이다.
 
미 작가 “잡스의 창조성은 편집” 주장
 
피카소는 수많은 작가들의 그림에서 ‘편집의 단위’를 ‘훔쳐와서’ 새롭게 편집했다. 이 편집을 가능케 한 ‘메타언어’는 훗날 ‘큐비즘’이라 불린다. 사진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설명을 듣고 있는 관람객들. [사진 문소영]

피카소는 수많은 작가들의 그림에서 ‘편집의 단위’를 ‘훔쳐와서’ 새롭게 편집했다. 이 편집을 가능케 한 ‘메타언어’는 훗날 ‘큐비즘’이라 불린다. 사진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설명을 듣고 있는 관람객들. [사진 문소영]

일본의 특이한 인문학자 마츠오카 세이고(松岡正剛)가 쓴 『편집공학』이라는 책에서였다. ‘편집’이란 개념을 붙잡고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그 고민의 결과가 수년 전 내가 출간한 『에디톨로지(Editology)』라는 책이다(물론 내가 주장하는 ‘에디톨로지’와 마츠오카 세이고의 ‘편집’ 개념은 많이 다르다).
 
‘에디톨로지’, 즉 ‘편집학’은 한마디로 요약된다. “창조는 편집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새롭게 ‘편집’되었을 뿐이다. 2011년 스티브 잡스가 사망하자 『아웃라이어』『블링크』등으로 유명한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말콤 글래드웰은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스티브 잡스의 창조성은 ‘편집(editing)’”이라고 썼다. 동일한 주장을 그보다 내가 훨씬 전부터 했으나,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억울하지만 할 수 없다. ‘주변부지식인’의 운명이다).
 
‘편집’을 주장하니, ‘짜깁기’와 무엇이 다르냐고 한다. 차원이 다르다. 창조방법론으로서의 ‘편집’은 ‘편집의 단위(unit of editing)’와 ‘편집의 차원(level of editing)’이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조화되는 과정이다. ‘편집의 단위’는 내 필요에 따라 조작할 수 있는 상태의 ‘정보’나 ‘지식’을 의미한다. 어디서든 내 필요에 따라 빌려올 수 있다. 창조적 행위는 각각의 ‘편집의 단위’를 내 필요에 따라 연결할 때 일어난다. 각각의 단위를 연결하는 바로 그 연결고리를 ‘메타언어(meta-language)’라고 부른다. 이 ‘메타언어’가 바로 내 ‘창조물’이다. 한 번 만들어진 연결고리, 즉 ‘메타언어’는 또 다른 연결고리에 의해 새롭게 편집된다. ‘편집의 차원’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편집의 단위’와 ‘편집의 차원’이 끊임없이 얽혀 들어가는 과정을 ‘창조’라고 한다.
 
피카소가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고 이야기했을 때, ‘훔치는 것’은 ‘편집의 단위’일 뿐이다. 피카소는 훔쳐온 ‘편집의 단위’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편집했다. 예를 들어, 피카소의 ‘큐비즘(cubism)’을 대표하는 작품인 ‘아비뇽의 처녀들’은 루벤스의 ‘파리스의 심판’, 폴 세잔의 ‘다섯 명의 목욕하는 여인들’과 ‘세 명의 목욕하는 여인들’, 엘 그레코의 ‘계시록-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 등의 다양한 그림에서 ‘편집의 단위’들을 가져왔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뿐만 아니다. 사물을 원통·원추·원구라는 단순한 기학학적 형태로 축소해 표현하고자 했던 세잔의 시도와 르네상스 이후 회화의 근본으로 여겨왔던 원근법이나 명암을 무시하고 다양한 퍼스펙티브를 한 화면에 그려 넣었다. 단순하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했던 ‘포비즘(fauvism)’, 아프리카의 전통조각이나 가면 같은 ‘편집의 단위’도 이 그림에 포함돼 있다. 그러나 훔쳐온 것들의 ‘짜깁기’처럼 보이는 이 그림은 당시에는 볼 수 없었던 전혀 다른 형태의 그림이 된다. ‘편집’되었다는 이야기다. 훗날 피카소의 이 특별한 편집방식은 ‘큐비즘’이라는 ‘메타언어’로 불리게 된다.
 
‘대상의 해체와 재편집’이라는 피카소의 큐비즘적 편집방식은 ‘대상의 재현’이라는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온 회화의 근본원칙을 포기하는 ‘추상회화’의 등장을 예고한다. 정작 피카소 스스로는 ‘대상의 재현’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그러나 칸딘스키 같은 화가는 ‘대상의 해체’를 더욱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하여 ‘대상의 재현’과는 전혀 관계없는 ‘추상회화’라는 또 다른 ‘편집의 차원’을 만들어낸다. ‘최초의 추상화가’라는 영예를 얻은 칸딘스키와 또 다른 방식의 추상회화를 개척한 클레가 함께 선생으로 일했던 곳이 바로 ‘바우하우스’다(추상회화가 나오면서부터 인간은 ‘창조적’이 되었다. ‘추상회화’가 갖는 문화사적 의미는 추후 자세히 다루겠다).
 
이 맥락에서 던져야 할 질문이 하나 있다. 도대체 언제부터 ‘창조’라는 단어가 쓰였을까? ‘구글 엔그램 뷰어(Google Ngram Viewer)’라는 기막힌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 구글은 1500년 이후 발간된 약 800만 권의 책을 디지털 데이터로 만들었다. 궁금한 단어를 검색해보면 언제부터 어느 정도의 빈도로 해당 단어가 쓰였는가를 알 수 있다. 검색만으로도 수많은 가설을 만들 수 있는 데이터 천국이다. 여기서 ‘창조성(creativity)’이란 단어를 검색해봤다.
 
놀랍게도 ‘창조성’이란 단어는 1920년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있었던 단어가 아니라는 얘기다. ‘추상회화’의 출현과 바우하우스의 설립시기와 겹친다. 이 기막힌 우연을 어떻게 설명할까? 그래서 ‘바우하우스’인 거다(한국 최초의 문예지 ‘창조’도 바우하우스 설립과 같은 해인 1919년 김동인·주요한 등의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창간됐다. 이건 우연인 듯하다).
 
 
독일 민주주의도 바이마르에서 시작
 
바이마르 국립극장 앞에 있는 괴테와 실러 동상. 제1차 세계대전과 11월 혁명으로 독일제국이 무너진 후, 바로 이 장소에서 독일의 첫 국민회의가 열렸다. [사진 윤광준]

바이마르 국립극장 앞에 있는 괴테와 실러 동상. 제1차 세계대전과 11월 혁명으로 독일제국이 무너진 후, 바로 이 장소에서 독일의 첫 국민회의가 열렸다. [사진 윤광준]

학창시절 세계사를 배웠다면 ‘바이마르(Weimar) 헌법’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비스마르크에 의해 1871년 탄생한 독일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붕괴된 후, 1919년 8월에 제정된 독일공화국 헌법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근대적 황제의 나라들이 근대적 국민국가들의 연합에 패배한 전쟁이다. 독일제국과 같은 편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제국, 오스만제국도 패전과 동시에 사라졌다. 독일과 동맹을 맺었던 러시아는 1917년 혁명으로 붕괴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이 연합국 측으로 참전을 결정했다. 팽팽했던 전세가 갑자기 독일 측에 불리하게 전개됐다. 독일은 휴전교섭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 독일해군 지도부의 무모한 공격명령에 반발한 수병들이 1918년 11월 3일 킬 항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에 노동자들이 가담하면서 반란은 독일 전역으로 빠르게 번졌다. 독일의 ‘11월 혁명’이다.
 
이 ‘11월 혁명’은 러시아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됐다. 이듬해가 되자, 프리드리히 에버트(1871~1925)가 이끄는 사민당의 온건노선과 카알 리프크네히트(1871~1919)와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가 이끄는 스파르타쿠스단의 과격노선이 맞부딪혔다. 에버트의 사민당은 참전용사들로 구성된 의용군을 끌어들여 스파르타쿠스단을 제압했다. 그리고 1919년 2월 6일, 소요가 끊이지 않는 수도 베를린을 피해 튀링겐주의 작은 도시 바이마르에서 첫 국민회의를 소집했다. ‘바이마르 헌법’은 바로 이 같은 정치적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근대적 민주제도가 바이마르에서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바이마르는 독일의 이상주의를 상징하는 괴테와 실러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곳에서 바우하우스도 시작했다. 1919년 4월 1일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1883~1969)가 설립했다. 공식명칭은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Staatliches Bauhaus in Weimar)’. ‘바우하우스(Bauhaus)’라는 학교명은 당시로서는 낯선 것이었다. 그로피우스는 중세 건축업자들의 조합인 ‘바우휘테(Bauhütte)’에서 이 명칭을 가져왔다. 중세 장인들의 성당 건축처럼 종합예술로서의 건축을 지향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오늘날 독일 도시 곳곳에서 ‘바우하우스’라는 간판을 볼 수 있다.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와는 관계없는 건축자재, 공구 마켓의 이름이다).
 
그로피우스의 원대한 꿈과 달리 바우하우스의 출발은 그리 신통치 않았다. 바우하우스는 당시 재정난에 처해 있던 바이마르의 ‘작센대공 미술대학’과 ‘작센대공 공예학교’의 통합을 조건으로 허가받았다. 그로피우스는 두 학교의 교수진과 학생들을 새롭게 출발하는 바우하우스의 구성원으로 인계받아야만 했다. 시작부터 바우하우스는 내부갈등으로 삐그덕 거릴 수밖에 없었다. 재정적 지원도 형편없었다. 그래서 그로피우스가 위대한 거다! 그 형편없는 조건에서 역사적 ‘창조학교’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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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